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목차 >
머리말
1. 1789~1830 마리안느의 탄생
2. 1830~1848 마리안느의 일시적인 퇴보
3. 1848년 마리안느의 복귀
4. 1849~1870 마리안느의 자리매김
5. 1870년~1875년 마리안느와 꼬뮌
6. 1876~80 마리안느의 두 얼굴
맺음말
머리말
1. 1789~1830 마리안느의 탄생
2. 1830~1848 마리안느의 일시적인 퇴보
3. 1848년 마리안느의 복귀
4. 1849~1870 마리안느의 자리매김
5. 1870년~1875년 마리안느와 꼬뮌
6. 1876~80 마리안느의 두 얼굴
맺음말
본문내용
물로 표현하는 것이 사실상 저지된 상태였고, 다른 해석판을 조각으로 표현하려는 열의도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1875년이 되자 정부는 정치적 성격을 지닌 초상은 우표에도 담을 수 없다는 규정을 발표하게 되었고, 국민의회가 5년 동안 자유의 초상을 우표로 사용한 반면에, 정치성이 배제된 우표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것에서 우리는 상징의 역사가 일정한 시간차를 두고 정치사를 따라간다는 점을 알 수 있다.
1871년 의회는 헌법이 통과된 후 해산하게 되었고 1876년에 실시된 보통선거는 과반수 이상의 의회 의석을 공화국에 부여하였다. 공화파는 승리하였고, 그에 따라 그 상징의 스타일과 장식이 바뀌게 되었다.
6. 1876~80 마리안느의 두 얼굴
1876년에 탄생한 공화국은 제 3공화국 창시자 동부, 남동부 지역의 공화파로 금융가, 철강 사업가 등 부르주아
들이 내세우는 공화국과 기존의 공화주의자들이 내세우는 공화국의 의미가 달랐다. 공화국 창시자들은 급진적 공화주의를 주장하면 반혁명세력의 반동이 있을 것을 우려해 보수적 공화주의를 주장했고 1848년의 공화국과 유사한 마리안느를 사용하여 온건파로 불리어진다. 반면 후자는 급진파로 불리어 진다.
온건파이냐 급진파이냐는 흉상의 모양으로 알 수 있다. 1880년, 프랑스 공화국을 흉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시도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다섯 사례가 알려져 있는데,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프리지아 모자를 쓰고 있는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쓰고 있지 않은 것이다. 1880년대의 정부에서는 후자의 것을 사용했다. 반면 지방의 프리메이슨 세계 최대 국제적 우애비밀결사. 1717년 런던에 이미 존재하던 4개의 로지(중세석공길드)가 결합해 <잉글랜드 대로지(Grands Lodge of England)>를 설립한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27년에 전 잉글랜드의 로지를 포괄하는 것으로 발전하고, 스코틀랜드에서 대로지가 형성되었으며, 유럽대륙뿐 아니라 미국까지 파급되었다. 프리메이슨의 구호는 자유·평등·박애였고, 프랑스혁명에서 이 구호가 혁명이념으로 이용되었다.
단체에서는 프리지아 모자를 쓰고 있는 전자의 것을 사용했다.
공화국이 안정되어 가면서 공화국을 지지하는 여론은, 정치가들보다 급진적이며 표현적이었다. 그들은 프리지아 모자를 갖춘 공화국 초상을 곳곳에 놓으려 하였다. 이는 남부 프로방스 지방의 공화주의 서클의 회원카드, 흉상 등에서 프리지아 모자를 쓴 여성이 나타났다. 비단 남부뿐만 아니라 파리와 지중해 연안지역에 거점을 확보하고 있는 급진파가 존재했었다.
1877년 5.16 쿠데타의 성공으로 공화파 하원 의원들은 보수 왕당파다수의 상원과 대통령 마크 마옹(왕당파)과 공존하는 상황이 되었다. 승리를 거둔 공화국을 축하하기 위해 정부는 1878년에 새로운 사업을 벌였다. 하나는 에투알 광장의 개선문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너무 호전적이라는 이유로 거부되었고 대신 조각상을 제작하게 되었다. 이 조각상은 모자를 쓰고 있긴 있었으나 전형적인 프리지아 모자의 곡선은 아니었다. 다른 하나는 1878년에 열리는 만국박람회의 박람회장정문에 공화국 조각상을 세우는 것으로 이 조각상은 머리에 월계관과 더불어 형태가 불분명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가 내세우는 온건적 공화국의 상징은 파리의 급진론자들에게 국가 창고에 있는 대리석으로 만든 공화국상(수아투의 작품)을 전시하자는 의견과 파리 시의 기호에 맞는 ‘공화국’(조각상)을 세우자는 의견까지 나오게 했다. 조각상을 전시하자는 의견은 성공했으나 파리 시의 기호에 맞는 공화국을 새우자는 의견은 성립되기 힘들었다. 그러나 4년 후 파리는 두 개의 ‘공화국’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는 콩티강변 도로위의 학사원 앞에 있는 것으로 온건한 수아투의 공화국이고 다른 하나는 레퓌블리크 광장에 세워진 절도 있는 투박한 모습과 머리에 프리지아 모자로 인해 민중적 성격을 띤 모리스 형제의 공화국이었다.
공화국이 자신들만의 초상을 펼쳐 보이면서 서로 뚜렷이 구별되고 경쟁적이기도 한 두 개의 해석을 펼치는 것은 1880년경에 와서는 모두가 인정하게 되었다. 폴 마르모탕은 「‘공화국’은 “견해의 차이에 따라 이삭이나 프리지아 모자로 머리를 장식하는”여성이라고 하고 두 개로 표현했다. 하나는 아테네 식으로 세련되고 곱게 장식하여 학자들 가까이에 자리한 수아투식 공화국이 여기에 포함된다. 다른 하나는 스파르타식으로 얼굴과 의상이 투박하며 노동자들 가까이에 자리한 모리스의 공화국이다.」라고 했다.
공화국의 초상은 그것을 표현하는 사람들의 문화에 따라 다양하고 다른 용어로 표현되는데 여기서는 세 가지 주요한 흐름을 식별해 낼 수 있다.
첫째, 민중 출신의 공화주의자는 만일 그가 진보적이고 급진적이며, 남부출신이라면 마리안느 라는 이름을 사용할 것이다. 둘째, 부르주아 또는 교양 있는 공화주의자의 경우에는 반대로 이러한 친숙하고 방언에 가까운 이름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공화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셋째, 반동파는 매춘부와 같은 모욕적인 용어 대신에 마리안느라는 이름을 사용해 마리안느를 비하했다. 이 시점에 이르러 마리안느는 소박하고 숭배적 의미보다 경멸적이고 적대적인 의미로 더 주목을 끌고 있었다. 이상이 1880년경의 상황이다.
맺음말
이상으로 1789~1880년까지의 마리안느 변화 모습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 변화 모습은 3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제 제 1공화국(1789~1848) 시기의 마리안느는 숭배에서 경멸의 대상에 이르기 까지 그 탄생에서부터 순탄치 않은 여정을 지니고 있었다. 둘째, 제 2 공화국(1848~1870) 시기의 마리안느는 많은 대중들에게 유명세를 타지만 온건한 체제와 급진적 체제의 사이에서 분화가 된다. 셋째, 제 3공화국(1870~1940)시기의 초반은 프리지아 모자를 쓰지 않은 마리안느가 주를 이룬다.
즉, 마리안느는 공화국의 의미에 대해 계속된 논쟁만큼이나 많은 변종을 낳기도 하여 일반적 인정을 받기에 이른다.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1789년을 현재의 기점으로 삼고 있는 프랑스에서 마리안느의 역사는 곧 프랑스의 현대사이기도 하다.
1871년 의회는 헌법이 통과된 후 해산하게 되었고 1876년에 실시된 보통선거는 과반수 이상의 의회 의석을 공화국에 부여하였다. 공화파는 승리하였고, 그에 따라 그 상징의 스타일과 장식이 바뀌게 되었다.
6. 1876~80 마리안느의 두 얼굴
1876년에 탄생한 공화국은 제 3공화국 창시자 동부, 남동부 지역의 공화파로 금융가, 철강 사업가 등 부르주아
들이 내세우는 공화국과 기존의 공화주의자들이 내세우는 공화국의 의미가 달랐다. 공화국 창시자들은 급진적 공화주의를 주장하면 반혁명세력의 반동이 있을 것을 우려해 보수적 공화주의를 주장했고 1848년의 공화국과 유사한 마리안느를 사용하여 온건파로 불리어진다. 반면 후자는 급진파로 불리어 진다.
온건파이냐 급진파이냐는 흉상의 모양으로 알 수 있다. 1880년, 프랑스 공화국을 흉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시도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다섯 사례가 알려져 있는데,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프리지아 모자를 쓰고 있는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쓰고 있지 않은 것이다. 1880년대의 정부에서는 후자의 것을 사용했다. 반면 지방의 프리메이슨 세계 최대 국제적 우애비밀결사. 1717년 런던에 이미 존재하던 4개의 로지(중세석공길드)가 결합해 <잉글랜드 대로지(Grands Lodge of England)>를 설립한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27년에 전 잉글랜드의 로지를 포괄하는 것으로 발전하고, 스코틀랜드에서 대로지가 형성되었으며, 유럽대륙뿐 아니라 미국까지 파급되었다. 프리메이슨의 구호는 자유·평등·박애였고, 프랑스혁명에서 이 구호가 혁명이념으로 이용되었다.
단체에서는 프리지아 모자를 쓰고 있는 전자의 것을 사용했다.
공화국이 안정되어 가면서 공화국을 지지하는 여론은, 정치가들보다 급진적이며 표현적이었다. 그들은 프리지아 모자를 갖춘 공화국 초상을 곳곳에 놓으려 하였다. 이는 남부 프로방스 지방의 공화주의 서클의 회원카드, 흉상 등에서 프리지아 모자를 쓴 여성이 나타났다. 비단 남부뿐만 아니라 파리와 지중해 연안지역에 거점을 확보하고 있는 급진파가 존재했었다.
1877년 5.16 쿠데타의 성공으로 공화파 하원 의원들은 보수 왕당파다수의 상원과 대통령 마크 마옹(왕당파)과 공존하는 상황이 되었다. 승리를 거둔 공화국을 축하하기 위해 정부는 1878년에 새로운 사업을 벌였다. 하나는 에투알 광장의 개선문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너무 호전적이라는 이유로 거부되었고 대신 조각상을 제작하게 되었다. 이 조각상은 모자를 쓰고 있긴 있었으나 전형적인 프리지아 모자의 곡선은 아니었다. 다른 하나는 1878년에 열리는 만국박람회의 박람회장정문에 공화국 조각상을 세우는 것으로 이 조각상은 머리에 월계관과 더불어 형태가 불분명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가 내세우는 온건적 공화국의 상징은 파리의 급진론자들에게 국가 창고에 있는 대리석으로 만든 공화국상(수아투의 작품)을 전시하자는 의견과 파리 시의 기호에 맞는 ‘공화국’(조각상)을 세우자는 의견까지 나오게 했다. 조각상을 전시하자는 의견은 성공했으나 파리 시의 기호에 맞는 공화국을 새우자는 의견은 성립되기 힘들었다. 그러나 4년 후 파리는 두 개의 ‘공화국’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는 콩티강변 도로위의 학사원 앞에 있는 것으로 온건한 수아투의 공화국이고 다른 하나는 레퓌블리크 광장에 세워진 절도 있는 투박한 모습과 머리에 프리지아 모자로 인해 민중적 성격을 띤 모리스 형제의 공화국이었다.
공화국이 자신들만의 초상을 펼쳐 보이면서 서로 뚜렷이 구별되고 경쟁적이기도 한 두 개의 해석을 펼치는 것은 1880년경에 와서는 모두가 인정하게 되었다. 폴 마르모탕은 「‘공화국’은 “견해의 차이에 따라 이삭이나 프리지아 모자로 머리를 장식하는”여성이라고 하고 두 개로 표현했다. 하나는 아테네 식으로 세련되고 곱게 장식하여 학자들 가까이에 자리한 수아투식 공화국이 여기에 포함된다. 다른 하나는 스파르타식으로 얼굴과 의상이 투박하며 노동자들 가까이에 자리한 모리스의 공화국이다.」라고 했다.
공화국의 초상은 그것을 표현하는 사람들의 문화에 따라 다양하고 다른 용어로 표현되는데 여기서는 세 가지 주요한 흐름을 식별해 낼 수 있다.
첫째, 민중 출신의 공화주의자는 만일 그가 진보적이고 급진적이며, 남부출신이라면 마리안느 라는 이름을 사용할 것이다. 둘째, 부르주아 또는 교양 있는 공화주의자의 경우에는 반대로 이러한 친숙하고 방언에 가까운 이름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공화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셋째, 반동파는 매춘부와 같은 모욕적인 용어 대신에 마리안느라는 이름을 사용해 마리안느를 비하했다. 이 시점에 이르러 마리안느는 소박하고 숭배적 의미보다 경멸적이고 적대적인 의미로 더 주목을 끌고 있었다. 이상이 1880년경의 상황이다.
맺음말
이상으로 1789~1880년까지의 마리안느 변화 모습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 변화 모습은 3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제 제 1공화국(1789~1848) 시기의 마리안느는 숭배에서 경멸의 대상에 이르기 까지 그 탄생에서부터 순탄치 않은 여정을 지니고 있었다. 둘째, 제 2 공화국(1848~1870) 시기의 마리안느는 많은 대중들에게 유명세를 타지만 온건한 체제와 급진적 체제의 사이에서 분화가 된다. 셋째, 제 3공화국(1870~1940)시기의 초반은 프리지아 모자를 쓰지 않은 마리안느가 주를 이룬다.
즉, 마리안느는 공화국의 의미에 대해 계속된 논쟁만큼이나 많은 변종을 낳기도 하여 일반적 인정을 받기에 이른다.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1789년을 현재의 기점으로 삼고 있는 프랑스에서 마리안느의 역사는 곧 프랑스의 현대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