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
Ⅱ. 당시(고려 말)의 전반적인 상황
Ⅲ. 권문 세족과 신진 사대부의 갈등 (발표 생략)
Ⅳ. 성리학과 불교의 갈등
Ⅴ. 고려의 군사조직
Ⅵ. 고려의 신분구조
Ⅶ. 당시 고려의 입장 및 고려인들의 자세
Ⅷ. 고려의 대외인식 및 대외정책
Ⅸ. 영화에 대한 비평 및 정리
Ⅱ. 당시(고려 말)의 전반적인 상황
Ⅲ. 권문 세족과 신진 사대부의 갈등 (발표 생략)
Ⅳ. 성리학과 불교의 갈등
Ⅴ. 고려의 군사조직
Ⅵ. 고려의 신분구조
Ⅶ. 당시 고려의 입장 및 고려인들의 자세
Ⅷ. 고려의 대외인식 및 대외정책
Ⅸ. 영화에 대한 비평 및 정리
본문내용
을 끌고 겨우 달아났다. 황급한 나머지 황손이 사로잡히는 꼴을 당하였으며 수많은 보물도 그대로 남겨놓은 채였다. 그 뒤 기황후와 소종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 알져져 있지 않다.
이후 고려와 명은 더욱 밀착하였다. 1370년 5월, 홍무제는 사신을 보내 공민왕을 고려 왕으로 책봉하면서 제도와 풍속은 고려 방식에 따르라고 하였다. 또 대통력(大統曆)을 내려주고 왕비와 신돈 등 고위 관직자에게 비단을 주었다. 그러나 이 관계가 안정적이거나 지속적인 것은 아니었으므로 기회만 보이면 명나라는 고려에 대해 지배하려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명나라는 틈만 나면 제주도의 말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고려 조정에서는 마지못해 오계남(吳季南)을 딸려 제주도로 보내 말을 고르게 하였다. 또한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는 최원에 이어 동년 3월에 마필진헌사 손천용, 동년 5월에 다른 마필진헌사 김보, 12월에 하정사 김보생을 보냈으나 모두 감금되어 소식이 끊어졌다. 이는 고려정권에 더욱 커다란 협박을 하기 위한 명나라의 조치였다. 1377년 최원과 김보, 김보생 등은 고려로 간신히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손천용과 그 일행은 귀양 보내진 사실만이 알려질 뿐 고려로 돌아온 기록은 없다. (고려사 133권, 列傳 46)
이상으로 공민왕의 외교를 정리해보면 첫 단계에서는 명의 강력한 위세에 굴하지 않고 양면외교를 벌였고, 둘째 단계에서는 힘에 밀려 명에 기울어졌으며, 셋째 단계에서는 실리를 찾느라 명과 갈등을 빚었다. 당시 고려의 외교가 영화에서처럼 드러나는 결말과 같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외교면에서 공민왕은 자주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Ⅸ. 영화에 대한 비평 및 정리
재미를 가미한 사극 열풍과 한국 영화가 흥행을 거두고 있는 요즘 독특하면서도 대중적인 영화인 무사는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 영화에 대해서 아쉬운 점(생각했던 것 보다 영화의 스케일이나 무협씬이 장대하거나 화려하지 않았던 것 같다)도 있었지만, 최소한 몇 가지 측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만 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당시의 시대 상황의 재현에 성공적이었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영화가 14세기의 상황을 비교적 생동감 있게 보여준 것이다.
둘째, 영화 ‘무사’는 시대 배경의 역사적 맥락을 현재의 시점에서 되살리거나 재해석하려고 했다. 영화 중반부 이후에서는 역사적인 내용보다는 부용공주를 둘러싼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어떻게 보면 딱딱할 수 있는 원명 교체기의 상황을 택한 것은 탁월했고, 흥미롭게 잘 구성하였다.
셋째, 하급 무사 진립이 최정 장군의 오만함을 제압하려는 모습과 노비 출신인 여솔과 최정 장군의 갈등에서 점차 변화되는 신분관계가 암시적으로 나타난다고 본다.
한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는 원인이 뒤따른다. 여기에는 크게 대외적인 요인과 대내적인 요인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타국, 특히 중국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였기 때문에 대외적인 요인을 무시할 수 없다. 당시 즉, 고려말에는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주인이 몽고족에서 한족으로 바뀌는 원명 교체기였고, 대내적으로는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 간의 갈등이 심했던 시기였다. 특히 권문세족이 친원적인 성향을 갖었다면 신진사대부는 친명적인 성향을 갖었기 때문에 대ㆍ내외적인 요인들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영화 ‘무사’역시 이러한 혼란한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우리의 정통성을 알아내고, 과거 시행착오의 경험을 교훈 삼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않는데 있다면, 영화 ‘무사’에서 드러나는 고려의 외교는 결코 역사가 단지 지나간 옛 일이 아니라 현대에 사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후 고려와 명은 더욱 밀착하였다. 1370년 5월, 홍무제는 사신을 보내 공민왕을 고려 왕으로 책봉하면서 제도와 풍속은 고려 방식에 따르라고 하였다. 또 대통력(大統曆)을 내려주고 왕비와 신돈 등 고위 관직자에게 비단을 주었다. 그러나 이 관계가 안정적이거나 지속적인 것은 아니었으므로 기회만 보이면 명나라는 고려에 대해 지배하려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명나라는 틈만 나면 제주도의 말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고려 조정에서는 마지못해 오계남(吳季南)을 딸려 제주도로 보내 말을 고르게 하였다. 또한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는 최원에 이어 동년 3월에 마필진헌사 손천용, 동년 5월에 다른 마필진헌사 김보, 12월에 하정사 김보생을 보냈으나 모두 감금되어 소식이 끊어졌다. 이는 고려정권에 더욱 커다란 협박을 하기 위한 명나라의 조치였다. 1377년 최원과 김보, 김보생 등은 고려로 간신히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손천용과 그 일행은 귀양 보내진 사실만이 알려질 뿐 고려로 돌아온 기록은 없다. (고려사 133권, 列傳 46)
이상으로 공민왕의 외교를 정리해보면 첫 단계에서는 명의 강력한 위세에 굴하지 않고 양면외교를 벌였고, 둘째 단계에서는 힘에 밀려 명에 기울어졌으며, 셋째 단계에서는 실리를 찾느라 명과 갈등을 빚었다. 당시 고려의 외교가 영화에서처럼 드러나는 결말과 같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외교면에서 공민왕은 자주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Ⅸ. 영화에 대한 비평 및 정리
재미를 가미한 사극 열풍과 한국 영화가 흥행을 거두고 있는 요즘 독특하면서도 대중적인 영화인 무사는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 영화에 대해서 아쉬운 점(생각했던 것 보다 영화의 스케일이나 무협씬이 장대하거나 화려하지 않았던 것 같다)도 있었지만, 최소한 몇 가지 측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만 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당시의 시대 상황의 재현에 성공적이었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영화가 14세기의 상황을 비교적 생동감 있게 보여준 것이다.
둘째, 영화 ‘무사’는 시대 배경의 역사적 맥락을 현재의 시점에서 되살리거나 재해석하려고 했다. 영화 중반부 이후에서는 역사적인 내용보다는 부용공주를 둘러싼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어떻게 보면 딱딱할 수 있는 원명 교체기의 상황을 택한 것은 탁월했고, 흥미롭게 잘 구성하였다.
셋째, 하급 무사 진립이 최정 장군의 오만함을 제압하려는 모습과 노비 출신인 여솔과 최정 장군의 갈등에서 점차 변화되는 신분관계가 암시적으로 나타난다고 본다.
한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는 원인이 뒤따른다. 여기에는 크게 대외적인 요인과 대내적인 요인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타국, 특히 중국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였기 때문에 대외적인 요인을 무시할 수 없다. 당시 즉, 고려말에는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주인이 몽고족에서 한족으로 바뀌는 원명 교체기였고, 대내적으로는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 간의 갈등이 심했던 시기였다. 특히 권문세족이 친원적인 성향을 갖었다면 신진사대부는 친명적인 성향을 갖었기 때문에 대ㆍ내외적인 요인들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영화 ‘무사’역시 이러한 혼란한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우리의 정통성을 알아내고, 과거 시행착오의 경험을 교훈 삼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않는데 있다면, 영화 ‘무사’에서 드러나는 고려의 외교는 결코 역사가 단지 지나간 옛 일이 아니라 현대에 사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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