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1880년대 임오군란 갑신정변기의 일본의 대 조선 정책의 특징을 논하시오. 2.일본에게 있어서 청일, 러일전쟁의 의미를 조선과 관련시켜서 약술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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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1880년대 임오군란 갑신정변기의 일본의 대 조선 정책의 특징을 논하시오. 2.일본에게 있어서 청일, 러일전쟁의 의미를 조선과 관련시켜서 약술하시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임오군란,갑신정변기의 시대적 상황
2. 1880년대의 일본 대 조선정책 조사
3.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발발 배경
4. 청일전쟁의 의미
5. 러일전쟁의 의미

Ⅲ. 결 론

* 참고문헌 *

본문내용

되어 10일 러 일 양국으로부터 선전 포고되었다. 서전에서 일본군은 한국을 제압하고, 한국에 2월 23일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요해 유리한 전략체제를 확립하였다. 4월 하순 한국에 상륙, 북상한 일본 제1군은 5월 초 압록강 연안에서 러시아군과 충돌하여 격파했고, 5월 18일 대한제국정부로 하여금 러시아와 체결했던 모든 조약과 러시아인에게 부여했던 모든 이권의 폐기 혹은 취소를 공포하게 했다. 그리고 같은 달 랴오둥반도[遼東半島]에 상륙한 제2군은 난산[南山] 다련[大連]을 점령하고 뤼순을 고립시켰다. 다시 6월에는 만주군 일본총사령부를 설치하고 15개 사단을 동원하였다. 8월 랴오양[遼陽] 부근에서 양국군이 첫번째 대규모적인 접전을 벌였고, 10월의 사허후이전투[沙河會戰鬪], 1905년 1월의 헤이거우타이전[黑溝臺戰] 등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고전 끝에 모두 승리하였다. 한편 뤼순의 러시아 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을 꾀하였으나, 8월 황해에서 일본 해군의 총공격을 받고 항구 안에 봉쇄당하였다. 뤼순 공략을 맡은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의 제3군은 여러 차례에 걸친 203고지 공격으로 많은 손실을 보았지만 1905년 1월 드디어 공략에 성공하였다. 유럽으로부터 지원군을 얻은 크로파트킹 지휘하의 러시아군 32만과 오야마 이와오[大山嚴]가 이끄는 일본군 25만은 3월에 펑톈[奉天:현 瀋陽]에서 회전(會戰), 러시아군이 패퇴하였으나 일본군도 사상자가 7만에 이르는 큰 손실을 보았다. 한편 러시아는 육전(陸戰)에서의 패배를 해전에서 만회하려고 로제스트벤스키 지휘하의 발틱함대를 회항시켜 5월 27,28일 대한해협에서 대해전을 전개하였으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이끄는 일본 연합함대에 격파되어 전멸하였다. 결국 러 일 양국의 전쟁 수행능력은 펑톈 회전 전후부터 한계에 이르렀다. 특히 러시아는 계속되는 패전으로 사기가 침체되고 그 해 1월 '피의 일요일'로 비롯된 군대의 반란과 농민폭동(제1차 혁명)이 일어나 혁명 진압이 급선무였다. 약 20억 엔[円]의 전비(戰費) 가운데 12억 엔의 공채 모집에 응함으로써 일본을 지원하였던 영국 미국도 일본의 승리가 만주의 단독 점령으로 발전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미국 프랑스는 3,4월경 러 일 양국에 강화할 것을 종용하였고, 동해해전(東海海戰) 후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인 미국 대통령 T.루스벨트의 알선으로 8월 포츠머스 강화회의가 열렸다. 일본의 전권(全權)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외상, 러시아의 전권 비테 전 재무장관이 참가하여, 남 사할린섬의 할양(割讓)을 내용으로 한 조약이 9월 5일 조인되고, 16일 휴전이 성립되었다. 그 결과 일본은 한국지배권의 확립과 남만주 진출이 결정되고, 이것이 동시에 대륙의 권익을 꾀하는 미국과의 대립을 가져왔다.
Ⅲ. 결 론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왜구문제에서 시작되었다. 고려말에 빈번하던 왜구의 침입은 조선 건국초 다소 뜸해졌으나 소규모 노략질은 계속되었다. 태조는 즉위초에 아시카가바쿠후[足利幕府]에게 왜구를 다스리도록 요청하고 몇년 뒤 정식 외교관계를 맺었다. 통교 이후 왜구가 근절되지 않자 조선은 1419년(세종1) 쓰시마섬[對馬島]을 정벌하였으며 43년에는 교린정책의 일환으로 쓰시마도주(島主)와 계해약조(癸亥約條)를 맺어 3포를 개항하였다. 그러나 1510년(중종 10)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교역을 중단하였다가 12년 임신약조(壬申約條)로 재개하고, 35년 고성(固城) 사량진(蛇梁津)의 난으로 다시 교역을 중단하였다가 47년(명종 2) 정미약조(丁未約條)로 재개하는 등 단교와 통교를 반복하였다. 명종 때 을묘왜변이 일어난 뒤 마침내 일본인 내왕이 금지되고 정식교섭도 끊기게 되었다. 선조 때 일어난 임진왜란은 조선에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가져왔으나 일본에서는 조선의 도자기 서적 활자 등의 기술이 전래되어 문화의 급진전이 이루어졌다. 전란 후 일본에 도쿠가와바쿠후[德川幕府]가 들어서 조선에 통교를 요청하여 1609년(광해군 1) 기유약조(己酉約條)가 체결되었다. 그 뒤 12차례 파견된 조선의 통신사는 외교사절과 문화의 전파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1811년(순조 11) 이후 일본의 역지교역(易地交易) 주장이 대두되자 통신사행렬은 끊어지게 되었다. 그 뒤 일본에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정부가 수립되면서 정한론(征韓論)이 일기 시작하였고, 드디어는 1875년(고종 12) 운요호사건을 조작하여 이듬해 강화도조약을 체결, 조선은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그 뒤 일본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조선 침략을 계속하여 1910년에는 주권을 강탈, 조선을 강점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일제 강점기에 대한 역사인식은 그 전후의 시기와 형식상으로는 연결되어 있었지만, 민족운동사를 제외하고는 단절되어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일제 강점기가 한국사에서 제대로 자리매김되지 않은 데에는 이같은 역사인식상의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와 관련하여, 강점 행위를 부각하여 민족의식 내지는 적대의식을 고양해야 할 필요성이 있을 때에는 역사인식보다는 역사의식이, 그것도 깊고 광범한 역사인식을 수반하지 않은 채 즉흥적으로, 먼저 발동되곤 하였다. 민족사에서 통한과 철저한 반성 더 나아가 청산의 대상으로 단죄해야 할 이 시대는 냉정한 이성에 입각한 역사인식으로 정리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끔 항일적 민족정서에 기초한 대(對)일본 '역사의식'을 앞세움으로, 광범한 자료와 정확한 논리를 바탕으로 분석적이면서 종합적인 해석을 구사하는 역사인식을 혼란스럽게 하였고 결국에는 그러한 역사의식 자체마저 공허하고 무기력하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되씹어 본다. 강한 운동력과 호소력을 갖는 역사의식일수록 냉엄하고 논리적인 역사인식에 기초(제휴)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 참고문헌 ♣
한국사학론총간행위원회, 『한국사 인식과 역사이론』, 지식산업사, 1997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역사입문』, 풀빛, 1995
이기백, 홍승기, 『한국사 시민강좌』,일조각, 1997
한국역사연구히, 『한국사 강의』, 한울아카데미, 1987
연민수, 『일본 역사』, 보고사, 1998
강창길,하종문, 『일본사 101장면』, 가람기획,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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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4.29
  • 저작시기2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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