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시대 정치에 대한 재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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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정조 시대 정치에 대한 재평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정조 시대 전 정치상황
1. 정조 시대 전 정치사
1) 숙종․경종 대 당쟁
2) 영조 대 당쟁
3) 사도세자 흉사 사건

Ⅱ. 정조 시대의 정치
1. 당시의 정치상황
2. 수원성 축성의 정치적 의미
1) 수원화성
2) 수원성 축성의 의미

Ⅲ. 정조 시대 정치에 대한 재평가

본문내용

했다. 정조는 '짐이 모든 개혁을 진두 지휘한다'며 '성왕(聖王)'임을 천명했지만, 복잡미묘한 현실정치는 그 '성지(聖志)'를 제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나름대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 정치적 반대파를 회유, 설득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수차례 암살 위기만 맞았다. 그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 탕평책, 규장각 설치, 화성(경기 수원) 건설 등 치적을 쌓았지만 그의 갑작스런 죽음과 함께 모든 개혁은 후퇴하거나 수포로 돌아가버렸다. 하지만 정조의 개혁 실패는 그의 급사 때문에 비롯된 것만이 아니다 '정조의 국정 운영' 방식 안에서 이미 싹터온 것이다. '계몽절대군주(聖王)'을 자처하며 '모든 국정 운명은 짐이 알아서 챙긴다'는 정조의 통치방식은 관료들의 참여의식을 가로막았다. 현대의 인사청문회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며 정치적 부패를 방지했던 공론정치도 무너진다. 예문관 등 언관의 발언권 제한과 빈번한 금지령 설치에 반발하여 암묵적 시위를 벌이는 조정 신하들과 늘 삐딱하게 구는 노론 벽파들은 말년의 정조를 특히 불안하게 했다. 정조는 영조의 유지를 거역하는 불효를 감행하면서 자신이 사도세자를 추존할 수 없었다. 그래서 1804년 상왕으로 물러나 화성에 머무는 대신 신왕이 정조의 뜻을 받들어 사도세자를 국왕의 지위로 추존케 하려 했고 이에 따라 1794년 '화성 신도시'를 구상했다. 신도시 건설 추진 과정에서 나타난 정조의 자의적이고 고집불통인 언행도 관료들을 복지부동으로 내몰았다고 한다. 특히 '세도를 위임받은(世道之任)' 외척 김조순(노론 시파)이 19세기 세도정치의 핵심 인물이 되고 이후 63년 동안 세도정치가 횡행한 원인을 정조 개혁정치 실패에서 찾고 그 역사적 책임을 정조에게 묻는다. 그렇지만 정조는 탁월한 리더십의 소유자인 것은 분명하다. 정조는 탕평책을 추진하면서 국왕의 역할을 '중재자'에 두고 붕당간의 의리와 인재를 고루 혼합하는 데 힘썼다. 당쟁이 재연할 기미가 엿보이면 두 세력을 맞서게 하되 제3의 세력을 내세워 이를 조정하는 '중재의 리더십(大承氣湯)'을 발휘했다. 예를 들면 천주교 문제에 연루된 남인의 단점을 청나라의 북학과 패관 소품체에 심취해 있는 노론의 문제점과 대비시켜 서로를 견제케 한 것이다.
< 참 고 문 헌 >
* 이태진 저 "왕조의 유산 - 외규장각도서를 찾아서" 지식산업사 1994.
* 이은순 저 "조선후기당쟁사 연구" 일조각 1988.
* 박현모 저 "정치가 정조" 푸른역사 2000.

키워드

영정조,   정조,   수원성,   국사,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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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6.09.10
  • 저작시기2006.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63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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