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1. 전제
# 2. 침투
# 3. 발단
# 4. 의문 1
# 5. 나는 1
# 6. 박정달은 1
# 7. 나는 2
# 8. 박정달은 2
# 9. 의문 2 - 아톰이 필요한가? 철인 28호가 필요한가?
# 10. 나는 3
# 11, 박정달은 3
# 12. 의문 3 - 이외수는 알고 있으려나? 물론 그러겠지만 말이다.
# 13. 주위 사람
# 14. ‘어떤 놈들의 소설이건 한 사람의 인생만은 못하니까’
# 15. 칼의 반란 1 - 사회에 대한 무관심
# 16. 칼의 반란 2 - 한 쪽 눈이 백태인 가계 주인 (결말)
# 2. 침투
# 3. 발단
# 4. 의문 1
# 5. 나는 1
# 6. 박정달은 1
# 7. 나는 2
# 8. 박정달은 2
# 9. 의문 2 - 아톰이 필요한가? 철인 28호가 필요한가?
# 10. 나는 3
# 11, 박정달은 3
# 12. 의문 3 - 이외수는 알고 있으려나? 물론 그러겠지만 말이다.
# 13. 주위 사람
# 14. ‘어떤 놈들의 소설이건 한 사람의 인생만은 못하니까’
# 15. 칼의 반란 1 - 사회에 대한 무관심
# 16. 칼의 반란 2 - 한 쪽 눈이 백태인 가계 주인 (결말)
본문내용
깨닫는 듯한 그의 행동. 과연 이외수에게 글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하는 십원어치도 안되는 나의 동정.
# 16. 칼의 반란 2 - 한 쪽 눈이 백태인 가계 주인 (결말)
박정달은 칼에 호기심을 가지고, 칼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결국 만들지만, 허망하게 끝난다. 원래 숨막히는 그 틀에 의하면 글이란 건, 발단 - 전개 - 위기 - 화해 - 결론의 구조란 걸 안다. 그런데 나는 이 부분을 갈등이자, 결말, 혹은 작가 최고의 고난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내가 아무리 진실을 떠든다 해도, 상대가 귀머리라면 그건 진실이 아니게 된다. 글이란 표현하는 자와 수용하는 자가 함께 공존하고, 꼭 그것이 일치하리란 기대를 해서는 안된다. 언젠가는 나를 미치광이라고 발목을 잡다가도, 또 언젠가는 나를 천재라고 해주는 것이다. 비로 내가 일괄적인 목소리로 똑같은 내용을 말한다 해도 말이다. 박정달과 옆집 세계사 담당 퇴직 교사와 술 한 잔 하면서 진실을 이야기 한다. 보편적인 진실이 아닐 수 있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라고 본다. 그 이야기는 그 사람만의 세계이고, 그 구성원이 합의를 하고 동조를 한다면 그건 진실이 되는 것이다. 거기에 가계 주인이라는 제 3자가 끼어 들게 된다. 옆집 남자가 살해를 당하자, 마지막에 만난 박정달은 당연 용의자로 지목, 거기에 한 몫 하는 가계 주인. 박정달의 진실을 해명해줄 여건은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고문도 받고, 그 일이 끝난 후에도 딜레마에 시달리게 된다. 진짜 범인이 나타나기 전에는 말이다. 결국엔 자수를 하여, 박정달의 무죄가 입증 되긴 하지만, 그의 진실은 한 번 꺾였다. 그것도 자신이 그렇게나 애지중지 하던 칼로 인해 말이다.
이외수는 글을 쓰면서 수용자가 진실을 알아줄까에 대해 끝없이 고민했을 것이다. 표현과 수용의 경계선을 어디다 맞추고 자신은 어디에 더 충실해야하는지 늘 번민했을 것이다. 어쩌다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된 글들에게서 회유를 느꼈기도 했을테고, 또 그렇게 받아 들인 사람들에 대해서도 조금은 원망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글을 쓰고 있다. 그가 얻은 결론은, 혹은 내가 얻은 결론은 바로 이게 아닐까 한다.
‘칼의 모양이 변하더라도, 영혼이 담긴 칼은 부셔지지 않듯이
글의 기교로 인해, 의도가 가려지더라도, 진실은 통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에 많은 걸 걸고, 헤쳐나가는 힘든 모험.
그게 바로 칼의 반란은 아닐까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
# 16. 칼의 반란 2 - 한 쪽 눈이 백태인 가계 주인 (결말)
박정달은 칼에 호기심을 가지고, 칼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결국 만들지만, 허망하게 끝난다. 원래 숨막히는 그 틀에 의하면 글이란 건, 발단 - 전개 - 위기 - 화해 - 결론의 구조란 걸 안다. 그런데 나는 이 부분을 갈등이자, 결말, 혹은 작가 최고의 고난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내가 아무리 진실을 떠든다 해도, 상대가 귀머리라면 그건 진실이 아니게 된다. 글이란 표현하는 자와 수용하는 자가 함께 공존하고, 꼭 그것이 일치하리란 기대를 해서는 안된다. 언젠가는 나를 미치광이라고 발목을 잡다가도, 또 언젠가는 나를 천재라고 해주는 것이다. 비로 내가 일괄적인 목소리로 똑같은 내용을 말한다 해도 말이다. 박정달과 옆집 세계사 담당 퇴직 교사와 술 한 잔 하면서 진실을 이야기 한다. 보편적인 진실이 아닐 수 있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라고 본다. 그 이야기는 그 사람만의 세계이고, 그 구성원이 합의를 하고 동조를 한다면 그건 진실이 되는 것이다. 거기에 가계 주인이라는 제 3자가 끼어 들게 된다. 옆집 남자가 살해를 당하자, 마지막에 만난 박정달은 당연 용의자로 지목, 거기에 한 몫 하는 가계 주인. 박정달의 진실을 해명해줄 여건은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고문도 받고, 그 일이 끝난 후에도 딜레마에 시달리게 된다. 진짜 범인이 나타나기 전에는 말이다. 결국엔 자수를 하여, 박정달의 무죄가 입증 되긴 하지만, 그의 진실은 한 번 꺾였다. 그것도 자신이 그렇게나 애지중지 하던 칼로 인해 말이다.
이외수는 글을 쓰면서 수용자가 진실을 알아줄까에 대해 끝없이 고민했을 것이다. 표현과 수용의 경계선을 어디다 맞추고 자신은 어디에 더 충실해야하는지 늘 번민했을 것이다. 어쩌다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된 글들에게서 회유를 느꼈기도 했을테고, 또 그렇게 받아 들인 사람들에 대해서도 조금은 원망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글을 쓰고 있다. 그가 얻은 결론은, 혹은 내가 얻은 결론은 바로 이게 아닐까 한다.
‘칼의 모양이 변하더라도, 영혼이 담긴 칼은 부셔지지 않듯이
글의 기교로 인해, 의도가 가려지더라도, 진실은 통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에 많은 걸 걸고, 헤쳐나가는 힘든 모험.
그게 바로 칼의 반란은 아닐까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