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제주 송악산의 인공동굴
2. 진해시의 웅천왜성
3. 진해는 계획도시
4. 진해우체국
5. 진해우체국 뒤의 일본식 건물
6. 손원일동상 뒤의 일본식 건물
7. 전라도 여수의 진남관내의 석상
8. 신성리 왜성
9. 일본의 잔재를 찾으면서...
2. 진해시의 웅천왜성
3. 진해는 계획도시
4. 진해우체국
5. 진해우체국 뒤의 일본식 건물
6. 손원일동상 뒤의 일본식 건물
7. 전라도 여수의 진남관내의 석상
8. 신성리 왜성
9. 일본의 잔재를 찾으면서...
본문내용
진해시 통신동에 위치한 우체국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한 일제는 각 구역에 8개국의 독특한 건물을 배치할 계획이었으나 군항건설 계획이 축소되어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고 러시아식 건축양식으로 지은 진해우체국 창구동 청사만 건축되어 남아 있다고 한다. 진해우체국 건물은 1912년 10월 25일 준공하여 그 해 11월 15일 진해우편국이 이전하여 청사로 이용되고 있으며 단층 목조 건물이다. 제 2차 세계대전 말기 일제가 무기를 생산할 재료가 부족하여 지붕의 동판과 난간을 모두 징발하고 아연판으로 대체하였으나 1984년에 다시 본래대로 동판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러시아 풍의 절충식 근대 건축으로 건물 양식의 절묘함이 나타나 있었다.
5. 진해우체국 뒤의 일본식 건물
< 멀리 보이는 일본식 건물 >
진해우체국 정문의 두 기둥은 배흘림 양식으로 약간 불룩해서 고풍스런 미를 풍기며 채광이 좋도록 만들어진 반원형이 창이 일본적이고 때론 영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우체국 앞에서 맞은편을 보고있는데 일본식 건물이 눈에 띄었다. 자료집을 만들 때 한번 본적이 있는 '일본식 건물'이었다.
진해에는 이런 일본식 건물이 곳곳에 남아있다고 한다. 저 건물은 일제강점기 시절 장교들이 드나들던 음식점이었다고 한다.
6. 손원일동상 뒤의 일본식 건물
< 손원일동상 뒤의 일본식 건물 >
손원일동상의 바로 뒤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러일전쟁의 보상금으로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현재는 해군관련건물로 이용되고 있었다.
7. 전라도 여수의 진남관내의 석상
☞ 진남관
※ 보물 제324호인 진남관은 4백년간 수군의 본거지로 혹은 구국의 성지로서 전승의 사명을 다한 곳이다. 1599년 12월에 통제사겸 전라죄수사로 부임한 이시언이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진해루터에 세운 75칸의 거대한 객사로 그 후 절도사 이도진이 1664년에 개축하고 1716년에 불의의 화재로 소실된 것을 1718년 수사 이제면이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본 건물은 240여평이나 되며 앞너비가 30칸이요, 옆길이 8칸이며 높이만도 40여척에 68개의 거대한 기둥으로 그 위력이 웅대하며 우리나라 최대의 단층목조건물이다. 1910년 고종 4년 경술년 대에는 여수 공립보통학교를 시초로 여수중학교와 야간상업중학원등의 학교로 사용한 바 있었다.
< 여수 석인상 >
수군을 위장해서 세운 것으로 전부 파손되고 경복궁 뒤편 뜰에 묻혀있는 것을 발견해서 현재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수군을 위장해서 세운 것이라는데 그 모습이 문인의 모습이라는게 미스테리였다.
8. 신성리 왜성
☞ 신성리 왜성
※ 순천 동남쪽 광양만을 따라 쌓은 성으로 예전에는 예교성 또는 왜교성이라 하였다. 정유재란(1597)당시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가 북진계획이 좌절되자 본국으로 철수하기 위한 교두보로 삼기 위하여 1597년 겨울에 급조한 성으로 이듬해인 무술년 10월부터 11월 19일 까지 2개월 동안 왜교성 전투를 수행한 성터이다. 본성 3겹, 내성 3겹, 외성 3겹 등 9겹으로 성벽을 쌓았는데, 넓이는 316,800 ㎡이며, 전라도 지방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왜성으로 유명하다. 거의 폐허가 되고 본 진이 있었던 성가퀴(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만 남아 있던 것을 최근 보수,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사적 제 4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신성리 왜성은 명군이 주둔한 북쪽의 검단산성과 충무공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주둔한 남쪽의 장도(노루섬) 사이에 위치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라 한다.
< 신성리 왜성 >
< 신성리 왜성의 본진. 천수각이 있었다고 한다. >
웅천왜성에서도 보았던 왜성의 일반적인 특징이 신성리 왜성에서도 보이고 있었다. 정상부에 저처럼 단을 쌓고 건물을 지었던 것이다. 이곳 역시 본진 건물은 남아있지 않았다.
9. 일본의 잔재를 찾으면서...
한국은 과연 일본의 식민지를 경험하면서 근대화를 경험하였겠는가? 근대화의 개념이 어떻게 정의 내려지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식민지시기 한국은 일본의 영향 아래 <근대화>를 경험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물질의 해방>, 즉 경제적 측면에서는 기여했을지 몰라도, <인간의 해방>이라는 점에서는 매우 취약한 한계를 갖는 것이었다. 그것은 제국주의의 원활한 수탈을 가능케 하는 합리성으로 정당화될지 몰라도 조선후기 이래 아래로부터 올라오고 있었던 개혁의 요구를 억누르고, 봉건성을 온존화시켰다는 점에서 한국사의 발전을 방해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어떤 하나의 매커니즘이었고 한국인들이 살아가면서 내면화하고 생존을 위해서는 모방하고 배울 수밖에 없는 것으로 작용되었다. 그 결과 한국의 근대문화는 일본의 그것과 <닮은꼴>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다.
해방 후 우리는 일제 식민지 청산을 일제히 외쳤지만 이미 우리 자신 속에 내면화되어 있었고 더더욱 친일세력이 집권하고 군사 독재정권이 반일 감정을 고취시키면서, 식민지 잔재의 청산을 그 필요성조차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였고 시도되지도 못하였다. 그 결과 그것은 지금도 끈질기게 명맥을 유지하면서 한국의 지금 우리 문화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식민지 유산>을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 이것은 실로 간단치 않은 문제이고 간단히 해결책을 제시할 수도 없는 문제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일제가 한국사회에 강요했던 봉건적인 것 즉 인간해방을 억압하는 요소들을 제거하는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 작업은 그 같은 요소들을 청산하지 못하고 오히려 개악하기도 한 것이 바로 한국 사회였다는 점에서 우리 자신 및 사회에 대한 개혁 작업의 성격도 띨 것이다. 역사의 문제는 역사의 냉철한 이성적 틀을 가지고 볼 때 해결 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60년대 이후의 경제발전이 일제 식민지 지배의 혜택이 아니듯이 아직까지 우리사회에 남아있는 식민지 잔재는 우리의 책임이며, 바로 여기에서 <근대적응·근대극복의 이중과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우리 사회가 아직도 그러한 한계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해방전후 한국사의 연속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리라.
5. 진해우체국 뒤의 일본식 건물
< 멀리 보이는 일본식 건물 >
진해우체국 정문의 두 기둥은 배흘림 양식으로 약간 불룩해서 고풍스런 미를 풍기며 채광이 좋도록 만들어진 반원형이 창이 일본적이고 때론 영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우체국 앞에서 맞은편을 보고있는데 일본식 건물이 눈에 띄었다. 자료집을 만들 때 한번 본적이 있는 '일본식 건물'이었다.
진해에는 이런 일본식 건물이 곳곳에 남아있다고 한다. 저 건물은 일제강점기 시절 장교들이 드나들던 음식점이었다고 한다.
6. 손원일동상 뒤의 일본식 건물
< 손원일동상 뒤의 일본식 건물 >
손원일동상의 바로 뒤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러일전쟁의 보상금으로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현재는 해군관련건물로 이용되고 있었다.
7. 전라도 여수의 진남관내의 석상
☞ 진남관
※ 보물 제324호인 진남관은 4백년간 수군의 본거지로 혹은 구국의 성지로서 전승의 사명을 다한 곳이다. 1599년 12월에 통제사겸 전라죄수사로 부임한 이시언이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진해루터에 세운 75칸의 거대한 객사로 그 후 절도사 이도진이 1664년에 개축하고 1716년에 불의의 화재로 소실된 것을 1718년 수사 이제면이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본 건물은 240여평이나 되며 앞너비가 30칸이요, 옆길이 8칸이며 높이만도 40여척에 68개의 거대한 기둥으로 그 위력이 웅대하며 우리나라 최대의 단층목조건물이다. 1910년 고종 4년 경술년 대에는 여수 공립보통학교를 시초로 여수중학교와 야간상업중학원등의 학교로 사용한 바 있었다.
< 여수 석인상 >
수군을 위장해서 세운 것으로 전부 파손되고 경복궁 뒤편 뜰에 묻혀있는 것을 발견해서 현재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수군을 위장해서 세운 것이라는데 그 모습이 문인의 모습이라는게 미스테리였다.
8. 신성리 왜성
☞ 신성리 왜성
※ 순천 동남쪽 광양만을 따라 쌓은 성으로 예전에는 예교성 또는 왜교성이라 하였다. 정유재란(1597)당시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가 북진계획이 좌절되자 본국으로 철수하기 위한 교두보로 삼기 위하여 1597년 겨울에 급조한 성으로 이듬해인 무술년 10월부터 11월 19일 까지 2개월 동안 왜교성 전투를 수행한 성터이다. 본성 3겹, 내성 3겹, 외성 3겹 등 9겹으로 성벽을 쌓았는데, 넓이는 316,800 ㎡이며, 전라도 지방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왜성으로 유명하다. 거의 폐허가 되고 본 진이 있었던 성가퀴(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만 남아 있던 것을 최근 보수,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사적 제 4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신성리 왜성은 명군이 주둔한 북쪽의 검단산성과 충무공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주둔한 남쪽의 장도(노루섬) 사이에 위치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라 한다.
< 신성리 왜성 >
< 신성리 왜성의 본진. 천수각이 있었다고 한다. >
웅천왜성에서도 보았던 왜성의 일반적인 특징이 신성리 왜성에서도 보이고 있었다. 정상부에 저처럼 단을 쌓고 건물을 지었던 것이다. 이곳 역시 본진 건물은 남아있지 않았다.
9. 일본의 잔재를 찾으면서...
한국은 과연 일본의 식민지를 경험하면서 근대화를 경험하였겠는가? 근대화의 개념이 어떻게 정의 내려지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식민지시기 한국은 일본의 영향 아래 <근대화>를 경험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물질의 해방>, 즉 경제적 측면에서는 기여했을지 몰라도, <인간의 해방>이라는 점에서는 매우 취약한 한계를 갖는 것이었다. 그것은 제국주의의 원활한 수탈을 가능케 하는 합리성으로 정당화될지 몰라도 조선후기 이래 아래로부터 올라오고 있었던 개혁의 요구를 억누르고, 봉건성을 온존화시켰다는 점에서 한국사의 발전을 방해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어떤 하나의 매커니즘이었고 한국인들이 살아가면서 내면화하고 생존을 위해서는 모방하고 배울 수밖에 없는 것으로 작용되었다. 그 결과 한국의 근대문화는 일본의 그것과 <닮은꼴>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다.
해방 후 우리는 일제 식민지 청산을 일제히 외쳤지만 이미 우리 자신 속에 내면화되어 있었고 더더욱 친일세력이 집권하고 군사 독재정권이 반일 감정을 고취시키면서, 식민지 잔재의 청산을 그 필요성조차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였고 시도되지도 못하였다. 그 결과 그것은 지금도 끈질기게 명맥을 유지하면서 한국의 지금 우리 문화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식민지 유산>을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 이것은 실로 간단치 않은 문제이고 간단히 해결책을 제시할 수도 없는 문제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일제가 한국사회에 강요했던 봉건적인 것 즉 인간해방을 억압하는 요소들을 제거하는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 작업은 그 같은 요소들을 청산하지 못하고 오히려 개악하기도 한 것이 바로 한국 사회였다는 점에서 우리 자신 및 사회에 대한 개혁 작업의 성격도 띨 것이다. 역사의 문제는 역사의 냉철한 이성적 틀을 가지고 볼 때 해결 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60년대 이후의 경제발전이 일제 식민지 지배의 혜택이 아니듯이 아직까지 우리사회에 남아있는 식민지 잔재는 우리의 책임이며, 바로 여기에서 <근대적응·근대극복의 이중과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우리 사회가 아직도 그러한 한계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해방전후 한국사의 연속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