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4. 그리고 대 승리자들은...
5. 경청
6. 고정관념으로 판단을 흐리지 말라
5. 경청
6. 고정관념으로 판단을 흐리지 말라
본문내용
, 눈초리가 험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전화를 통해 위조 주식을 파는 가장 유용한 기술을 찾아보라 그리고 놀랄만하게 확신과 영감을 주는 전화가 “매력있는 성격”임을 발견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이탈리아인이나 스웨덴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안다고 생각하지만, 네바라스카 학생들을 대상으로 얼굴을 보고 15개국의 유럽인의 국적을 맞춰보라고 하자, 그 중 93퍼센트가 잘못 맞췄다. 또한 지금은 뿔테가 지성인의 표준으로 텔레비전에 등장하지만, 안경사는 안경을 쓰는 것은 단지 시력이 나쁘기 때문일 뿐이라고 말한다.
고정관념이란 직접 만나서 대면하기 전에 사람들을 먼저 판단해버리도록 만드는 것으로, 전세계로 돌아다니는 수다와 같은 것이다. 편견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생각해보라, 편견이란 먼저 판단하는 것이다. 편견의 핵심은 야만적인 고정관념이다.
고정관념이 비이성적이고 상처를 주는 형식을 띠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어느 정도 사람들에게 적절한 배역을 정하기 시작한다. TV에서 서부극을 관람하는 자녀를 둔 부모들도 알고 있듯이,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을 배운다. 몇 년 전에 한 사회심리학자는 어린 시절에 형성된 고정관념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그는 가장 인기있는 초등학생 몇 명에게 아침 체조시간에 실수를 하라고 몰래 부탁을 했다. 나중에 선생님은 체조시간 중에 실수를 한 사람이 있었는지 학생들에게 물었다. 그런데 지목된 학생은 평소 왕따를 당하는 학생 “나쁜녀석”으로 실제 실수를 한 학생이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 내부에 형성된 어떤 표준을 가지고서 성장할 뿐만 아니라 어른으로서 우리는 그 표준을 끊임없이 내면화한다. 그 중에는 시어머니(장모)나, 시골뜨기, 혹은 정신과의사에 대한 진담 반, 농담 반 식의 고정관념도 있다, 이것은 우리가 듣고 반복하는 농담의 목록으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것이다. 사실 이런 고정관념이 없다면 농담도 많이 줄어들 것이다. 주위에서 접하는 광고, 영화와 책을 통해서 우리는 고정관념을 계속 유지해가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즉 윌리엄 제임스가 이 세계가 너무나 거대하고 터무니없이 복잡한 혼란 덩어리라고 한 때 묘사했던 바처럼 우리는 고도로 복잡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고정관념을 만들어가는 경향이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눈에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사실상 우리는 그것을 본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생 동안 맹인으로 살다가 시력을 회복한 사람들은 처음에 네모와 세모를 구분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공장의 방문객은 그 공장이 소음으로 가득한 혼란 덩어리라고 생각하지만, 공장 지배인은 모든 일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월터 립만이 말했듯이. “우리는 대부분 처음에는 보지 못하다가, 나중에 정의한다. 정의를 내리고 나서야 볼 수 있는 것이다.”
고정관념은 우리가 세상을 보기위해 세상의 정의를 내리는 방법 중 한가지이다. 고정관념은 인간의 무한한 다양성을 "종류"라는 편리한 작은 그룹으로 나누어 우리는 고정관념적인 생활에서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를 배울수 있게 한다. 각각의 모든 인간을 알기위해 무(無)에서부터 시작했다하면 삶은 정말 고단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고정관념은 무성한 어지러운 혼란스러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로 잘라 내어 덮어줌으로써 우리의 정신적인 낭비를 덜어준다. 그들은 우리가 세상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가는 "불편함"로부터 우리를 편하게 해준다 - 그들은 우리에게 세상의 익숙한 면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문제는 고정관념은 우리를 정신적으로 게으르게 한다는것이다. 의학의 권위자 S.I. Hayakawa는 “고정관념의 위험은 그것의 존재에 있는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는 가끔, 어떤 사람에게는 언제나 관찰의 대안이 된다는 점이다.”라고 썼다.
따라서 고정관념이 다른 것들에 미치는 부정당함은 제쳐주고서라도 그들은 우리들 자신을 피폐하게 한다. 세상을 간단한 분류의 집합으로 보는 어떤 사람은 모든 노동 지도자들을 폭력단원으로, 모든 사업가를 보수주의자로, 모든 하버드학생을 아는 체 하는 놈으로, 그리고 모든 프랑스 사람을 섹시한 사람으로 보는데 이것은 스스로가 하나의 고정관념이 될 위험에 처한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자격을 잃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해 세상을 그 자신의 절대적으로 유일하고, 흉내 낼 수 없으며, 독립적인 방식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피폐하기 때문에 고정관념은 제거되기 쉽지 않다. 우리가 교정한 세상은 B급 영화보다 나을 것이 없는데 우리는 최소한 우리에게 어떤 전형적인 인물특성이 기대되는지 알고 있다. 우리가 그들 자신을 위해 스스로를 이상하고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행동가도록 놔둘 때 우리 대부분이 좋아하는 신념들이 틀렸다고 판명될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갑자기 보이지 않는 진실을 위해 우리의 정형화된 그림을 바꾸지는 않는다. 사람의 생각은 재빠르게 오락가락하며 종종 한 가지 고정관념에서 다른 하나의 고정관념으로 대체된다. 바꾸는 과정의 진실은 우리 머리 속에 있는 그림들에다 부분과 진실의 조각들을 더하는 느린 것인데, 그것들이 서서히 인생 자체의 모호함(더러움)의 일부를 받아들일 때까지 계속된다.
우리가 그 과정을 따라 속도를 낼 수 있을까? 물론이다.
먼저 우리는 우리 머리 속의, 다른 사람들의 머리 속의, 우리들 주위 세상속의 정형화된 그림들을 인지하게 될 수 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증명되었다고 예외를 허용한 모든 판단을 의심할 수 있다. 광범위하고 지적인 과학의 사건보다 더 이상의 세련된 생각은 없는데, 그러나 전체적인 생각의 체계를 와해시키는 작은 예외를 초래한다.
셋째로, 사람에 대한 일반화에 신중하게 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스콧에 의하면 “개인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을 알기 전에 한 타입을 만들어 낸다; 타입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아무것도 만들어낸 것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대부분, 우리가 세상을 새로 만들어낼 때, 사실 우리는 결코 사람에 대한 일반화를 할 수 없다. 우리 자신의 머리에 있는 고정관념의 화랑에 걸려 있는 그림들에 대한 혼란스러운 사실을 드러내는 것 뿐이다.
고정관념이란 직접 만나서 대면하기 전에 사람들을 먼저 판단해버리도록 만드는 것으로, 전세계로 돌아다니는 수다와 같은 것이다. 편견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생각해보라, 편견이란 먼저 판단하는 것이다. 편견의 핵심은 야만적인 고정관념이다.
고정관념이 비이성적이고 상처를 주는 형식을 띠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어느 정도 사람들에게 적절한 배역을 정하기 시작한다. TV에서 서부극을 관람하는 자녀를 둔 부모들도 알고 있듯이,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을 배운다. 몇 년 전에 한 사회심리학자는 어린 시절에 형성된 고정관념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그는 가장 인기있는 초등학생 몇 명에게 아침 체조시간에 실수를 하라고 몰래 부탁을 했다. 나중에 선생님은 체조시간 중에 실수를 한 사람이 있었는지 학생들에게 물었다. 그런데 지목된 학생은 평소 왕따를 당하는 학생 “나쁜녀석”으로 실제 실수를 한 학생이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 내부에 형성된 어떤 표준을 가지고서 성장할 뿐만 아니라 어른으로서 우리는 그 표준을 끊임없이 내면화한다. 그 중에는 시어머니(장모)나, 시골뜨기, 혹은 정신과의사에 대한 진담 반, 농담 반 식의 고정관념도 있다, 이것은 우리가 듣고 반복하는 농담의 목록으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것이다. 사실 이런 고정관념이 없다면 농담도 많이 줄어들 것이다. 주위에서 접하는 광고, 영화와 책을 통해서 우리는 고정관념을 계속 유지해가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즉 윌리엄 제임스가 이 세계가 너무나 거대하고 터무니없이 복잡한 혼란 덩어리라고 한 때 묘사했던 바처럼 우리는 고도로 복잡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고정관념을 만들어가는 경향이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눈에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사실상 우리는 그것을 본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생 동안 맹인으로 살다가 시력을 회복한 사람들은 처음에 네모와 세모를 구분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공장의 방문객은 그 공장이 소음으로 가득한 혼란 덩어리라고 생각하지만, 공장 지배인은 모든 일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월터 립만이 말했듯이. “우리는 대부분 처음에는 보지 못하다가, 나중에 정의한다. 정의를 내리고 나서야 볼 수 있는 것이다.”
고정관념은 우리가 세상을 보기위해 세상의 정의를 내리는 방법 중 한가지이다. 고정관념은 인간의 무한한 다양성을 "종류"라는 편리한 작은 그룹으로 나누어 우리는 고정관념적인 생활에서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를 배울수 있게 한다. 각각의 모든 인간을 알기위해 무(無)에서부터 시작했다하면 삶은 정말 고단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고정관념은 무성한 어지러운 혼란스러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로 잘라 내어 덮어줌으로써 우리의 정신적인 낭비를 덜어준다. 그들은 우리가 세상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가는 "불편함"로부터 우리를 편하게 해준다 - 그들은 우리에게 세상의 익숙한 면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문제는 고정관념은 우리를 정신적으로 게으르게 한다는것이다. 의학의 권위자 S.I. Hayakawa는 “고정관념의 위험은 그것의 존재에 있는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는 가끔, 어떤 사람에게는 언제나 관찰의 대안이 된다는 점이다.”라고 썼다.
따라서 고정관념이 다른 것들에 미치는 부정당함은 제쳐주고서라도 그들은 우리들 자신을 피폐하게 한다. 세상을 간단한 분류의 집합으로 보는 어떤 사람은 모든 노동 지도자들을 폭력단원으로, 모든 사업가를 보수주의자로, 모든 하버드학생을 아는 체 하는 놈으로, 그리고 모든 프랑스 사람을 섹시한 사람으로 보는데 이것은 스스로가 하나의 고정관념이 될 위험에 처한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자격을 잃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해 세상을 그 자신의 절대적으로 유일하고, 흉내 낼 수 없으며, 독립적인 방식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피폐하기 때문에 고정관념은 제거되기 쉽지 않다. 우리가 교정한 세상은 B급 영화보다 나을 것이 없는데 우리는 최소한 우리에게 어떤 전형적인 인물특성이 기대되는지 알고 있다. 우리가 그들 자신을 위해 스스로를 이상하고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행동가도록 놔둘 때 우리 대부분이 좋아하는 신념들이 틀렸다고 판명될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갑자기 보이지 않는 진실을 위해 우리의 정형화된 그림을 바꾸지는 않는다. 사람의 생각은 재빠르게 오락가락하며 종종 한 가지 고정관념에서 다른 하나의 고정관념으로 대체된다. 바꾸는 과정의 진실은 우리 머리 속에 있는 그림들에다 부분과 진실의 조각들을 더하는 느린 것인데, 그것들이 서서히 인생 자체의 모호함(더러움)의 일부를 받아들일 때까지 계속된다.
우리가 그 과정을 따라 속도를 낼 수 있을까? 물론이다.
먼저 우리는 우리 머리 속의, 다른 사람들의 머리 속의, 우리들 주위 세상속의 정형화된 그림들을 인지하게 될 수 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증명되었다고 예외를 허용한 모든 판단을 의심할 수 있다. 광범위하고 지적인 과학의 사건보다 더 이상의 세련된 생각은 없는데, 그러나 전체적인 생각의 체계를 와해시키는 작은 예외를 초래한다.
셋째로, 사람에 대한 일반화에 신중하게 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스콧에 의하면 “개인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을 알기 전에 한 타입을 만들어 낸다; 타입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아무것도 만들어낸 것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대부분, 우리가 세상을 새로 만들어낼 때, 사실 우리는 결코 사람에 대한 일반화를 할 수 없다. 우리 자신의 머리에 있는 고정관념의 화랑에 걸려 있는 그림들에 대한 혼란스러운 사실을 드러내는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