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5)과 함께 통일신라시대의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법주사청동미륵대불-높이 33m, 1990년 제작하였다. 이 청동불상을 조성하는 데 주재로 쓰인 청동만도 116t이다. 5m나 되는 연화대좌(蓮華臺座) 위에 원만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는 이 불상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온화한 얼굴이 광배 위로 떠올라 있으며, 반쯤 감은 눈과 다문 입이 신비롭고, 나발(螺髮) 아래 귓불이 길게 늘어졌다. 거불(巨佛)이므로, 14단 140조각으로 나누어 주물을 부어 만들었다. 불두(佛頭)의 경우, 얼굴[相好]과 고수머리 귀 등이 너무 정교하므로 12조각으로 세분, 주물을 뜬 후에 주형(鑄型)을 이루었고, 조립하는 데는 기중기가 사용되었다.
이 불상은 전에 있던 시멘트 미륵대불을 그대로 본떠서 만들었는데, 기술적으로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작업을 한 까닭은 시멘트 미륵대불에는 1939년 당시 일제강점기에서 간구한 독립의 발원이 서렸고, 또한 한국 근대조각의 선구자인 김복진(金復鎭)의 작품이라는데서 미술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청동미륵대불 조성에는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을 주축으로 한 학자 등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17인 위원회가 5회에 걸쳐 평가회를 가졌고, 하나로 이어지는 청동불상 조성의 예가 세계적으로 없었기 때문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비철금속분야 연구진까지 참여하였다.
복천암-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산내 암자이다. 720년(신라 성덕왕 19)에 창건되었으며, 고려 공민왕(재위:1351~1374)이 극락전에 무량수(無量壽)라는 편액을 친필로 써서 내렸다. 조선 세조가 1464년 이 절에서 신미(信眉)학조(學祖)학열(學悅) 등과 함께 3일 동안 기도를 드린 뒤 절에 이르는 길목의 한 목욕소에서 목욕을 하고 피부병이 깨끗이 낫자 이 절을 중수하도록 하고, 만년보력(萬年寶曆)이라는 사각옥판을 내렸다 한다. 1592년(선조 25) 불에 탔으나 곧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극락전과 나한전선방요사채 등이 있다. 그 중 극락전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곧 중건한 건물로 공민왕의 친필인 무량수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유물로는 부도 2기가 전한다. 그 중 복천암수암화상부도는 1480년(성종 11) 제작된 것으로 신미의 부도이다. 팔각원당형 부도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 이 부도 뒤에 있는 복천암학조등곡대사부도는 1514년(중종 9)에 제작된 것으로, 일반적인 석종형 부도보다 훨씬 발전된 형식을 띠고 있어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절 옆 큰 바위 틈에는 절 이름과 관련있는 샘인 복천이 있다.
봉곡사-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산내 암자이다. 1606년(조선 선조 39) 벽암(碧巖) 각성(覺性)이 창건하였으나 이후의 연혁이 전하지 않아 절의 역사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법당과 삼성각요사 등이 있으며, 유물로는 법당 안에 있는 약사여래상이 전한다. 속리산국립공원 안에 있다.
짧은 기행으로 속리산의 많은 볼거리를 뒤로한 채 법주사만을 둘러보고 여정을 마친 것이 아쉽기는 하였지만, 가을에 단풍구경 이든지 동기들과의 여행을 모처럼 할 수 있게 되어서 뜻깊은 기행이 된 듯 하다. 단풍이 한창 물들 때라 사람들도 매우 많았고 길도 많이 밀려 청주에서 두시간을 넘게 차를 타고 가야하는 불편함이 뒤따랐지만, 그간 시험기간이다 축제다 해서 자주 볼 수 없었던 여자친구와 같이 동행하는 길이 즐겁기 그지없었다.
이수과목의 교육목적에는 법주사의 건축물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계기가 되겠을지 모르나 한국의 역사적 건축물을 보면 궁전이나 절 등, 비슷한 유형의 것이 많아 그리 느끼는 바가 크지 못하다는 것이 좁은 소견으로 안타깝기도 하지만 건축물 이외에도 석탑이나 비석 등 의의를 두고 바라 볼 수 있는 문화재 등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돌아오는 길엔 날이 어느덧 어둑어둑 해지고 저녁 바람이 볼을 스치는 느낌이 따가울 정도로 시간이 지나있었다. 피곤한 몸으로 서로의 발길을 집으로 향하고 기행을 끝마쳤지만 아쉬운 점이 많다.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속리산의 경치나 법주사 안의 절경과 예절 등도 같이 배울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기도 하다. 3학년도 거의 마무리가 되어 가는 학기 중에 이번 기행이 올해의 마지막 여행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제 4학년이라는 소위 대학 졸업반이 될테고, 언제 또 이번과 같이 동기들과 여행을 다녀올 수 있을지 기약 없는 여정을 남긴다.
법주사청동미륵대불-높이 33m, 1990년 제작하였다. 이 청동불상을 조성하는 데 주재로 쓰인 청동만도 116t이다. 5m나 되는 연화대좌(蓮華臺座) 위에 원만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는 이 불상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온화한 얼굴이 광배 위로 떠올라 있으며, 반쯤 감은 눈과 다문 입이 신비롭고, 나발(螺髮) 아래 귓불이 길게 늘어졌다. 거불(巨佛)이므로, 14단 140조각으로 나누어 주물을 부어 만들었다. 불두(佛頭)의 경우, 얼굴[相好]과 고수머리 귀 등이 너무 정교하므로 12조각으로 세분, 주물을 뜬 후에 주형(鑄型)을 이루었고, 조립하는 데는 기중기가 사용되었다.
이 불상은 전에 있던 시멘트 미륵대불을 그대로 본떠서 만들었는데, 기술적으로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작업을 한 까닭은 시멘트 미륵대불에는 1939년 당시 일제강점기에서 간구한 독립의 발원이 서렸고, 또한 한국 근대조각의 선구자인 김복진(金復鎭)의 작품이라는데서 미술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청동미륵대불 조성에는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을 주축으로 한 학자 등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17인 위원회가 5회에 걸쳐 평가회를 가졌고, 하나로 이어지는 청동불상 조성의 예가 세계적으로 없었기 때문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비철금속분야 연구진까지 참여하였다.
복천암-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산내 암자이다. 720년(신라 성덕왕 19)에 창건되었으며, 고려 공민왕(재위:1351~1374)이 극락전에 무량수(無量壽)라는 편액을 친필로 써서 내렸다. 조선 세조가 1464년 이 절에서 신미(信眉)학조(學祖)학열(學悅) 등과 함께 3일 동안 기도를 드린 뒤 절에 이르는 길목의 한 목욕소에서 목욕을 하고 피부병이 깨끗이 낫자 이 절을 중수하도록 하고, 만년보력(萬年寶曆)이라는 사각옥판을 내렸다 한다. 1592년(선조 25) 불에 탔으나 곧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극락전과 나한전선방요사채 등이 있다. 그 중 극락전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곧 중건한 건물로 공민왕의 친필인 무량수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유물로는 부도 2기가 전한다. 그 중 복천암수암화상부도는 1480년(성종 11) 제작된 것으로 신미의 부도이다. 팔각원당형 부도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 이 부도 뒤에 있는 복천암학조등곡대사부도는 1514년(중종 9)에 제작된 것으로, 일반적인 석종형 부도보다 훨씬 발전된 형식을 띠고 있어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절 옆 큰 바위 틈에는 절 이름과 관련있는 샘인 복천이 있다.
봉곡사-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산내 암자이다. 1606년(조선 선조 39) 벽암(碧巖) 각성(覺性)이 창건하였으나 이후의 연혁이 전하지 않아 절의 역사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법당과 삼성각요사 등이 있으며, 유물로는 법당 안에 있는 약사여래상이 전한다. 속리산국립공원 안에 있다.
짧은 기행으로 속리산의 많은 볼거리를 뒤로한 채 법주사만을 둘러보고 여정을 마친 것이 아쉽기는 하였지만, 가을에 단풍구경 이든지 동기들과의 여행을 모처럼 할 수 있게 되어서 뜻깊은 기행이 된 듯 하다. 단풍이 한창 물들 때라 사람들도 매우 많았고 길도 많이 밀려 청주에서 두시간을 넘게 차를 타고 가야하는 불편함이 뒤따랐지만, 그간 시험기간이다 축제다 해서 자주 볼 수 없었던 여자친구와 같이 동행하는 길이 즐겁기 그지없었다.
이수과목의 교육목적에는 법주사의 건축물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계기가 되겠을지 모르나 한국의 역사적 건축물을 보면 궁전이나 절 등, 비슷한 유형의 것이 많아 그리 느끼는 바가 크지 못하다는 것이 좁은 소견으로 안타깝기도 하지만 건축물 이외에도 석탑이나 비석 등 의의를 두고 바라 볼 수 있는 문화재 등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돌아오는 길엔 날이 어느덧 어둑어둑 해지고 저녁 바람이 볼을 스치는 느낌이 따가울 정도로 시간이 지나있었다. 피곤한 몸으로 서로의 발길을 집으로 향하고 기행을 끝마쳤지만 아쉬운 점이 많다.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속리산의 경치나 법주사 안의 절경과 예절 등도 같이 배울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기도 하다. 3학년도 거의 마무리가 되어 가는 학기 중에 이번 기행이 올해의 마지막 여행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제 4학년이라는 소위 대학 졸업반이 될테고, 언제 또 이번과 같이 동기들과 여행을 다녀올 수 있을지 기약 없는 여정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