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자본론
2. 사적유물론
3. 프랑스 혁명
4.러시아혁명
2. 사적유물론
3. 프랑스 혁명
4.러시아혁명
본문내용
피압박민족의 해방운동이 격화했으며, 혹심한 경제공황과 경찰의 탄압은 농민봉기를 더욱 자극하였다. 그리고 주요 도시에서는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선동으로 체제에서 소외된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반정부세력의 정부공격이 더욱 강화되었다.
제1차 러시아혁명 -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극심한 공황, 실업자의 증가, 임금의 저하, 지가 폭등 등으로 고조된 노동자의 반정부운동과 자유주의자의 입헌운동이 러일전쟁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폭발되기 시작하였다. 1905년 1월 9일 일요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 14만 명은 8시간 노동제와 최저임금제 등을 요구하며, 가풍 신부의 인솔 아래 왕궁을 향하여 평화적 시위를 하고 있었는데, 군인들이 발포하여 수백 명이 죽고 수천 명이 부상하였다. 이 피의 일요일 사건을 계기로 제1혁명이 시작되었다. 사건 후 수도의 노동자는 총파업에 들어갔고, 그것은 전국에 파급되었다. 5월에는 각지에서 군대와의 무력충돌이 있었고, 6월 말에는 포렴꽂?號)의 반란이 일어나 정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10월에는 모스크바 철도 노동자의 동맹 파업은 전국적인 총파업으로 발전하여 혁명은 고조에 달하였다. 드디어 니콜라이 2세는 국민의 기본권과 시민적 자유 및 선거에 의한 전국적 제헌의회의 창설을 약속하는 10월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노동자와 병사들은 투쟁을 계속하여 12월 하순에는 모스크바 노동자가 10일간이나 무장봉기를 하는 등의 움직임이 계속되었다. 그런 한편 10월선언은 입헌정부를 요구해 온 중산층과 일부 혁명세력을 만족시켰고, 10월선언에 대한 찬반을 둘러싸고 혁명세력이 분열되는 결과를 가져와 도시의 대규모 혁명은 끝나고 말았다. 이로써 1906년 5월에는 최초로 간접선거에 의한 민선의회인 두마(Duma)가 구성되어 러시아 제1차 혁명은 실질적인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2월혁명 - 1914년 러시아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러시아의 군장비와 경제력의 한계가 드러나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을 재촉하였다. 대전 중 차르의 계속된 동원령, 가축의 징발로 농업은 황폐화되고, 군수공업의 강화로 인한 생필품의 감산, 도시의 식량연료사정 악화는 대도시 민중의 생활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15년 여름 카데트(입헌민주당)를 중심으로 진보블럭이 결성되어 정부의 실정, 전쟁 수행상의 실책에 대해 엄한 비판이 가해졌다. 16년에는 사태가 더욱 악화되어 치안당국마저 혁명의 절박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라스푸틴에 심취한 황비 알렉산드라와 니콜라이 2세는 여전히 전제(專制)를 고집하고 개혁을 생각하지 않았다. 17년에 접어들면서 1,330건의 파업이 발생했고, 2월 중순부터 수도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식량 부족으로 인하여 수도지구 사령관 카발로프 장군은 배급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3월 8일(러시아 구력 2월 23일) 영하 20 ℃ 의 추위에 식량배급을 받기 위해 장사진을 이룬 시민들에게 식량이 더 이상 없다는 말이 떨어지자 시민들은 빵을 요구하며 시위에 들어갔다. 드디어 니콜라이 2세는 카발로프 장군에게 진압할 것을 명령했으나 거부당했으며, 제3일부터는 군부마저 반란을 일으켜 시위대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제4일째는 반란병과 노동자가 감옥에서 정치범을 석방하고 관청을 점거하였다. 이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이날 두마(국회) 지도자들은 12명으로 임시위원회를 구성, 군주제를 살리는 길은 니콜라이 2세의 퇴위와 르보프공을 수반으로 하는 신내각을 구성하는 길이라 판단하고 군부의 동의를 얻어 이를 결정하였다. 니콜라이 2세도 이를 받아들여, 3월 15일 동생인 미카엘 대공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퇴위하였다. 그러나 양위를 받은 미카엘 대공은 앞으로 구성될 제헌의회에 의해 추대되지 않는 한 제위를 계승할 뜻이 없다고 밝혀, 결국 르보프공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3월 15일 구성됨으로써 로마노프 왕조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것이 소위 2월혁명인데, 1905년의 제1혁명과는 달리 농민을 대표하는 군부가 노동자의 혁명에 참가하여 대중봉기를 이끌어 나갔다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10월혁명 - 2월혁명 후 정치권력을 잡은 임시 정부는 전쟁계속정책을 취하였다. 따라서 평화와 생활의 안정을 구하는 대중의 불만이 높아졌다. 4월 중순 망명중인 스위스로부터 독일이 제공한 봉인열차편으로 귀국한 레닌은 자본주의의 타도 없이 종전은 불가능하다는 등 10개항에 걸친 4월 테제(April Theses)를 발표하였다. 이것이 곧 볼셰비키의 방침이 되어 임정타도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임시정부에 대항했다. 6월 18일 임시정부가 행한 독일공격의 실패로 반정부열기가 높아지자, 7월 3일 볼셰비키는 수도의 군대와 노동자들의 무장시위운동을 조직하였다. 정부는 7월 5일 전선으로부터 군대를 소환하여 이를 진압하고 케렌스키가 수상이 되어 급진적인 노동자병사볼셰비키에 탄압을 가하게 되자 이들과 정부 간의 대립은 첨예화하였다. 레닌은 탄압을 피하여 한때 핀란드로 피신하였으나, 그의 강력한 요청 아래 볼셰비키 당내에서는 봉기의 방침이 결정되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의장 트로츠키의 지도하에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어 구체적인 계획이 진행되었다. 11월 6일(러시아 구력 10월 24일) 봉기가 시작되었고, 혁명군은 거의 무혈로 수도의 중요 거점들을 점령, 제2회 전(全)러시아소비에트대회가 열린 7일 심야(深夜)까지는 임시정부의 거점인 동궁(冬宮)을 제외한 도시 전체가 볼셰비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소비에트대회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일부가 퇴장한 가운데 봉기를 승인하고 권력장악을 결의하였다. 이어서 동궁이 함락되고 임시정부의 각료들이 체포된 뒤에 대회는 평화에 관한 포고와 토지에 관한 포고를 채택하고, 레닌을 의장으로 하는 인민위원회를 정부로서 선임하였다. 한편 동궁을 탈출한 케렌스키는 전선의 병력을 이끌고 수도탈환을 꾀하였으나 정세는 점점 기울어져 18년 1월 23일부터 개최된 제3차 전 러시아소비에트대회는 노농소비에트대회와 농민소비에트대회의 합동을 결정하고, 근로피착취인민의 권리선언을 채택함으로써 정세는 결정적으로 기울어졌으며, 18년 2월에는 혁명이 거의 전국에 확대되었다.
제1차 러시아혁명 -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극심한 공황, 실업자의 증가, 임금의 저하, 지가 폭등 등으로 고조된 노동자의 반정부운동과 자유주의자의 입헌운동이 러일전쟁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폭발되기 시작하였다. 1905년 1월 9일 일요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 14만 명은 8시간 노동제와 최저임금제 등을 요구하며, 가풍 신부의 인솔 아래 왕궁을 향하여 평화적 시위를 하고 있었는데, 군인들이 발포하여 수백 명이 죽고 수천 명이 부상하였다. 이 피의 일요일 사건을 계기로 제1혁명이 시작되었다. 사건 후 수도의 노동자는 총파업에 들어갔고, 그것은 전국에 파급되었다. 5월에는 각지에서 군대와의 무력충돌이 있었고, 6월 말에는 포렴꽂?號)의 반란이 일어나 정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10월에는 모스크바 철도 노동자의 동맹 파업은 전국적인 총파업으로 발전하여 혁명은 고조에 달하였다. 드디어 니콜라이 2세는 국민의 기본권과 시민적 자유 및 선거에 의한 전국적 제헌의회의 창설을 약속하는 10월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노동자와 병사들은 투쟁을 계속하여 12월 하순에는 모스크바 노동자가 10일간이나 무장봉기를 하는 등의 움직임이 계속되었다. 그런 한편 10월선언은 입헌정부를 요구해 온 중산층과 일부 혁명세력을 만족시켰고, 10월선언에 대한 찬반을 둘러싸고 혁명세력이 분열되는 결과를 가져와 도시의 대규모 혁명은 끝나고 말았다. 이로써 1906년 5월에는 최초로 간접선거에 의한 민선의회인 두마(Duma)가 구성되어 러시아 제1차 혁명은 실질적인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2월혁명 - 1914년 러시아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러시아의 군장비와 경제력의 한계가 드러나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을 재촉하였다. 대전 중 차르의 계속된 동원령, 가축의 징발로 농업은 황폐화되고, 군수공업의 강화로 인한 생필품의 감산, 도시의 식량연료사정 악화는 대도시 민중의 생활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15년 여름 카데트(입헌민주당)를 중심으로 진보블럭이 결성되어 정부의 실정, 전쟁 수행상의 실책에 대해 엄한 비판이 가해졌다. 16년에는 사태가 더욱 악화되어 치안당국마저 혁명의 절박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라스푸틴에 심취한 황비 알렉산드라와 니콜라이 2세는 여전히 전제(專制)를 고집하고 개혁을 생각하지 않았다. 17년에 접어들면서 1,330건의 파업이 발생했고, 2월 중순부터 수도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식량 부족으로 인하여 수도지구 사령관 카발로프 장군은 배급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3월 8일(러시아 구력 2월 23일) 영하 20 ℃ 의 추위에 식량배급을 받기 위해 장사진을 이룬 시민들에게 식량이 더 이상 없다는 말이 떨어지자 시민들은 빵을 요구하며 시위에 들어갔다. 드디어 니콜라이 2세는 카발로프 장군에게 진압할 것을 명령했으나 거부당했으며, 제3일부터는 군부마저 반란을 일으켜 시위대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제4일째는 반란병과 노동자가 감옥에서 정치범을 석방하고 관청을 점거하였다. 이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이날 두마(국회) 지도자들은 12명으로 임시위원회를 구성, 군주제를 살리는 길은 니콜라이 2세의 퇴위와 르보프공을 수반으로 하는 신내각을 구성하는 길이라 판단하고 군부의 동의를 얻어 이를 결정하였다. 니콜라이 2세도 이를 받아들여, 3월 15일 동생인 미카엘 대공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퇴위하였다. 그러나 양위를 받은 미카엘 대공은 앞으로 구성될 제헌의회에 의해 추대되지 않는 한 제위를 계승할 뜻이 없다고 밝혀, 결국 르보프공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3월 15일 구성됨으로써 로마노프 왕조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것이 소위 2월혁명인데, 1905년의 제1혁명과는 달리 농민을 대표하는 군부가 노동자의 혁명에 참가하여 대중봉기를 이끌어 나갔다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10월혁명 - 2월혁명 후 정치권력을 잡은 임시 정부는 전쟁계속정책을 취하였다. 따라서 평화와 생활의 안정을 구하는 대중의 불만이 높아졌다. 4월 중순 망명중인 스위스로부터 독일이 제공한 봉인열차편으로 귀국한 레닌은 자본주의의 타도 없이 종전은 불가능하다는 등 10개항에 걸친 4월 테제(April Theses)를 발표하였다. 이것이 곧 볼셰비키의 방침이 되어 임정타도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임시정부에 대항했다. 6월 18일 임시정부가 행한 독일공격의 실패로 반정부열기가 높아지자, 7월 3일 볼셰비키는 수도의 군대와 노동자들의 무장시위운동을 조직하였다. 정부는 7월 5일 전선으로부터 군대를 소환하여 이를 진압하고 케렌스키가 수상이 되어 급진적인 노동자병사볼셰비키에 탄압을 가하게 되자 이들과 정부 간의 대립은 첨예화하였다. 레닌은 탄압을 피하여 한때 핀란드로 피신하였으나, 그의 강력한 요청 아래 볼셰비키 당내에서는 봉기의 방침이 결정되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의장 트로츠키의 지도하에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어 구체적인 계획이 진행되었다. 11월 6일(러시아 구력 10월 24일) 봉기가 시작되었고, 혁명군은 거의 무혈로 수도의 중요 거점들을 점령, 제2회 전(全)러시아소비에트대회가 열린 7일 심야(深夜)까지는 임시정부의 거점인 동궁(冬宮)을 제외한 도시 전체가 볼셰비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소비에트대회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일부가 퇴장한 가운데 봉기를 승인하고 권력장악을 결의하였다. 이어서 동궁이 함락되고 임시정부의 각료들이 체포된 뒤에 대회는 평화에 관한 포고와 토지에 관한 포고를 채택하고, 레닌을 의장으로 하는 인민위원회를 정부로서 선임하였다. 한편 동궁을 탈출한 케렌스키는 전선의 병력을 이끌고 수도탈환을 꾀하였으나 정세는 점점 기울어져 18년 1월 23일부터 개최된 제3차 전 러시아소비에트대회는 노농소비에트대회와 농민소비에트대회의 합동을 결정하고, 근로피착취인민의 권리선언을 채택함으로써 정세는 결정적으로 기울어졌으며, 18년 2월에는 혁명이 거의 전국에 확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