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흥선대원군과 민비의 대립
2> 흥선 대원군
1. 생애 및 개혁 정치
2. 대원군의 쇄국정책의 배경
3. 서양열강의 공세
4. 쇄국정책의 말로
3> 민비
1. 출신과 간택
2. 대원군과의 갈등
3. 친청정책
4. 외교정책
5. 친러 정책과 을미사변
2> 흥선 대원군
1. 생애 및 개혁 정치
2. 대원군의 쇄국정책의 배경
3. 서양열강의 공세
4. 쇄국정책의 말로
3> 민비
1. 출신과 간택
2. 대원군과의 갈등
3. 친청정책
4. 외교정책
5. 친러 정책과 을미사변
본문내용
나도록 공작하여 마침내 대원군의 정적를 중심으로 한 조 대비 세력, 조두순·리유원 등 노 대신 세력, 김병국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 세력, 대원군의 장자 재면과 형 리최응 세력 및 최익현 등 유림세력과 결탁하고, 최익현의 대원군 규탄 상소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을 하야하게 하여 양주의 곧은골에 은퇴시켰다.
3. 친청정책
대원군의 실각 후 민씨 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움직여 근대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고 일련의 개화시책을 승인했다.
1882년 민씨 정부의 정책에 불평을 품어온 위정척사파와 대원군세력이 봉량미 문제로 폭동을 일으킨 구 군인을 업고 쿠데타를 감행하자, 민비는 재빨리 구 군인의 세력궁중을 탈출하여 충주목 민응식의 집에 피신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민비는 친청사대로 흐르게 되어 개화파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4. 외교정책
이때부터 그녀는 외교에 눈을 뜨고 매우 민첩한 외교 능력을 발휘하였다. 1885년 거문도 사건이 일어나자 묄렌도르프를 일본에 파견하여 영국과 사태 수습을 협상하는 한편 러시아와도 접촉하였고, 또한 청나라와의 관계에서도 흥선대원군의 환국을 묵인하는 등 유연성 있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5. 친러 정책과 을미사변
1894년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한 농민 봉기가 일어나 조선의 정국이 혼미 상태가 되었을 때, 조선에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던 일본은 갑오경장에 간여하면서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그녀의 세력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일본의 야심을 간파하고 친러 정책을 쓰면서 노골적으로 일본에 대항하였다.
이때는 이미 영국, 독일, 러시아 등의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국제적 지위가 실추된 상황이었기에 그녀의 친러 정책은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이에 일본공사 미우라는 조선에서 밀려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일부 친일 정객과 짜고 민씨를 포함한 친러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을미사변을 일으켜 그녀를 시해하는데, 1895년 일본 군인과 정치 낭인들이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왕궁을 습격하고 민씨를 시해 한 뒤 정권을 탈취한 사건이 그것이다. 그리고 고종으로 하여금 민씨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전락시키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그 해 10월 10일 그녀는 신원되어 태원전에 빈전이 설치되고 국장에 의해 숙릉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1897년 명성황후로 추책되고, 11월 양주 천장산 아래에 이장되어 홍릉이라 하였고, 1919년 고종이 죽자 2월에 미금시로 다시 이장되었다. 그녀의 소생으로는 순종이 유일하다.
3. 친청정책
대원군의 실각 후 민씨 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움직여 근대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고 일련의 개화시책을 승인했다.
1882년 민씨 정부의 정책에 불평을 품어온 위정척사파와 대원군세력이 봉량미 문제로 폭동을 일으킨 구 군인을 업고 쿠데타를 감행하자, 민비는 재빨리 구 군인의 세력궁중을 탈출하여 충주목 민응식의 집에 피신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민비는 친청사대로 흐르게 되어 개화파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4. 외교정책
이때부터 그녀는 외교에 눈을 뜨고 매우 민첩한 외교 능력을 발휘하였다. 1885년 거문도 사건이 일어나자 묄렌도르프를 일본에 파견하여 영국과 사태 수습을 협상하는 한편 러시아와도 접촉하였고, 또한 청나라와의 관계에서도 흥선대원군의 환국을 묵인하는 등 유연성 있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5. 친러 정책과 을미사변
1894년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한 농민 봉기가 일어나 조선의 정국이 혼미 상태가 되었을 때, 조선에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던 일본은 갑오경장에 간여하면서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그녀의 세력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일본의 야심을 간파하고 친러 정책을 쓰면서 노골적으로 일본에 대항하였다.
이때는 이미 영국, 독일, 러시아 등의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국제적 지위가 실추된 상황이었기에 그녀의 친러 정책은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이에 일본공사 미우라는 조선에서 밀려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일부 친일 정객과 짜고 민씨를 포함한 친러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을미사변을 일으켜 그녀를 시해하는데, 1895년 일본 군인과 정치 낭인들이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왕궁을 습격하고 민씨를 시해 한 뒤 정권을 탈취한 사건이 그것이다. 그리고 고종으로 하여금 민씨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전락시키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그 해 10월 10일 그녀는 신원되어 태원전에 빈전이 설치되고 국장에 의해 숙릉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1897년 명성황후로 추책되고, 11월 양주 천장산 아래에 이장되어 홍릉이라 하였고, 1919년 고종이 죽자 2월에 미금시로 다시 이장되었다. 그녀의 소생으로는 순종이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