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 비교 -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를 중심으로
본 자료는 9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해당 자료는 9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9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어거스틴의 인간론
제1절 어거스틴의 생애
제2절 어거스틴 사상의 단초
제3절 어거스틴의 가르침
1. 인간론 -인간의 의지
2. 구원론 -은혜와 원죄
1) 인간의 본래적 상태
2) 아담의 타락
3) 타락의 결과
4) 은혜와 구원
5) 예정
3. 은혜의 수단
1) 은혜론
2) 타락과 죄의 본질

Ⅲ. 펠라기우스주의의 인간론
제1절 펠라기우스주의에 관한 예비적 고찰
1. 의지의 자유
2. 죄
3. 죄의 보편성
4. 은혜
제2절 펠라기우스 논쟁
1. 논쟁의 요지
2. 펠라기우스의 이단사상
3. 반펠라기우스주의
4. 반펠라기우스 논쟁
제3절 펠라기우스 논쟁에 나타난 어거스틴의 사상
1. 원죄 -
2. 의지
3. 인간의 타락과 구원
Ⅳ. 결론
※ 참고문헌-

본문내용

무력할 따름이다. 그는 원죄와 관련된 인간 의지의 무능성을 언어의 유희로 설명할 적이 있다. 타락 전 아담은 죄를 안 지을 수도 있었다. 타락한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나중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이후에 인간은 죄 짓는 것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비록 타락했으나 은혜 아래서 우리는 죄를 안 짓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거스틴에 따르면 성도들은 타락 전 아담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는 것이다. 낙원에서조차 아담에게는 끊임없는 은혜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어거스틴이 그의 정신적인 제자 칼빈과 달리 타락 후 예정론을 주장한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극단적인 예정론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마니교의 비난과 달리 그는 형벌의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다고 하지 않았으며, 펠라기우스의 주장과는 달리 인간이 선을 행하기에 전적으로 무능하다고는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거저 주시는 은혜는 반드시 인간으로 하여금 선을 행하도록 인간의 의지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의 은혜론은 그의 사도 바울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자신의 회심의 체험에 기초하고 있었다. 엄밀히 말해 그의 체험을 바울의 입장에서 해석했던 것이다.
3. 인간의 타락과 구원
타락의 결과로 사람은 처음에 받은 자유의지, 즉 범죄할 수도 있지마는 범죄하지 않을 수도 있던 자유의지까지 상실하였으므로 이제는 특별한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선을 택하거나 행할 수 없게 되었다고 어거스틴은 말한다. 또 그는 인간이 처음에 받은 자유가지 위험시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조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 이장식, op. cit., p. 226.
이제 타락 후에 자유의지가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을 가지고는 인간은 선한 생활을 할 수가 없으며 또 계명과 율법으로는 악한 의지에 대항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신앙을 통해서만이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 행위의 법이 위협으로 명령하는 것을 신앙의 법은 믿음으로 확보한다.
이렇게 될 때의 어거스틴의 표어는 "당신이 명하시는 것을 주십시오"
) 어거스틴, "영과 문자에 관하여", op. cit., ⅩⅢ, 22. 이장식, ibid.
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은혜로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펠라기우스는 이 발에 불만을 표시하였다. 그 까닭은 어거스틴이 인간의 도덕적 책임의 회피를 권장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일련의 은혜의 역할을 역설하였다. 이 은혜로 신생이 시작되면 죄는 세례로써 용서를 받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욕은 여전히 남아있으나 그것이 죄가 될 수는 없는 것은 하나님이 이제는 그 이상 그 정욕을 헤아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죄의 은혜는 바울의 생각과 같이 사람의 신앙과 결부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도 신앙과 더불어 시작된다. 이 신앙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시작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믿게 된다. 신앙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시작이고 구원의 능력은 은혜의 역사이다. 신앙은 진리에 동의하는 일이며 혹은 선포된 진리에 대한 동의이다. 곧 진리에 대한 인식적 참여이다. 그러나 믿지 않았더라면 알지 못했을 것이다. 신앙은 첫째 그리스도를 믿는 일인데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대한 지적인 인식을 말함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고도의 신앙은 진리의 인식에서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일인데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소망을 두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 가지는 신앙을 말한다. 이 두 번째 신앙이 인식을 얻는 신앙이다.
Ⅳ. 결론
이제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을 마치면서 이 논쟁이 우리에게 주는 깊은 신학적인 의미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어거스틴은 은총론을 정립해 주면서 인간의 자기정체성을 우리에게 제시해 준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죄를 가장 깊이 발견할 될 때, 우리는 그 죄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를 베푸시는 은혜의 의로우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통해서 지키려고 했던 핵심적인 내용인 것이다. 즉 은혜 위에 은혜를 부으시며 그분의 은총을 부으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인간의 자리를 철저하게 정립해 준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은혜는 오늘도 그분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의 은총 아래서 가장 성실하고 책임 있는 존재로서 자신들의 의지를 확립해 가도록 이끄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자기의 선하시고 의로우신 뜻을 위하여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임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어거스틴의 중심적인 사상은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총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이러한 사상은 구원과 관련된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로 돌리게 하였으며, 모든 선한 것의 원천을 하나님에게로 돌리게 하였던 것이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은 단순히 신학적인 인간론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이 논쟁은 곧 교회를 보호하고 성도 개인의 신앙을 지키고 그리스도교를 지키는 거룩한 싸움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논쟁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교회로부터 정죄를 당하고 그 지역에서 추방을 당하는 내용을 살펴보았던 것처럼 이 논쟁은 자신의 생명을 내맡기는 싸움이었다. 즉 논쟁의 결과에 따라서 한쪽은 생명을 내놓아야 하는 절대절명의 사건이었다.
지나간 역사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시대의 거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와 같은 논쟁을 통하여 얻어낸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과 교리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다시 한 번 더 진리에의 문을 조심스러이 두드리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참으로 다가가는 신앙자세가 정립되기를 기도한다.
참고문헌
김영도. "펠라기우스주의자들과의 논쟁에 나타난 어거스틴의 성서해석."
「성서마당」 26호. 서울: 한국성서학연구소, 1997. 8.
박영관. 『역사신학강의』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이장식. 『기독교사상사 제1권』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2.
차종순, 『교리사』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4.편집부 編 .『기독교 명저 60선』 서울: 종로서적, 1985.
  • 가격3,000
  • 페이지수27페이지
  • 등록일2005.01.23
  • 저작시기2005.0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83134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