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을 읽고 - 엔도 슈사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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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침묵을 읽고 - 엔도 슈사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들어가기

2. 내용보기
1) 줄거리 및 주요 등장인물
2) ‘하나님의 침묵, 신도들의 배교, 순교’의 3가지 주제에 대한 조원 각자의 생각
[1]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은 침묵(沈黙), 부재(不在)하시는가?
[2] 페레이아, 로돌리코 신부의 “배교" 과정과 행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 하는가?
[3] 교회에서 추앙하는 거룩한 “순교", “순교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3) 종합하면

3. 에필로그

본문내용

부터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게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 또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기독교가 국교가 아닌 우리나라에서는 자칫 역효과를 초래할지도 모르는 위험성이 있다. 기독교적 가치위에 세워진 사립대학교에서도 그러할 진대 잘못된 가치가 진리를 볼 수 있는 혜안(慧眼)을 사람들에서 빼앗아가고 있는 지금, 도대체 어떤 방법이야말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가장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지금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날카롭게 다지고 모든 것을 성경에 중점두면서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대안들을 마련하는 한편, 계속해서 정도(定道)를 걸어간다면 그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바로잡아져 한국의 기독교 사회가 결국은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발판으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고 ‘믿는’ 일일 것이다.
소설은 허구이지만 그 안에서 우리들 삶의 모습을 투영시키며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던져 준다. 그런 의미에서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빼어난 문학적으로서의 가치이외에도 심리적, 철학적, 신학적 가치를 총체적으로 담고 있는 작품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3. 에필로그
* 조원1
오늘날 신교와 구교는 매우 다르다. 물론, 그 뿌리가 같고, 신교가 구교에서 나왔기에 정통성은 가톨릭에 있다는 주장이 있지만, 사실, 로마가 국교로 기독교를 인정하기 이전의 진정한 기독교정신은 신교의 그것과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가톨릭 신앙 서적은 내게 그 차이를 더 인식시켜 주었다. 사실, 그들의 형식적인 면에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것을 때문에 그들이 나와 다르고, 신앙에 대해 추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형식 같은 것을 중시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가톨릭에 대한 나의 판단이 아니라, 단지 느낌과 생각일 뿐이다. 느끼는 것은 자유니까.
* 조원2
책의 결말은 주인공인 로돌리코가 배교하고, 죽은 사람의 아내와 일본인의 이름으로 살아가야 할 슬픈 운명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로돌리코는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었노라고 고백한다. 자신이 성화를 밟은 순간 로돌리코는 하느님이 기꺼이 자신의 성화를 밟게 하였노라고, 자신의 아픔을 함께하였노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주는 마지막 화해의 메시지이다. 즉, 인간 자신의 의지와 고통을 감내하는 참된 믿음이 있다면 신은 결코 부재하거나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곁에서 함께 그 고통을 견디어 결국은, 그 인간을 성숙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그런 생각을 가졌다. 책에서 조금 아쉬운 점은 로돌리코가 깨달은 ‘신은 침묵한 것이 아니었다.'라는 말에 대해서 설명이 부족했던 것이었다. 로돌리코가 어떻게 해서 그런 생각을 굳히게 되었는지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주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로돌리코가 배교함으로서 일본의 그리스도교의 전파는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그대로 정체되고 말았는지)에 대한 언급을 해주었더라면 더욱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 조원3
마지막에 덧붙여진 네덜란드의 상인 우나센의 일기에 배교한 페레이아를 ‘신을 잊어버린 악한의 죽음을 바랄 정도’라고 묘사한 것이 있다. 이 것에서 나는 이들의 행위를 보는 해석이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으며, 똑같은 상황에 처해보지 않는 이상 자신과 관련된 환경과 ‘배교는 나쁘다’는 일반적 믿음에 근거해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페레이아가 그리스도를 잊었다고도 볼 수는 있다. 그러나 페레이아가 더 이상 일본은 참된 신에 대한 개념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그로부터의 외부의 포교활동을 애써 막으려 한 것에서는, 나는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페레이아의 슬픔. 애써 일본의 가난한 순교자들에 대한 언급을 피하면서 자기와 동일한 약자를 늘리려고 한 것은 고독과 약점을 서로 나누어 가질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로돌리코의 배교로 그는 너무나 마음이 아팠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 자신의 동료들이었던 사람들이 더 이상의 선교활동으로 제 3 제 4의 자신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포교활동을 적극적으로 막아보려 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은 신을 잊었다는 불명예를 걸머지겠지만,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랬다라고 그러나 나는 쓸모가 있다라고 위안하며 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지만. 더 이상 신부들의 고뇌와 믿음의 혼란이 되풀이되는 것은 차마 볼 수 없었기에, 이를 막아보자는 자신의 마지막 양심의 투영은 아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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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6.08.01
  • 저작시기2006.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6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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