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친히 기함을 이끌고 진 린을 도와 주었다가 그로 인해 기함의 위치가 발각되어 집중 공격을 당했을 수도 있고, 적과 아군이 뒤엉킨 혼전 중에 떠오른 태양으로 인해 기함의 지휘소가 확연히 드러나 면서 적의 공격에 노출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러한 주장들은 그 기반에, 이순신의 죽음은 ''전사''라는 의식이 강하게 깔아 두고서 제기된 것들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나 는 이순신의 최후의 모습을 굳이 ''자살''이나 ''은둔''이라는 심증에 기반한 주장으로 설 명할 필요는 없으며, 여러 사료와 해전 전후의 상황을 통해서도 이순신의 ''전사''는 확 고한 사실임을 재확인하고자 한다. 3.결론 - ''자살설''과 ''은둔설''의 등장 배경 고찰 이상을 통해 우리는 이순신의 ''자살설''과 ''은둔설''이 사실상 비현실적이거나 근거가 부 족한 하나의 가설일 뿐이라는 것을 입증해 보았다.
물론 위의 본론에서 나는 남천우 씨 가 제시한 근거 ⑤에 대해 반박하지 못하였다. 나 역시 어째서 이순신의 장례가 그토록 미루어졌는지, 그리고 왜 15년 뒤에 묘지가 이장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함부로 예상하기 가 힘들다. 단지 전후의 혼란으로 인해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르지 못했으며 그렇기에 후 일에 다시 묘지를 이장하였다고 가정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 이에 대해서는 위의 근거 ④와 마찬가지로, 이순신의 사망 후의 장례 과정에 대한 더 많은 사료 발굴이 필 요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기존의 ''전사설''에 대해 하나의 이견이라 할 수 있는 ''자살설''이나 ''은둔설''은 어찌하여 등장한 것일까. 일단 첫 번째 이유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순신의 사망 장 면에 대한 여러 사료의 일관되지 못한 기록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 본 사료에서 공통된 부분이란, 1598년 11월 19일 새벽에 이순신이 ''전사''하였다는 내용뿐이며, 그 이후의 지휘권 이양이나 전투 지휘 상황에 대한 기록에서는 저마다 다른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견이 등장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이순신의 인생과 죽음 에 대한 ''음모 이론''과 그에 대한 ''동정론''일 것이다. 알다시피 이순신은 삼도 수군 통제 사, 오늘날로 하면 해군 참모 총장이라는 최고의 지위에서 대역 죄인으로 몰려 일개 병 졸로 백의종군하게 되는 극적인 삶을 살았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한 번도 해전 에서 패배한 적이 없으며 실제로 임진왜란 전체의 승리의 양대 축이 되었던 이순신 제 독이 역적으로 몰려서 고문을 받고 강등되는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때문에 남천우 씨는 그 이유로 선조라는 한 인물의 시기심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설령 이순신이 ''전사''하지 않았을 지라도 후에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했을 것이라고 추측하 고 있으며, 이를 막기 위해 이순신은 은둔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자살설''을 주장하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다만 그의 죽음에 있어서 보다 극적 비장미와 동정심을 더하면서, 그와 동시에 무능한 선조와 조정 대신에 대한 비난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자살''이라는 설명 방법을 동원하 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살설''과 ''은둔설''이 근거로 삼고 있는 사료들 외에도 그와 기록된 내용이 서로 다른 사료들이 현존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성급한 결 론을 내리기 힘들다는 것은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다. 게다가 사료들 간의 그러한 차 이를 해석하기 위해, ''음모 이론''과 ''동정론''이라는 극히 주관적인 관점을 내세우는 것 역시 잘못이라고 본다. 오늘날의 사법 체계의 공정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이순신이 라는 인물에 대해 우리에게 각인된 인식으로 본다면, 이순신을 역적으로 몬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발상이다. 하지만 당시의 정부는 전제 봉건 정부였으며, 왕권의 강화와 현 체제의 유지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지상 과제였다. 이를 무시하고서 단지 한 개인 의 검증되지 않은 ''시기심''을 통해 이순신의 미래에 대해 ''음모 이론''을 도출하고, 이에 대한 동정심의 발로에서 다양한 사료들 중 어느 한 쪽의 견해만을 지니고 있는 사료를 선택적으로 선택하여 ''자살설''이나 ''은둔설''이라는 주장을 전개한다는 것은 잘못되었 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현재의 사료에 입각해 볼 때, 아직은 ''자살설''이나 ''은둔 설''과 같은 이견이 기존의 ''전사설''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점을 주장하고자 한다.
물론 위의 본론에서 나는 남천우 씨 가 제시한 근거 ⑤에 대해 반박하지 못하였다. 나 역시 어째서 이순신의 장례가 그토록 미루어졌는지, 그리고 왜 15년 뒤에 묘지가 이장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함부로 예상하기 가 힘들다. 단지 전후의 혼란으로 인해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르지 못했으며 그렇기에 후 일에 다시 묘지를 이장하였다고 가정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 이에 대해서는 위의 근거 ④와 마찬가지로, 이순신의 사망 후의 장례 과정에 대한 더 많은 사료 발굴이 필 요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기존의 ''전사설''에 대해 하나의 이견이라 할 수 있는 ''자살설''이나 ''은둔설''은 어찌하여 등장한 것일까. 일단 첫 번째 이유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순신의 사망 장 면에 대한 여러 사료의 일관되지 못한 기록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 본 사료에서 공통된 부분이란, 1598년 11월 19일 새벽에 이순신이 ''전사''하였다는 내용뿐이며, 그 이후의 지휘권 이양이나 전투 지휘 상황에 대한 기록에서는 저마다 다른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견이 등장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이순신의 인생과 죽음 에 대한 ''음모 이론''과 그에 대한 ''동정론''일 것이다. 알다시피 이순신은 삼도 수군 통제 사, 오늘날로 하면 해군 참모 총장이라는 최고의 지위에서 대역 죄인으로 몰려 일개 병 졸로 백의종군하게 되는 극적인 삶을 살았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한 번도 해전 에서 패배한 적이 없으며 실제로 임진왜란 전체의 승리의 양대 축이 되었던 이순신 제 독이 역적으로 몰려서 고문을 받고 강등되는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때문에 남천우 씨는 그 이유로 선조라는 한 인물의 시기심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설령 이순신이 ''전사''하지 않았을 지라도 후에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했을 것이라고 추측하 고 있으며, 이를 막기 위해 이순신은 은둔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자살설''을 주장하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다만 그의 죽음에 있어서 보다 극적 비장미와 동정심을 더하면서, 그와 동시에 무능한 선조와 조정 대신에 대한 비난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자살''이라는 설명 방법을 동원하 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살설''과 ''은둔설''이 근거로 삼고 있는 사료들 외에도 그와 기록된 내용이 서로 다른 사료들이 현존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성급한 결 론을 내리기 힘들다는 것은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다. 게다가 사료들 간의 그러한 차 이를 해석하기 위해, ''음모 이론''과 ''동정론''이라는 극히 주관적인 관점을 내세우는 것 역시 잘못이라고 본다. 오늘날의 사법 체계의 공정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이순신이 라는 인물에 대해 우리에게 각인된 인식으로 본다면, 이순신을 역적으로 몬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발상이다. 하지만 당시의 정부는 전제 봉건 정부였으며, 왕권의 강화와 현 체제의 유지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지상 과제였다. 이를 무시하고서 단지 한 개인 의 검증되지 않은 ''시기심''을 통해 이순신의 미래에 대해 ''음모 이론''을 도출하고, 이에 대한 동정심의 발로에서 다양한 사료들 중 어느 한 쪽의 견해만을 지니고 있는 사료를 선택적으로 선택하여 ''자살설''이나 ''은둔설''이라는 주장을 전개한다는 것은 잘못되었 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현재의 사료에 입각해 볼 때, 아직은 ''자살설''이나 ''은둔 설''과 같은 이견이 기존의 ''전사설''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점을 주장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