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신학 필기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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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감리교 신학 필기자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항상 구원하실 수 있고 그런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그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인간 편에서 받아들이지 않고 누리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교수님은 하나님의 은총은 항상 우리에게 와 있다고 본다. 칼 라너와 틸리히도 같은 입장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불신할 때 우리가 멸망에 빠져 있는 그 때에도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에게 와 있다. 그것을 떠날 수 없다. 우리의 환경에서 우리는 떠날 수 없다. 이것은 구원을 하나님 편에서의 선택 즉 이중 예정의 구원과는 180도 틀린 이해이다. 교회의 어떤 사람들이 이런 이해를 가진다. 웨슬레 전통에서는 절대 그렇게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이중예정을 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언제나이기 때문에 구원에 이른 사람도 언제나 믿음을 잃을 수 있고 또 잃은 사람도 얻을 수 있다. 그것을 보고 받아들이는 누림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준 것을 받느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그것을 임마누엘이라고 한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가는 부분이다. 죽음 건너편의 내세의 무슨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것이라고 웨슬리는 이야기한다. 현재적인 끝없는 결단에 우리는 구원을 누린다. 죽어서 천당가는 문제가 구원이 아니다. 그래서 현재 형태로 이야기한다. 한국 교회의 구원에 대한 오해가 이렇게 있는 것이다. 구원은 천국에 가는 문제가 아니다. 죽음 저편의 문제가 아니다. 내세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적인 것이다. 구원의 성격을 이해하라. 내세의 구원도 그 때에 그 현재 속에서 누리는 것이다. 내세도 내가 그곳에 있으면 내세가 아니라 현재란 것이다. 구원의 내용은 내세나 현세나 같다. 칭의와 성화이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받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으로 우리가 존재가 사랑으로 변하는 것과 다른 것이 없다. 그것은 지금도 누려야 한다.
죽어봐야 알지?
나의 질문: 구원이 현재적이면 내세에도 현재적인가? (죽어봐야 알지)
내가 지금 행복하면 구원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왜 죽었는가?
참된 행복과 기쁨인가? 불행과 고통이 너희 앞에 있다. 우리 전도자가 하는 일은 행복과 불행의 길을 앞에 제시하는 것 뿐이다. 교수님은 전도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초청하는 것밖에 없다. 누굴 두들겨 패서 구원받으라고 강조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인격적인 결단이다.
미래는 가 봐야 안다고 하신다. 현재는 과거의 영향을 받으며 우리의 믿음이 더 충만해지는 것. 깊어지는 것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을 알수록 우리의 기쁨과 행복이 더 넓어진다고 본다. 10년 전의 믿음의 깊이와 지금 누리는 기쁨이 다르다고 본다. 현세나 내세나 그 원칙이 적용되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교수님 입장은 내세에 가서 초등학교 수준에서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부활의 상태가 다 같지 않다고 말한다.(고전15장에)
성화는 정도가 있다고 본다. 영광에서 영광에 이른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에 이른다고 한다. 내세도 그렇고 현세도 그렇다. (이 천국에 나는 별로 가고 싶지 않다.)
우리의 존재가 성화된 존재가 될 때 사랑이 나오는 것이다. 존재가 그러면 그런 작용이 나온다. 사랑의 존재면 사랑이 나온다. 이것이 기본이다. 우리 존재와 행위에 관한 문제이다. 이것을 웨슬레 자신이 충분하게 설명하지는 못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과 책임이 생긴다. 선행은 우리에게 가능성과 책임과 현실이 된다. 믿음은 언제나 사랑으로 역사한다. (교수님 이론의 문제점: 악을 하지 말아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가 되지 못한다. 악을 행해도 죽음 이후에 기회가 있다면 구지 지금 참을 필요가 무엇인가? 나만 해도 그렇다. 죽음 이후에도 가능성이 있다면 나는 지금쯤 아주 나쁜 놈일 것이다.)
사랑의 존재가 아니니까 사랑의 행위가 나오지 않는다. 선행은 우리의 책임이다. 믿음 안에 은총의 현존이 있고 믿음 안에 인간 편의 책임이 들어있는 것이다. 선행이란 하나님이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너무나 자연스런 것이기 때문에 어렵지 않고 마땅한 것이기 때문에이다. 책임은 응답한다는 말이다.(리스판서빌리티) 주어진 은총에 대해 자연스럽게 응답하는 것이다. 어쨌든 해야 한다. 책임의 내용은 믿음 안에도 들어있다. 믿음을 보다 더 조직적으로 분석할 이유가 있다. 믿음 자체가 신학적인 사건인 동시에 인간의 책임이다. 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믿음 자체가 역동적인 성격을 가지기 때문에 살아있는 존재가 가진 믿음이란 것은 웨슬레의 해석처럼 사랑으로 역동적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자연스럽게 순리적으로 나오게 되어 있다. 참된 의미의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선행으로 표현된다. 그런 의미에서 시너지즘이다. 믿음 자체도 이미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주어진 상태에서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하게 하시니 하는 것이다. 선행을 해서 비로소 성화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화의 은총 밖에서 어떻게 선행이 있는가 불가능하다.(교수님의 이해) 웨슬레의 글에 의해서 매우 자주 반복해서 주장되고 있다. 김홍기 교수는 선행 성화를 주장한다.(송성진 교수님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
웨슬레의 논쟁자가 웨슬레에게 도전적으로 물었다. '우리는 니가 믿음에 의해 칭의된다고 믿는 것을 안다. 하지만 웨슬레 너는 선행에 의해 성화된다고 믿고 그것에 따라 가르치고 있지 않느냐?' 웨슬레의 대적자는 웨슬레의 성화론을 이렇게 이해한다. 성화는 믿음에 의해 되지 않고 선행으로 된다고 가르치냐고 말한다. 웨슬레는 여기에 대해서 '25년 동안 그런 식으로 나는 질문을 받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나는 사적이나 공적인 자리에서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우리는 믿음에 의해서 칭의와 성화된다. 믿음은 칭의의 유일한 조건인 것과 똑같이 성화의 유일한 조건이다.' 웨슬리는 아주 딱 잘라서 말한다. 오직 믿음이 성화의 조건이다. 도전적 질문자는 선행성화가 못마땅해서 질문한다. 도전적 질문자는 성화도 믿음으로라고 해야 하는데 성화는 선행으로라고 가르쳤다고 생각했고 웨슬레는 펄쩍 뛰며 부정한 것이다.
시험범위: 오엑스 단답형 범위는 오늘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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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22페이지
  • 등록일2005.10.12
  • 저작시기2005.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15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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