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천무후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내용

분명히 가릴 줄 알았던 것이다. 무후는 황제가 된 후에도 계속 설회의를 총애했다. 설회의는 더욱 오만해져서 자꾸 방자한 짓을 하게 되었다. 무후도 드디어 정이 떨어져서 여관들에게 명령하여 박살(撲殺)을 하게 했다고 한다. 이런 인물을 총애해도 그 사랑에 빠지는 일이 없었던 데 무후의 '강점'이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 또한 여러 해에 걸친 숙청으로 관계의 인재의 층이 엷어진 것도 사실이다. 무후는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황제가 된 2년 후(692)에 민간에서 많은 인재를 발탁 등용했다. 여기에는 일종의 인기 전술의 목적도 있어서 등용된 자들도 옥석이 뒤섞였던 모양이다. 이때 어떤 자가 무후를 '장님 황제'라고 비난하여 관리에게 잡혔다. 관리가 무후에게 보고할 겸, 어떻게 처분을 해야 할는지 지시를 받기 위해 찾아가자 무후는 웃으면서
"너희들이 정신을 차리고 있으면 그만이다. 남이 하는 말 따위는 개의치 말라. 어서 석방을 해 주라." 하고 명령했다고 한다.
무후는 이처럼 얼핏 보고 쉽사리 인재를 등용했지만, 상대방에게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면 내치는 것도 빨랐다. 때문에 변변치 못한 인간은 자주 도태되고 결국은 정선된 자들만 남게 되었던 것이다. 무후는 그런 면에서는 비길 바 없는 감식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에게 대체로 짠 점수를 주고 있는 『자치통감』조차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태후는 함부로 녹위(祿位)로써 인심을 수습했다고 하지만, 그러나 직능에 적당치 않은 자는 쫓아내거나 또는 형주(刑誅)를 가했다. 형상(刑賞)의 자루를 틀어쥐고 천하를 제어하면서 명찰선단(明察善斷)을 했다. 그러므로 당시의 영현(英賢)은 다투어 직무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녀가 신하를 부리는 방법은 엉터리인 것 같으면서도 뚜렷한 원칙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두각을 나타내오 묘당에서 중책을 맡은 이가 재상 적인걸(狄仁傑)이었다. 그는 자주 무후를 간하여 만년의 무후가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했으며, 무후 역시 그의 의견은 잘 받아들이고 항상 '국로(國老)'라고 부르며 존경했다고 한다. 그런 적인걸이 700년(무후가 사망하기 5년 전)에 세상을 떠났을 때 무후는 "이제는 묘당이 비었구나"하며 울부짖었고 "하늘은 우리 국로를 왜 이렇게 빨리 뺏어 가느가"하며 통탄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5년 후 평화리에 무후시대의 막을 내리게 한 장간지(張柬之)와, 현종(玄宗)시대에 명재상으로 칭송을 받게 되는 요숭(姚崇)은 모두 그가 무후에게 추천한 인물이었다. 이 밖에도 적인걸이 천거한 수십 명의 인물들은 모두 후일 명신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무후가 인물을 보는 눈이 정확했음을 입증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치적(治績)
무후가 스스로 창시한 주왕조의 성신(聖神)황제로서 군림한 것은 690년부터 705년까지의 15년 동안이지만, 고종을 대신해서 국정을 다룬 시기를 덧붙이면 45년이라는 긴 치세가 된다. 그 동안 어떤 치적을 올렸을까? 적어도 정치, 외교면에서는 볼 만한 것이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한반도에서는 신라와 손을 잡고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켜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었으나 오래 지탱하지 못하게 되어 한반도에서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동북의 거란, 말갈, 북방의 돌궐, 서방의 토번과의 절충도 피동적이었고, 또 국내 정치에서는 눈부신 발전도 없었던 대신 큰 파탄도 생기지 않았다. 그토록 큰 정치적인 폭풍이 휘몰아쳤는데도 세상은 대체로 평온했고 사람들은 평화로운 생활을 즐기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이것이 무후 치세의 정치면에서의 최대의 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치적이라는 말에서는 좀 빗나가지만 그녀의 치세의 최대의 특색은 문화면에 있었던 듯 싶다.
그녀는 시인, 학자, 문화인 등을 모으기를 좋아했다. 이미 고종을 대신하여 정치의 실권을 장악한 675년, 많은 문인들을 모아 『열녀전』『신궤』『백료신계(百僚新誡)』『악서』등 천여 권의 서적을 편찬하게 했는데 (그들은 북간학사라고 불렸다), 황제가 된 후에도 총애한 장역지(張易之), 장창종(張昌宗)형제를 위해 공학부(控鶴府)라는 관청을 만들어 주었고, 이교(李嶠), 장열(張說), 송지문(宋之問) 등과 같은 쟁쟁한 시인, 문화인을 동원하여 『삼교주영(三敎株英)』이라는 방대한 서적을 편찬하게 하고 있다. 이같은 문화사업이 무후의 치세를 화려하게 채색한 것은 물론이다.
무후 자신도 문학에 취미가 많았다고 할까, 특이한 문자감각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황제가 된 해(690)에 동도(東都)낙양을 신도(神都)라고 개칭했을 뿐 아니라, 관직의 이름도 중서성(中書省)→봉각(鳳閣), 문하성(門下省)→난대(鸞臺), 상서성(尙書省)→문창대(文昌臺), 중서령(中書令)→내사9內史), 문하시중(門下侍中)→납언(納言) 등과 같이 운치 있게 고치고 있다. 연호도 치세 15년 동안에 16회나 바꾸었는데, 이렇게 자주 개원(改元)한 황제는 그 예가 없다. 더구나 천책만세(天冊萬歲), 만세등봉(登封), 만세통천(通川)과 같은 4자의 연호까지 채택하고 있다. 선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매우 드문 경우라고 할 만하다.
그뿐 아니라 황제의 명칭도 자주 바뀌고 있다. 즉위했을 때엔 성신황제라고 했지만 그 후에는 금륜(金輪)성신황제(603), 월고(越古)금륜성신황제(694), 자씨(慈氏)월고금륜성신황제(695), 천책(天冊)금륜대성(大聖)황제(695)로 바뀌는 것이다. 또 하나 그녀는 '칙천문자'라고 불리는 새 글자까지 재정하고 있는데 그 수는 17자라고도 하고 20자라고도 한다.
칙천무후는 이처럼 세련된 언어감각이 그녀의 치세에 자못 여제다운 화려한 색상을 곁들이고 있었던 것 같이 생각된다.
705년 1월 병석에 누워 있는 무후는 재상 장간지 등의 권유에 따라 태자 현에게 양위하고 11월에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한 후 칙천대성황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통칭인 칙천무후는 여기에 유래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칙천무후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칙천무후는 같은 여성에서 보면 참 대단한 것 같다. 물론 잔인하고 냉정한 면도 있지만 그녀는 정치적인 면에서의 역할 또한 대단하였으며 굉장히 모사스럽고 영리한 여성이었던 것 같다.

키워드

  • 가격3,0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5.05.31
  • 저작시기2005.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99549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