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 1.오늘날의 문제와 불교의 자연관과 생명관
Ⅱ 불교의 생명관
∥ 1.개괄
2.생명이란?
3.영원한 생명관(��벐�없는 생명관)
4.유한한 생명관(��벐�있는 생명관)
5.정리
Ⅲ 불교에서 본 자연의 구성
∥1.만물의 원인 : 사대설
2.물질의 원인 : 형성설
3.물질의 생멸과 업작용
4.물질의 부증불감 : 무위법
5.생명의 기원
Ⅳ 동양생태학과 불교의 공생 윤리
∥1.생태학과 환경
2.붓다의 중도와 이탐
3.불교의 환경 윤리와 불살생
4.생태학적 패러다임은 가능한가
Ⅴ 결론 ∥1.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
Ⅱ 불교의 생명관
∥ 1.개괄
2.생명이란?
3.영원한 생명관(��벐�없는 생명관)
4.유한한 생명관(��벐�있는 생명관)
5.정리
Ⅲ 불교에서 본 자연의 구성
∥1.만물의 원인 : 사대설
2.물질의 원인 : 형성설
3.물질의 생멸과 업작용
4.물질의 부증불감 : 무위법
5.생명의 기원
Ⅳ 동양생태학과 불교의 공생 윤리
∥1.생태학과 환경
2.붓다의 중도와 이탐
3.불교의 환경 윤리와 불살생
4.생태학적 패러다임은 가능한가
Ⅴ 결론 ∥1.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
본문내용
런 깊은 생태학적 자각은 정신적인 자각이다. 인간정신이 각 개인은 전체로서의 우주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는 의식의 형태로 이해될 때, 생태학적 자각은 본질적으로 정신적이라는 것이 명백해지고, 실재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 정신적인 전통에 대한 통찰과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다음의 말은 1988년 일본 北海道에서 열린 국제 先住民 회의에 출석한 오스트렐리아 先住民의 한 사람이 일본의 아세아 문제 전문가 見 行의 共生에 관한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대답한 것이다.
인간은 본래 인종이나 국경에 관계없이 魂을 갖고 그 활동으로 공생하여 왔는데 그것은 한 종족만이 아니고 나무, 어류, 돌에도 魂이 있으며 그와 같은 만물의 魂까지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면 지구는 파멸하고 만다. 만물공생의 고삐가 되는 魂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오늘날 공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共生이라는 말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최근에 생태학적 개념으로 널리 쓰이는 개념으로서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키워드가 되고 있다.
오늘날 환경윤리학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문제를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다.
① 자연 속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들의 생존권의 문제이다. 즉 동물권, 식물권은 인권과 함께 생태학적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중심주의 내지 인간우월주의를 부정하고 汎生命主義를 지향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생태학적 사고에 입각한 윤리학이다.
② 현 세대에 사는 우리들은 다음 세대 내지 미래 세대들의 생존 가능성에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현 세대의 환경파괴는 미래 세대의 생존권에 부정을 의미하며 가해자요 파괴자가 되는 것이다. 지구의 생태계는 닫혀진 체계이며 유한한 세계이다. 따라서 중요한 문제는 현 세대와 미래 세대간의 배분이 윤리가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③ 지구환경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인간 중심의 개발 패러다임에서 汎生命의 공감
가능한 지구환경 패러다임으로 학적 태도가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여러 그린피스 단체들이 각 방면에서 환경운동을 벌이고 있으나 좀더 개개인에게 직접 접근하여 환경정화운동을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종교계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동서고금을 통해서 종교야말로 인간정화를 근본문제로 삼아 왔기 때문이요, 또한 사찰이나 교회에서 쉽게 집단적으로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고 평화롭게 환경운동을 전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환경의 오염은 결국 인간에게 그 책임이 있기 때문에 먼저 인간의 정화가 있고서야 환경의 정화가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불교는 물론 각 종교 단체가 앞장서서 인간학적인 자각을 통하여 인간정화의 길, 환경정화의 길에 나서야 할 것이다.
Ⅴ 결론
1.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
결론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우리는 기존의 사유틀들을 모두 알고 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불교의 사상 전부를 이해한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풍랑 앞에 선 세대 가운데 지나온 것들, 물려받았고 이제는 적잖이 잊혀진 것들을 통해 역설적이게도 용기와 희망을 얻은 것이다. 우리는 이제 출항할 준비를 갖추고 어떤 섬을 찾아나서는 단계일 것이다. 이 점은 현시대 모두의 공통점일 터인데 이런 한계 하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일단락짓고자 한다.
한 가지는 불교에 나타난 세계관이 모두에게 같은 정도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비록 현세의 만상이 외견상 차이를 지니지만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똑같은 본체와 영원한 동일성-지속성을 같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다른 하나는 불교의 세계관은 본래적으로 내재적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진여라든가 불성에 대한 논의에서 드러나듯이, 또 사대설이 사실상 뒷받침하듯이 (가장 확장된 의미에서의)자연의 모든 것이 자체로 궁극성을 띤다는 데서 드러난다. 그것은 구성에 있어서 그렇고 원인에 있어서 그렇고 그 동력에 있어서나 진행에 있어서 그렇다.
셋째로는 불교의 세계관은 그 자체가 생명관이라는 것이다. 불교는 여러 필요에 의해 각기 다른 입장을 표명한 분파를 가졌음이 사실이나 기본적으로 그네의 사상 체계는 언제 무엇에나 생명, 살아있음을 부여할 수 있고 이것은 윤회의 틀을 통해 더욱 강력히 전체 세계에 적용된다.
넷째로 불교의 자연관, 생명관은 참된 의미에서는 그 많은 철학적, 사변적 해석에도 불구하고 신비적이라는 것이다. 불교 자연관의 특징은 직접 칼을 대기보다 세상을 관찰한 뒤 그것은 '그러하다'고 언명하는 점이다. 이들은 원인의 틀을 먼저 짜지 않았고 세상에서 보여지는 모든 것의 신비성-궁극적으로 생명성을 파기하지 않았다. 그것을 파기하거나 제한하기엔 이들에게 사물은 너무나 거룩했던 것 같다. 불성을 지닌 것이니까. 신비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면 실재의 일체성을 가리킨다. 요컨데 불교는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윤회의 틀에서 벗어날 때 불타가 되고 그때 각기 고유하게 열반에 든다지만 세상 속에서 계속 돌고 도는 그들의 사고는 최소한도 만상을 생판 모르는 남처럼 대할 순 없게 되어 있고 일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생명체 안에서 세포들은 완전한 독립체들이다. 그렇지만 삼투압이라는 현상은 하나에게 부족한 것을 옆의 것들이 반드시 채워 주도록 되어 있다. 생명은 그런 것이다. 닫혀 있지 않고 열려 있는 것. 그러모으지 않고 나누어 쓰는 것. 그것은 풍요의 법칙이며 생명이 최고의 존재양식이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요컨데 생명에 있어서는 어떤 것들 사이의 경계는 엄밀한 의미의 담장이 아니고 분리, 단절일 수 없다. 생명은 자신의 고유성을 조금도 해치지 않으면서 존재 자체를 분유하고 공유한다.
불교의 자연관은 여러 단계로 그들 존재들을 이해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지속적이고 영원한 생명을 상정하였다. 이러한 패러다임에서는 우리가 바라는 공생의 당위성이 자연스럽게 돌출될 수 있다.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언어가 존재의 집인 것이 아니라 실재가 존재의 집이며 존재는 완전한 의미에서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체를 이루고 있다. 공생은 당연한 윤리이며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참) 김용정, 『종교연구 제10집』. 서울:한국종교학회, 1993.
(참)
(참)
다음의 말은 1988년 일본 北海道에서 열린 국제 先住民 회의에 출석한 오스트렐리아 先住民의 한 사람이 일본의 아세아 문제 전문가 見 行의 共生에 관한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대답한 것이다.
인간은 본래 인종이나 국경에 관계없이 魂을 갖고 그 활동으로 공생하여 왔는데 그것은 한 종족만이 아니고 나무, 어류, 돌에도 魂이 있으며 그와 같은 만물의 魂까지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면 지구는 파멸하고 만다. 만물공생의 고삐가 되는 魂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오늘날 공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共生이라는 말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최근에 생태학적 개념으로 널리 쓰이는 개념으로서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키워드가 되고 있다.
오늘날 환경윤리학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문제를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다.
① 자연 속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들의 생존권의 문제이다. 즉 동물권, 식물권은 인권과 함께 생태학적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중심주의 내지 인간우월주의를 부정하고 汎生命主義를 지향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생태학적 사고에 입각한 윤리학이다.
② 현 세대에 사는 우리들은 다음 세대 내지 미래 세대들의 생존 가능성에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현 세대의 환경파괴는 미래 세대의 생존권에 부정을 의미하며 가해자요 파괴자가 되는 것이다. 지구의 생태계는 닫혀진 체계이며 유한한 세계이다. 따라서 중요한 문제는 현 세대와 미래 세대간의 배분이 윤리가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③ 지구환경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인간 중심의 개발 패러다임에서 汎生命의 공감
가능한 지구환경 패러다임으로 학적 태도가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여러 그린피스 단체들이 각 방면에서 환경운동을 벌이고 있으나 좀더 개개인에게 직접 접근하여 환경정화운동을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종교계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동서고금을 통해서 종교야말로 인간정화를 근본문제로 삼아 왔기 때문이요, 또한 사찰이나 교회에서 쉽게 집단적으로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고 평화롭게 환경운동을 전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환경의 오염은 결국 인간에게 그 책임이 있기 때문에 먼저 인간의 정화가 있고서야 환경의 정화가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불교는 물론 각 종교 단체가 앞장서서 인간학적인 자각을 통하여 인간정화의 길, 환경정화의 길에 나서야 할 것이다.
Ⅴ 결론
1.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
결론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우리는 기존의 사유틀들을 모두 알고 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불교의 사상 전부를 이해한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풍랑 앞에 선 세대 가운데 지나온 것들, 물려받았고 이제는 적잖이 잊혀진 것들을 통해 역설적이게도 용기와 희망을 얻은 것이다. 우리는 이제 출항할 준비를 갖추고 어떤 섬을 찾아나서는 단계일 것이다. 이 점은 현시대 모두의 공통점일 터인데 이런 한계 하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일단락짓고자 한다.
한 가지는 불교에 나타난 세계관이 모두에게 같은 정도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비록 현세의 만상이 외견상 차이를 지니지만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똑같은 본체와 영원한 동일성-지속성을 같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다른 하나는 불교의 세계관은 본래적으로 내재적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진여라든가 불성에 대한 논의에서 드러나듯이, 또 사대설이 사실상 뒷받침하듯이 (가장 확장된 의미에서의)자연의 모든 것이 자체로 궁극성을 띤다는 데서 드러난다. 그것은 구성에 있어서 그렇고 원인에 있어서 그렇고 그 동력에 있어서나 진행에 있어서 그렇다.
셋째로는 불교의 세계관은 그 자체가 생명관이라는 것이다. 불교는 여러 필요에 의해 각기 다른 입장을 표명한 분파를 가졌음이 사실이나 기본적으로 그네의 사상 체계는 언제 무엇에나 생명, 살아있음을 부여할 수 있고 이것은 윤회의 틀을 통해 더욱 강력히 전체 세계에 적용된다.
넷째로 불교의 자연관, 생명관은 참된 의미에서는 그 많은 철학적, 사변적 해석에도 불구하고 신비적이라는 것이다. 불교 자연관의 특징은 직접 칼을 대기보다 세상을 관찰한 뒤 그것은 '그러하다'고 언명하는 점이다. 이들은 원인의 틀을 먼저 짜지 않았고 세상에서 보여지는 모든 것의 신비성-궁극적으로 생명성을 파기하지 않았다. 그것을 파기하거나 제한하기엔 이들에게 사물은 너무나 거룩했던 것 같다. 불성을 지닌 것이니까. 신비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면 실재의 일체성을 가리킨다. 요컨데 불교는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윤회의 틀에서 벗어날 때 불타가 되고 그때 각기 고유하게 열반에 든다지만 세상 속에서 계속 돌고 도는 그들의 사고는 최소한도 만상을 생판 모르는 남처럼 대할 순 없게 되어 있고 일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생명체 안에서 세포들은 완전한 독립체들이다. 그렇지만 삼투압이라는 현상은 하나에게 부족한 것을 옆의 것들이 반드시 채워 주도록 되어 있다. 생명은 그런 것이다. 닫혀 있지 않고 열려 있는 것. 그러모으지 않고 나누어 쓰는 것. 그것은 풍요의 법칙이며 생명이 최고의 존재양식이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요컨데 생명에 있어서는 어떤 것들 사이의 경계는 엄밀한 의미의 담장이 아니고 분리, 단절일 수 없다. 생명은 자신의 고유성을 조금도 해치지 않으면서 존재 자체를 분유하고 공유한다.
불교의 자연관은 여러 단계로 그들 존재들을 이해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지속적이고 영원한 생명을 상정하였다. 이러한 패러다임에서는 우리가 바라는 공생의 당위성이 자연스럽게 돌출될 수 있다.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언어가 존재의 집인 것이 아니라 실재가 존재의 집이며 존재는 완전한 의미에서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체를 이루고 있다. 공생은 당연한 윤리이며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참) 김용정, 『종교연구 제10집』. 서울:한국종교학회, 1993.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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