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다르크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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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영국군의 가혹한 지배와 약탈행위로 인해 프랑스의 시민과 농민들 사이에 반영감정(反英感情)이 고조된 점과, 샤를 7세에 의하여 보병포병(砲兵)을 주력으로 한 프랑스 국왕군(國王軍)이 강화되었던 점 등이 그 원인이었다. 양국간의 최종적 강화(講和)는 1475년에 체결되었지만, 보르도가 함락된 1453년에 백년전쟁이 사실상 끝난 것으로 본다. 전쟁의 의의】 프랑스는 장기간에 걸친 전쟁과 내란에 의해서 봉건귀족(封建貴族) 세력이 극도로 약화된 반면, 국왕의 권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샤를 7세는 자크 쿠르를 등용하여 왕실의 재정을 정비하고, 국왕의 상비군(常備軍)을 강화하며 귀족세력을 누르고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를 추진해 나갔다. 한편 영국에서는 전쟁이 끝난 뒤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30년 간에 걸친 장미전쟁(1455~85)이 일어났으나, 이것은 프랑스에서 돌아온 귀족들의 생존 경쟁의 일환(一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그들이 함께 쓰러지는 결과를 초래하여, 헨리 7세에 의한 중앙집권화의 기초을 굳혀주었다. 한편 영국은 프랑스 내의 영토를 상실함으로써 그 이후 유럽대륙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문제들에 휩쓸리지 않게되어, 독자적인 국민국가(國民國家)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의 공포를 피하여 기술직이민(技術職移民)들이 플랑드르로부터 영국으로 이주함으로써, 플랑드르를 능가하는 모직물 공업이 발전하게 되어 경제적 발전의 기초가 다듬어졌다. 즉, 백년전쟁의 결과, 영국과 프랑스 모두 봉건기사의 세력이 무너지고 농민해방(農民解放)의 진전, 부르주아 계급의 대두, 왕권의 확대 등을 초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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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5페이지
  • 등록일2005.08.11
  • 저작시기2005.0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09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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