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여지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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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대동여지도는 준비된 지도였다!
-대동여지도와 관련된 지도들과 이전 제작 방법과의 비교분석
1)대동여지도의 대략적 계보도.
2)청구도와 동여도, 대동여지도의 비교
3)그 외에 대동여지도와 관계 깊은 고지도
4)실학시대로부터의 영향

2.대동여지도의 지도학적인 특색

3.대동여지도의 특징적인 내용과 표현 방식
1)지도유설 및 각종 부록의 존재
2)산맥도에 나타난 특징적 내용과 표현 방식
3)하계도
4)도로도
5)대동여지도에 나타난 역사지리학적 내용

4.대동여지도의 가치와 의의

5.종합 결론

본문내용

것이다. 이러한 교리는 방위사업의 구체적 지향점을 제시하였으며, 성곽의 군사적 중요성을 높게 평가하도록 유인하였다. 또한 민보론은 양란을 극복하고 서서히 발전해나가는 조선후기의 향촌 사회에서 등장한 自戰自守論이라고 할 수 있다. 민보론은 형식적인 운영과 많은 폐단으로 말미암아 군사적 기능을 기대하기 어려운 속오군 체제의 지방군을 대체하기 위해 등장하였다. 즉, 향촌단위로 자생적인 방위조직을 결성하고 이를 향촌에서 관리하면서 전시 또는 변란시에는 관군을 지원하거나 자체적으로 전투에 돌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의가 등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民堡는 결국 의거할 수 있는 城堡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민보론 주창자들의 입장이었다. 대표적으로 정약용이나 신헌과 같은 실학자나 무신들을 중심으로 현대의 민방위향토예비군과 유사한 조직이 모색되었다.
정약용은 「民堡議」에서 민보의 축조에 대해 자세히 논의하고 있지만, 실제로 민보와 같은 자치적인 방위조직이 정부의 유인 없이 쉽게 성립되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웠고, 사사로이 鎭堡를 축성하는 것도 바라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위난시에 향촌 공동체를 방위하기 위한 자치적 방위책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차선책으로 민보를 구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비상시에 안거할 수 있는 험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던 것이다. 평지의 읍성 등 행정중심지를 백업해주기 위해서 축조된 산성 대표적인 예가 북한산성이다.
이나, 현 제도 하에서는 활용되지 않지만 충분히 의지할 수 있는 옛날 산성들이 주목받게 된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대동여지도를 살펴보면, 전주는 읍치(城)를 갖추고 있지 못하지만, 인근에 南固鎭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도상으로는 성곽을 갖추지 않은 것처럼 표기되어 있지만, 실제로 남고진은 남고산성이라고 불릴 정도로 잘 갖춰진 산성이며, 축조연대 역시 1810년으로 비교적 근대의 성곽이다. 물론 남고진 자체는 비교적 사적으로는 오래된 것이나, 그 성곽의 축조는 1700년대에 시도되었으나 무위로 끝나고, 이후 1810년에 이르러서 축조가 개시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남고는 古鎭堡도 古城도 아니라 남고진으로 표기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무엇을 근거로 城과 古城을 구분했으며, 이러한 방어시설을 통하여 이룩하고자 했던 군사적 사상 내지는 교리가 무엇인지를 추측할 수 있다. 또한 대동여지도 상에서는 읍치를 갖추지 못한 경우 주위에 되도록 산성을 표기하였다는 점도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4.대동여지도의 가치와 의의
1) 당시 시대 요구에 부응한 실용적인 지도이다.
① 군사적인 필요와 상업적 필요에 의해지도상에 지도표에는 군사적 목적이 강한 표시들 이 많으며, 중요 도읍의 위치와 도로망의 리수, 령이나 도진과 같이 수송과 여행 에 필요한 정보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② 고지도와 근대적 지도의 교량적인 역할이자 과도기적 모습을 잘 보여줌
③ 풍수사상과 경위도선,축적등을 반영, 즉 고지도의 지지적 성격과 현대지도의 경향인 순수지도의 결합체로서 나타남
2) 풍수도적인 경향을 계승 발전
① 산맥표현에 있어 기존의 연총식,괴총식(관읍의 진산만을 나타냄),연총식표현이 아닌 인체의 대동맥에서 분화된 듯한 실핏줄같은 산맥과 하천 표현은 산령의 소재식별이라 든 가 물줄기의 연원들이 분명하게 표시되어 행정구역의 경계는 물론 그 자체로서 시 각적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 이러한 지도상의 그림표현 방식이 풍수지리와 밀접한 관련된 것으로 추정
고지도와 같은 산맥표현(정맥,산경..)은
→ 개인의 사상이 아닌 역사성과 시대성의 표현,즉, 풍수사상에 근거한 지리관이 곧 우리의 역사관의 일부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② 아마도 잦은 전란과 왜양선의 출몰등의 불안한 시국상황에서 마음 놓고 살수 있는 명 당적인 가거지을 제시하고 풍수지리를 주요시하는 전통의 민족의식을 반영한 시 대적인 정신을 잘 묘사함
3) 지지와 실학적 지리학의 결합
① 전국지도, 도별지도와 군현지도를 합하여 일목요연한 대축적 지도로 만듬
② 조선후기 대축적 지도의 발달은 지도작업의 발달과 성과를 설명; 크기에 상응하는 정 확함과 풍부함을 수반해야하기 때문이다.
4) 목판인쇄본과 분첩절첩식으로의 보급과 자세한 수정작업
→ 고산자가 대중화의 길을 모색한 단면을 보여준다.
5) 그 당시 외국과의 활발한 문화적 교류를 추정
; 당시는 중국이 외국과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으므로, 아마도 이러한 시대적 조 류에서 우리도 그러한 서양의 문물과 기술등이 (직접적은 아니라도)적어도 중국을 통해 활발히 수용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 예컨대, 특히 경위도에 관한 개념이나 위도 1도가 200리라고 당연시하는 것, 나아 가 이전에 미리 국내에 소개된 세계 전도등에서 지구가 구형체 모양을 하고 있었 음은 이를 잘 반증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최한기와 김정호가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구전후도’를 보아도 충분히 어림 짐작 가능
5.종합 결론
1) 지도는 한 시대의 문화과학이라는 것을 대동여지도가 잘 설명
→그림이면서 과학적이어야 하고 내용이 시대상황과정신을 잘 반영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 을 의미
2) 비록 현대지도와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그 당시 시대정신과 역사정신의 맥락에 서 이해해야한다
→ 예컨대 풍수 중심적 사상을 단순히 현대적 관점에서 비과학적이고 미신으로 치부 할 것이 아니라 앞서 언급한 대로 불안한 시대상황의 안락처 제시와 그 당시 높았던 문 화 수준, 그리고 무엇보다도 풍수사상이 과거인들에게 중요시되었던 점을 잘 살펴 현대 에서 재구성할 필요가 의무로서 제시된다.
*목 차
1.대동여지도는 준비된 지도였다!
-대동여지도와 관련된 지도들과 이전 제작 방법과의 비교분석
1)대동여지도의 대략적 계보도.
2)청구도와 동여도, 대동여지도의 비교
3)그 외에 대동여지도와 관계 깊은 고지도
4)실학시대로부터의 영향
2.대동여지도의 지도학적인 특색
3.대동여지도의 특징적인 내용과 표현 방식
1)지도유설 및 각종 부록의 존재
2)산맥도에 나타난 특징적 내용과 표현 방식
3)하계도
4)도로도
5)대동여지도에 나타난 역사지리학적 내용
4.대동여지도의 가치와 의의
5.종합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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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4.22
  • 저작시기20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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