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권력과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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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언
Ⅱ. 중국 역사상의 국가권력과 중국불교
1. 중국 역대 왕조와 불교교단의 관계
1) 북조(北朝) - 국가 중심의 불교
2) 南朝 - 왕권과 불법의 대립
2. 불교와 국가간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특징
Ⅲ. 여산 혜원을 중심으로한 국가와 불교와의 갈등
1. 사문 예경(禮敬)의 문제
1) 사문불경왕자 문제의 발단
2) 혜원과 환현의 예경의 대한 논란

본문내용

를 방해하지 않았고 왕 도한 무위로써 교화하여 출가한 사문의 조재를 그대로 인정해 왔으므로 예경과 같은 하찮은 문제는 상관없는 일이 아니냐고 주장하였다.
환현은 왕밀의 답장에 대하여 거듭 반론하였는데 이렇게 3번의 걸쳐 왕복논란이 일어났다. 환현의 주장은 사문의 예경은 몸을 굽혀 예를 갖추지 않고 오직 마음으로만 예를 다한다 하였는데, 사문도 예불과 참회등 사소한 일상형식의 예를 중요시하면서 어찌하여 이 경우에만 소홀히 하는가를 지적하였고 또한 도가 있으면 귀한 것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主上이 부처를 신봉하여 친히 法事를 행하고 있음으로 임금의 도(君道)는 스승(불타)의 도(師道)를 겸하지만 스승이 도는 임금의 도를 겸할 수없으니 임금의 도는 스승의도 보다 더 중요하지 않은가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왕밀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를, 사문의 도는 敬 을 주로 하지만 유교의 형식과 다르며 임금은 스승의 덕(師德)을 겸할 수있지만 스승은 임금의 도를 겸하지 않아도 관계없다. 말하며 환현처럼 임금의 덕을 백성을 키우고 양육하는 것(生生養育)에만 국한 시킨다면 군왕을 三大에 해당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것이라며 반박하고 있다. 환현과 왕밀의 의론은 거듭 계속되었고 환현은 마침내 元興 元年(402)이 되자 사문의 에경문제뿐만 아니라 승려의 숙청을 단행하였다. 이 때문에 왕밀은 이러한 논의가 의미가 없음을 자각하고 환현의 주장에 긍정하였다.
왕밀과 논쟁을 끝낸 환현은 여산의 혜원에게 서찰을 보내 논쟁을 청하였다. 이에 혜원은 환현의 주장데로 노자의 주장데로 왕은 天地道 三大와 동일시하고, 왕의 道는 만물을 생성시키며 천지의 운동을 끊임없이 변화하게 하므로 왕의 지위는 존경해야만 하는 것이며, 사문이라고 해도 왕의 은혜를 받고 있으므로 왕을 존경하지 않는 도리는 있을 수 없는 것임을 확인하며 혜원 자신도 이 점에 있어서 동일하게 생각한다고 답하였다. 다만 그는 불교인에 경우에서 그 입장에 다른 것임을 밝혔다. 불교를 신앙하는 사람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있는데 세간(世間)에서 가르침을 널리 펴는 사람과 출가하여 출세간(出世間)에서 출가의 도를 닦는 이로 구별하였다. 전자의 경우는 세속에 머물기 때문에 환현의 주장대로 왕에게 예경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출가인은 세속 밖에 머무는 이로서 세간을 초월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현세뿐만 아니라 과거세의 業을 끊고 三乘의 道를 닦으며 미래에서는 인간계 혹은 천상계에 태어날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출가자는 6친(六親)의 은혜를 저버려도 불효(不孝)가 아니며 자신을 길러준 왕을 받드는 공경을 하지 않아도 불충(不忠)이 아님을 밝혔다. 왜냐하면 비록 이 사람이 출가를 하여 세간과 거리를 두더라도 겉으로 들어나는 예경이 없다하여 예경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속으로 하고 있으며, 이들이 이루려는 道는 왕이 추구하는 道와 같으므로 출가자가 수행에 의해 도를 완성하면, 그 은혜는 천하에 두루 미치며 그것은 널리 왕이 천하를 다스리는 도와 일치하여 왕의 다스림에 도움을 주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혜원의 주장에 대해 환현이 어떠한 대답을 보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환현은 元興 2년(403)년 사문에 대한 예경 명령을 철회하는데 이날은 환현이 晉祖의 황위를 찬탈하고 천자에 오른 날이였다. 이런 환현의 조칙에 몇몇이 항거하여 철회하도록 간하였으나 환현은 철회하지 않았다. 어쨌든 환현은 찬탈하였다 뒤에 주사되었는데 결론적으로 환현의 예경논란은 불교측의 혜원으로 하여금 예경문제에 대한 불교측의 입론을 제시하게 되었으며 환현 역시 이 주장에 결국은 굴복함으로써 형식적으로는 사문불경왕자론의 주장이 옳음을 확인시켜준 계기가 되었다.

키워드

불교,   국과권력,   국가,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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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1.19
  • 저작시기2005.0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82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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