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체제정비
1) 체제정비의 배경
2) 소수림왕대의 체제정비
(1) 불교의 도입과 태학의 설립
(2) 율령반포의 의의
3) 4세기말 이후의 체제정비
2. 영토확장
1) 요동방면
2) 백제방면
3) 신라방면
4) 기타지역
3. 5~6세기의 대외관계
4. 후기의 정세변동
1) 한강유역의 상실
2) 왕권의 쇠퇴와 귀족연립정권의 성립
1) 체제정비의 배경
2) 소수림왕대의 체제정비
(1) 불교의 도입과 태학의 설립
(2) 율령반포의 의의
3) 4세기말 이후의 체제정비
2. 영토확장
1) 요동방면
2) 백제방면
3) 신라방면
4) 기타지역
3. 5~6세기의 대외관계
4. 후기의 정세변동
1) 한강유역의 상실
2) 왕권의 쇠퇴와 귀족연립정권의 성립
본문내용
려 대외정책의 방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중국의 통일세력인 隨唐의 등장과 고구려 침공이라는 국제정세의 변동은 고구려의 이러한 의도를 끝내 좌절시켰다.
2) 왕권의 쇠퇴와 귀족연립정권의 성립
6세기 중엽부터 정쟁이 잇따라 일어남으로써 왕권이 약화되고 그 대신 귀족들이 정치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귀족연립정권이 성립하게 되었다.
4세기이래 那部체제의 해체와 중앙집권체제의 정비과정을 통하여 왕권은 크게 신장되었다. 그리고 나부체제가 해체되면서 제가 세력은 중앙귀족관료로 전환되었다. 왕권은 관등관직제의 정비를 통하여 왕도로 결집한 중앙귀족을 왕권 아래의 관료체계내로 편재해 갔고,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전제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장수왕대의 평양천도는 전제적 왕권의 성장과 정치세력 재편성의 일대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천도를 계기로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던 장수왕은 귀족세력에 대한 숙청과 더불어 평양지역에 기반을 둔 정치세력을 대거 기용하여 왕권의 지지기반으로 삼았다. 당시 새로 등장한 신진귀족으로서는 평양일대의 호족세력을 우선 염두에 둘 수 있다. 하지만 장수왕의 왕권강화책은 근본적인 집권체제의 정비를 통한 왕권 기반의 강화 방향보다는 선진귀족의 등용과 이를 통한 구귀족세력의 견제라는 측면에 보다 주력한 듯하다. 따라서 왕권이 귀족세력을 적절히 통제조절 능력을 갖고 있을 경우에는 전제적 지위를 잃지 않았지만, 안장왕안원왕대에 걸친 거듭된 왕의 시해와 왕위계승전을 겪는 과정에서 귀족세력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면서 왕권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전제적 권력을 행사하던 왕권이 6세기에 들어 약화되는 또 다른 배경으로는 대외정복활동의 침체를 들 수 있다. 광개토왕장수왕대의 대외정복활동에서의 성공은 왕권의 강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계속되는 外征은 고구려사회내에 긴장감을 높여 왕을 중심으로 지배층을 결속시키게 하였으며, 군사력도 왕권 아래로 집중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 전쟁의 전리품들을 왕권강화의 기반으로 삼거나, 성과물의 분배를 통하여 귀족세력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제동맹으로 인해 남진정책에 대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또 안장왕대에는 대외전쟁이 급격히 줄었다. 이와 같이 장기간에 걸쳐 대외 정복활동이 침체된 원인은 잘 알 수 없으나, 그 결과 왕의 권위와 위상에 상당한 손상을 주어 왕권의 약화를 초래하였을 것은 충분히 예상해 볼 수 있다.
전제적 왕권이 쇠퇴하고 귀족간의 갈등이 거듭된 상황에서 귀족연립정권은 성립되었다. 귀족연립정권의 정치운영체제에 있어서 가장 특징적인 변화는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의 관인 大對盧의 선임과 집권적 관직으로서의 莫離支의 등장이다. 대대로와 막리지는 정국운영의 중심체로서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하는 귀족회의체를 구성하며, 대대로는 이 귀족회의체 의장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따라서 후기 귀족연립정권의 권력구조는 대대로-막리지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
영양왕대의 對隨전쟁에서 승리는 왕권강화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계속되는 수의 침공은 왕실을 중심으로 한 국가적 통합력을 높이고, 이에 따라 왕의 권위도 강화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보다 안정된 기반을 다시 확립하려고 시도하면서, 왕권 및 각 귀족집단간의 정치적 이해관계는 보다 복잡하게 얽히면서 전개되었다. 그리고 대대로의 선임을 통한 귀족연립정권의 운영도 점차 그 기능에 한계가 나타났다. 귀족세력 중의 淵蓋蘇文가문은 여러 대에 걸쳐 막리지의 지위를 차지하면서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당대의 여러 귀족가문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강하였다. 따라서 실력에 의해 대대로를 차지하는 정치운영 구조에서 연개소문가문의 독주 가능성이 커졌다. 귀족간의 합의를 통한 귀족연립체제에서 한 가문의 독주는 귀족들 전체의 이익에 큰 위협이 되었다. 양자간의 권력 다툼은 연개소문의 정변으로 이어졌고, 정권을 잡은 연개소문은 사적 권력기반의 강화에 주력하였다.
대대로-막리지 중심의 정치운영체제는 불안정한 면도 적지 않았지만, 당시 귀족집단간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분산적인 귀족세력을 어느 정도 통합할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연개소문의 집권과 사적 권력의 강화는 이러한 정치운영체제를 부정하는 것으로, 귀족간의 이해관계를 조절할 수 있는 통로를 상실함으로서 귀족세력 사이의 모순은 더욱 심화되고, 거듭되는 대외적 위기 속에서 끝내 귀족세력의 분열과 이탈을 초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참고 문헌》
『한국사 5』, 국사편찬위원회, 1996
그러나 중국의 통일세력인 隨唐의 등장과 고구려 침공이라는 국제정세의 변동은 고구려의 이러한 의도를 끝내 좌절시켰다.
2) 왕권의 쇠퇴와 귀족연립정권의 성립
6세기 중엽부터 정쟁이 잇따라 일어남으로써 왕권이 약화되고 그 대신 귀족들이 정치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귀족연립정권이 성립하게 되었다.
4세기이래 那部체제의 해체와 중앙집권체제의 정비과정을 통하여 왕권은 크게 신장되었다. 그리고 나부체제가 해체되면서 제가 세력은 중앙귀족관료로 전환되었다. 왕권은 관등관직제의 정비를 통하여 왕도로 결집한 중앙귀족을 왕권 아래의 관료체계내로 편재해 갔고,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전제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장수왕대의 평양천도는 전제적 왕권의 성장과 정치세력 재편성의 일대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천도를 계기로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던 장수왕은 귀족세력에 대한 숙청과 더불어 평양지역에 기반을 둔 정치세력을 대거 기용하여 왕권의 지지기반으로 삼았다. 당시 새로 등장한 신진귀족으로서는 평양일대의 호족세력을 우선 염두에 둘 수 있다. 하지만 장수왕의 왕권강화책은 근본적인 집권체제의 정비를 통한 왕권 기반의 강화 방향보다는 선진귀족의 등용과 이를 통한 구귀족세력의 견제라는 측면에 보다 주력한 듯하다. 따라서 왕권이 귀족세력을 적절히 통제조절 능력을 갖고 있을 경우에는 전제적 지위를 잃지 않았지만, 안장왕안원왕대에 걸친 거듭된 왕의 시해와 왕위계승전을 겪는 과정에서 귀족세력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면서 왕권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전제적 권력을 행사하던 왕권이 6세기에 들어 약화되는 또 다른 배경으로는 대외정복활동의 침체를 들 수 있다. 광개토왕장수왕대의 대외정복활동에서의 성공은 왕권의 강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계속되는 外征은 고구려사회내에 긴장감을 높여 왕을 중심으로 지배층을 결속시키게 하였으며, 군사력도 왕권 아래로 집중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 전쟁의 전리품들을 왕권강화의 기반으로 삼거나, 성과물의 분배를 통하여 귀족세력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제동맹으로 인해 남진정책에 대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또 안장왕대에는 대외전쟁이 급격히 줄었다. 이와 같이 장기간에 걸쳐 대외 정복활동이 침체된 원인은 잘 알 수 없으나, 그 결과 왕의 권위와 위상에 상당한 손상을 주어 왕권의 약화를 초래하였을 것은 충분히 예상해 볼 수 있다.
전제적 왕권이 쇠퇴하고 귀족간의 갈등이 거듭된 상황에서 귀족연립정권은 성립되었다. 귀족연립정권의 정치운영체제에 있어서 가장 특징적인 변화는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의 관인 大對盧의 선임과 집권적 관직으로서의 莫離支의 등장이다. 대대로와 막리지는 정국운영의 중심체로서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하는 귀족회의체를 구성하며, 대대로는 이 귀족회의체 의장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따라서 후기 귀족연립정권의 권력구조는 대대로-막리지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
영양왕대의 對隨전쟁에서 승리는 왕권강화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계속되는 수의 침공은 왕실을 중심으로 한 국가적 통합력을 높이고, 이에 따라 왕의 권위도 강화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보다 안정된 기반을 다시 확립하려고 시도하면서, 왕권 및 각 귀족집단간의 정치적 이해관계는 보다 복잡하게 얽히면서 전개되었다. 그리고 대대로의 선임을 통한 귀족연립정권의 운영도 점차 그 기능에 한계가 나타났다. 귀족세력 중의 淵蓋蘇文가문은 여러 대에 걸쳐 막리지의 지위를 차지하면서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당대의 여러 귀족가문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강하였다. 따라서 실력에 의해 대대로를 차지하는 정치운영 구조에서 연개소문가문의 독주 가능성이 커졌다. 귀족간의 합의를 통한 귀족연립체제에서 한 가문의 독주는 귀족들 전체의 이익에 큰 위협이 되었다. 양자간의 권력 다툼은 연개소문의 정변으로 이어졌고, 정권을 잡은 연개소문은 사적 권력기반의 강화에 주력하였다.
대대로-막리지 중심의 정치운영체제는 불안정한 면도 적지 않았지만, 당시 귀족집단간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분산적인 귀족세력을 어느 정도 통합할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연개소문의 집권과 사적 권력의 강화는 이러한 정치운영체제를 부정하는 것으로, 귀족간의 이해관계를 조절할 수 있는 통로를 상실함으로서 귀족세력 사이의 모순은 더욱 심화되고, 거듭되는 대외적 위기 속에서 끝내 귀족세력의 분열과 이탈을 초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참고 문헌》
『한국사 5』, 국사편찬위원회,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