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사 총 정리..서양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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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권적 통일국가의 등장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중세말의 유럽정치사에 있어 가장 크고 중요했던 사건은 백년전쟁이었다. 백년전쟁의주된 원인의 하나는 프랑스에서의 발루아 왕조의 성립과 이에 관련된 왕위계승권문제 였다. 카페왕조가 프랑스왕위를 오래 누리면서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던 이유늬 하나는 대대로 왕위를 계승할 왕자가 끊이지 않았다는 점에 있었다. 백년전쟁이 시작 무렵의 프랑스와 영국의 인적 , 물적 자원은 프랑스가 훨씬 유리하였다. 당시 영국의 인구는 약 350만인데 비하여 프랑스왕의 지배 하에 있던 주민은 약 1600만이었고 왕령지의 주민만도 1200만 정도 였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는 영국에 비하여 훨씬 더 생산적이고 번영하고 있었으며 생활수준도 높았다. 그러나 이러한 저네적인 자원의 차이는 봉선사회에서의 군사력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 영국이나 프랑스가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은 비슷하였고 양국왕이 쓸수 있는 재원 또한 거의 비슷하거나 오히려 에드워드 3세의 수입이 약간 많은 편이 였다. 프아티에 전투와 브레티니 휴전까지의 약 2년간에 프랑스는 내부적으로 큰 곤욕을 치르었다. 즉 에티엔느 마르셀의 반란과 전술한 농민반란이 그것이다.
백년전쟁 초기의 영웅이었던 흑태자가 1376년에 사망하고 잇따라 에드워드 3세와 샤를 5세가 사망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저마다 국내문제에 분주하여 백년전쟁은 소상상태를 유지하게 되고 1396년에는 양국이 20년간의 휴전에 합의하였다. 백년전쟁의 싸움터가 된 프랑스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을 것은 짐작하고 남음이있다. 단순히 영국군의 약탈과 방화만이 아니었다. 프랑스군의 용병대는 전투가 끝나자 급료가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곧바로 도적단으로 변하여 영국군 이상으로 노략질을 일삼았다. 그리하여 모근 기름진 땅에 지방이 황폐해버리고 경작되지 않고 주민이 사라져 가시덤불과 숲으로 변하여 방치되었다. 영국은 백년전쟁으로 노르만의 정복 이래 프랑스 내에 소유하게 된 거의 모근 영토를 상실하였다. 그러나 그 대신 영국 역시 국민의식이 강화되고 특히 섬 나라 로서의 자각을 갖게 된 것은 영국의 근대적인 발전에 있어 매우 귀중한 소득이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왕권을 중심으로 집권
적인 통일 국가로 발전의 길을 걷고 있을 때 독일은 영방국가와 자치도시 시사령 등 수많은 대소의 독립적인 정치 단위로의 분열의 길을 걸었으며 그러한 추세는 황제권의 쇠퇴와 보조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독일의 황제권은 시칠리아 출신의 프리드리히 2세를 마지막으로 결정적으로 쇠퇴하게 되었다.
노르웨이,덴마크,, 스웨덴의 이른바 북유럽 3국은 칼마르 동맹으로 통합되었으나 스웨덴의 민족주의적 반란이 거듭된 끝에 스웨덴이 따로 독립하여 동맹은 깨지고 말았다. 그러나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통합은 1814년까지 계속 되었다. 중세의 교황권이 단순히 그리스도교세계의 영도자로서만이 아니라 세속적인 면에서의 보편적 권력으로서 황제권과 싸우고 ,세속둔주 위에 군림할 뿐 아니라, 막상한 경제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민족이동과 서로마제국의 몰락으로 조성된 혼란과 무질서 상태라는 중세 초기의 역사적인 상황과 지방 분권적인 봉건사회의 구조와 깊은 관현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세 말에 이르러 봉선 사회가 붕괴하고 집권적인 통일 국가가 성장함에 따라 보편적 권력으로서의 교황권은 그 존립의 기반을 상실하면서 세속적인 왕권의 도전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교황권은 쇠초의 길을 걷데 되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신학과 신앙면에 변화가 생기고 새로운 경향이 나타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4세기 초 영국의 프란체스코과 수도사인 윌리엄 오캄은 철저한 제창함으로써 13세기에 모처럼 이루어진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파괴하고 나아가서 교권정치와 그 제도가 신앙의 전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러한 이러한 오캄의 주장보다 더 위험한 새로운 사상을 전개한 것은 옥스퍼드대학의 신학교수였던 존 위클리프였다. 그는 교회의 부와 사치를 공격하여 유명해졌으며 교회재산은 세속적 권위의 배려로 유지되는 것이라고 하여 당시 교회재산을 탐내고 있던 랭카스터 공 고온트의 존을 비롯한 영국 귀족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위클리프의 사상은 이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죄를 범한 성직자가 집전한 성사는 무효이며 그자체가 영혼의 구제에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그리스도는 영적인 존재일뿐 빵이나 포도주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하고 하여 공격하였다. 보헤미아왕 카알 4세의 딸이 영국와 리처드 2세의 첫째 왕비였던 관계로 그녀를 따라 양국에 왔던 보헤미아인들은 위클리프의 사상을 전부 받아 들이지는 않았으나 고위 성직자의 부와 세속성을 공격하고 신앙생활의 핵심은 성격이라고 주장했다. 신비주의는 언제나 그시스도교의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제도로서의 교회를 넘어서 선과의 직접적인 경합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단으로 흐르기 쉽고 제도적인 교회의 입장에서는 문제성을 지닌 사상이었다. 중세말의 가장 주목할 신비주의자는 도미니쿠파의 에크하르트와 그의 제자 타올러 였다. 그들은 신 플라톤 학파의 영향을 받아 신적 경향이 강하였고 타울러는 일반인과 성직자로 구분된 일반 신의 벗 이라는 모임을 조직하여 교회를 내부로부터 개혁하려고 하였다.
교회의 대분열은 누구의 눈에나 있을 수 없는 불상사였다. 1394년 파리대학은 사태수습의 길이 두 교황의 퇴위라고 선언하였으나 아무도 퇴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종교회의에서의 사태수습의 길이 모색되고, 1409년 피사에서의 공의회는 두 교황의 최위를 결정하고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였으나 기존의 두 교황이 퇴위를 거부한 결과 세사람의 교황이 있게 되는 형세가되어 혼란만 가증되었다. 13세기에 황금기를 맞이하였던 그리스도교적이고 봉건적인 중세 문화는 14세기에 이르러 뚜렸한 조락의 조짐을 조이게 된다. 기사문학은 생명을 살실하고 형식주의에 빠졌으며 장 그 멍은 13세기 후반에 그의 장미이야기에서 궁정적인 사랑을 아유하고 풍자하였다. 이렇듯 14,15세기에는 봉건사회와 중세 문화가 붕괴하고 시들어갓으나 그밑바닥에서 새로운 사회와 문화가 움트고 태동하고 있었던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겟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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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31페이지
  • 등록일2005.04.13
  • 저작시기2005.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9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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