본문내용
예들 들어 앙드레 세리노의 사진작품에서 우리는 성스러운 이미지를 포르노적으로 제시하거나 오줌 속에 잠긴 예수상을 내놓는 그의 신성모독적 이미지에 충격을 받지만 사실 이 충격은 일종의 대리체험이다. 외설스럽고 혐오스러운 이미지 속에 기독교적 도상을 담아내는 그의 작품은 충동의 공간인 '신체의 내부'에 대한 탐사로 볼 수 있지만 이 탐사는 상징계 전체를 붕괴시킬 만한 힘을 갖지 못한다. 그것은 희열의 대리물로서의 신성모독적 이미지가 관객으로 하여금 "너무 많이 즐기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막아주는 안전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신디 셔먼, <무제, #190>, 1989
마리코 모리, <달의 결합>, 1996
3.
라캉은 충동의 공간인 실재계와의 만남이 상징계의 한계지점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우리는 여전히 '언어의 감옥'에 갇혀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라캉의 후기이론은 이 언어의 감옥이 우리의 생각처럼 그렇게 철통같이 경비되는 것은 아니며 감시의 허술함을 틈타 감옥 바깥의 세계가 감옥의 질서를 위협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라캉의 이론을 받아들이자면 오늘날 미술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재계의 귀환'은 상징계의 우월성을 무너뜨리는 현상이 아니다. 엡젝트 아트가 실재계의 신체를 보여준다는 말은 있는 그대로의 실재계와 우리가 만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실재계는 상징계의 한계지점에서 항상 부정의 형태로만 경험된다. 그러나 실재계와의 만남이 잦으면 잦을수록 우리가 상징계의 한계지점을 발견하는 횟수가 늘어나는 것만은 분명하다. 콥젝에 따르면 상징계의 불안정성은 역사적인 개념이다. 오늘날은 상징계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도 약화되어있는 시대이다. 상징계의 힘이 약화되었다는 것을 덮어가리기 위해서 오늘날의 문화는 또 다른 '가짜'를 만들어낸다. 보드리야르는 디즈니랜드와 같은 테마파크는 바깥의 공간은 현실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 일부러 인위성을 강조하여 만들어낸 공간이라고 말한 바 있다. 충동의 공간 역시 의미와 거리가 상실되었음을 은폐하기 위해 인위적인 거리를 만들어낸다. 콥젝은 필름 누아르에서 사용되는 딥 포커스, 키아로스쿠로 등의 조명효과는 깊이의 결여를 은폐하기 위한 가짜 장치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조명효과는 진짜같이 그럴듯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어딘지 인공적인 느낌을 준다. 선글라스와 바바리코트와 같은, 필름 누아르에 즐겨 등장하는 우스꽝스러운 변장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콥젝에 따르면 완벽한 변장이 아니라 어설픈 위장은 충동에 의해 정의되는 공간 속에서는 당연한 것이다. 충동은 자기 자신을 보이게/들리게 만드는 것을 특성으로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술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위적 공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늘날의 작품들(적어도 이론의 테두리 안에서 관심대상이 되는 작품들)은 또한 더 이상 자연스러운 듯 보이는 것(사회, 언어, 성 등)의 내재된 인위성을 파헤치는 데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인공적인 세계를 창조하기를 즐긴다. 미디어 아티스트들이 자연스럽게 보이는 현실의 인위적 속성을 폭로하기 위해 세계를 몽타주했다면, 90년대의 아티스트 마리코 모리나 매튜 바니의 비디오 작품 속에서 공상과학 만화와 같은 화려한 의상과 인공적인 공간은 스스로가 너무나 확연한 '공상'의 소산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비현실적인 조명과 물들인 머리, 우주복과 같은 의상은 스스로가 유치한 상상력의 소산이라는 것을 고의적으로 밝힌다. 이 공간들은 엡젝트 아트 이상으로 무조건적인 희열의 추구라는 충동의 요구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상징계의 단일성이 위협받고 있다는 역사적 사실은 충동의 공간을 확대시키는 현대미술 속에서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신디 셔먼, <무제, #190>, 1989
마리코 모리, <달의 결합>, 1996
3.
라캉은 충동의 공간인 실재계와의 만남이 상징계의 한계지점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우리는 여전히 '언어의 감옥'에 갇혀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라캉의 후기이론은 이 언어의 감옥이 우리의 생각처럼 그렇게 철통같이 경비되는 것은 아니며 감시의 허술함을 틈타 감옥 바깥의 세계가 감옥의 질서를 위협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라캉의 이론을 받아들이자면 오늘날 미술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재계의 귀환'은 상징계의 우월성을 무너뜨리는 현상이 아니다. 엡젝트 아트가 실재계의 신체를 보여준다는 말은 있는 그대로의 실재계와 우리가 만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실재계는 상징계의 한계지점에서 항상 부정의 형태로만 경험된다. 그러나 실재계와의 만남이 잦으면 잦을수록 우리가 상징계의 한계지점을 발견하는 횟수가 늘어나는 것만은 분명하다. 콥젝에 따르면 상징계의 불안정성은 역사적인 개념이다. 오늘날은 상징계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도 약화되어있는 시대이다. 상징계의 힘이 약화되었다는 것을 덮어가리기 위해서 오늘날의 문화는 또 다른 '가짜'를 만들어낸다. 보드리야르는 디즈니랜드와 같은 테마파크는 바깥의 공간은 현실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 일부러 인위성을 강조하여 만들어낸 공간이라고 말한 바 있다. 충동의 공간 역시 의미와 거리가 상실되었음을 은폐하기 위해 인위적인 거리를 만들어낸다. 콥젝은 필름 누아르에서 사용되는 딥 포커스, 키아로스쿠로 등의 조명효과는 깊이의 결여를 은폐하기 위한 가짜 장치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조명효과는 진짜같이 그럴듯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어딘지 인공적인 느낌을 준다. 선글라스와 바바리코트와 같은, 필름 누아르에 즐겨 등장하는 우스꽝스러운 변장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콥젝에 따르면 완벽한 변장이 아니라 어설픈 위장은 충동에 의해 정의되는 공간 속에서는 당연한 것이다. 충동은 자기 자신을 보이게/들리게 만드는 것을 특성으로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술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위적 공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늘날의 작품들(적어도 이론의 테두리 안에서 관심대상이 되는 작품들)은 또한 더 이상 자연스러운 듯 보이는 것(사회, 언어, 성 등)의 내재된 인위성을 파헤치는 데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인공적인 세계를 창조하기를 즐긴다. 미디어 아티스트들이 자연스럽게 보이는 현실의 인위적 속성을 폭로하기 위해 세계를 몽타주했다면, 90년대의 아티스트 마리코 모리나 매튜 바니의 비디오 작품 속에서 공상과학 만화와 같은 화려한 의상과 인공적인 공간은 스스로가 너무나 확연한 '공상'의 소산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비현실적인 조명과 물들인 머리, 우주복과 같은 의상은 스스로가 유치한 상상력의 소산이라는 것을 고의적으로 밝힌다. 이 공간들은 엡젝트 아트 이상으로 무조건적인 희열의 추구라는 충동의 요구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상징계의 단일성이 위협받고 있다는 역사적 사실은 충동의 공간을 확대시키는 현대미술 속에서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