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사변(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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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자유시사변(독립운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무장독립투쟁사상 최대의 비극

배경

독립군부대 이념ㆍ이해 엇갈려 불협화

러시아 적군의 독립군 공격학살

<참고문헌>

본문내용

리에 착수하고 자유대대에 편입되었던 종래의 이항군대ㆍ다반군대를 마사노프로 이주시키고 간도군대에 대해서도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자유대대는 끝까지 불응하여 장교들이 체포되었고, 무기들을 압수당하는 한편 이항군대와 다반군대에 의해 무장해체 되고 지방수비대로 강제로 편입되었다.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독립군들에 대한 군권이 일단 이항군의 승리로 돌아가자 자유대대의 오하묵ㆍ최고려 등도 이르쿠츠크에 있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가서 독립군의 통수권을 자기들이 가질 수 있도록 교섭했다. 이를 받아들인 동양비서부는 임시 고려군정회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갈란다라시월린, 부사령관은 오하묵, 군정위원은 김하석ㆍ채성룡으로 임명하였다.
박일리아 등은 한인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위원회의 합법성을 주장하면서 극동공화국정부와 교섭했으나 실패하였다. 1921년 6월 6일 자유시에 도착한 갈란다라시월린은 7일 자유시의 전부대를 소집하여 자신이 고려군정의회의 총사령관임을 선포하고, 8일 박일리아에게 군대를 인솔하고 자유시에 출두하라고 명령했다. 박일리아는 이를 거부하였지만 홍범도ㆍ안무의 군대는 자유시로 돌아갔다. 박일리아는 고려군정의회에 대한 반항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1921년 6월 27일 사할린의용대 연대장 그레고리예프도 투항하자, 갈란다라사월린은 사할린의용대의 무장해제를 단행하기로 했다. 28일 자유시수비대 제 29연대에서 파견된 군대가 사할린 의용대에 접근했고, 이후 제 29연대 대장은 사할린의용대 본부에 들어가 복종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사할린의용대가 불응하자 공격명령을 내려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자유시사면은 사할린의용군이 러시아 적군의 포위와 집중공격에 쓰러진 참변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 상하이 고려공산당 간의 대립투쟁이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자유시 참변의 희생자 수는 여러 자료에 구구하게 나타나 있다. 그 중 대표적인 두 가지만을 대조적으로 골라 보면 다음과 같다.
이르쿠츠크파의 자료로 보이는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는 사할린의용대 측의 사망자 36, 포로 8백64, 행방불명 59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일제 문서에 수록되어 있는 [자유시 사변에 대한 간도 지방 한국 독립단의 성토문]에는 [기원 4254년 6월 28일 노령 흑룡주 자유시에서 대한의용군이 노군과 싸운 결과 사자(死者) 2백72명, 익사자 31명, 행방불명 2백50명, 포로 9백17명의 대 참변을 당하게 됐다. 대한의용대에 참가했던 단체는 사할린 군대ㆍ청룡군대ㆍ이만군대ㆍ광복단ㆍ군정서ㆍ의군부ㆍ도독부ㆍ혈성대(血誠隊)등으로서......]로 나타나 있다.
위에 보는 바와 같이 이르쿠츠크파의 자료에는 자유시 참변의 희생자 수를 사할린의용대에 한정시켜 축소 발표한 것 같다. 일제 문서에 수록되어 있는 한국 독립단의 성토문이 원본 그대로라면 자유시 사변의 희생자는 사할린 의용대에 한하지 않고 최후까지 사할린의용대와 행동을 같이 했던 한인 무장대의 희생자를 포함하여 엄청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재발굴 한국독립운동사1」, 윤병석, 김창순, 한국일보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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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7.10
  • 저작시기2004.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58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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