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역사 개관
본 자료는 7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해당 자료는 7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7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이스라엘 역사 개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려져 있다.
③ 예후가 미약하게 된 이유
오므리 가문의 숙청 당시 유능한 관리를 살해한점
유다와 페니키아와의 동맹이 이 숙청으로 끊어짐.
여호아하스 815-801
- 여호아하스는 그의 아버지 예후를 계승하여 17년간 다스렸다.
- 하사엘에게 굴복한점 외에는 그와 관련된 내용이 거의 없다.
요아스=여호아스 801-786
- 요아스는 왕위로 오른 직후 엘리사로 부터 군사적 지위를 회복 하리라고 약속을 받았다.
- 요아스는 유다와 아마샤(Amaziah)의 공격을 지탱할 정도로 우세 하였다.
여로보암2세 786-746
- 여로보암 2세는 예후왕조의 세번째 후계자로서 왕위에 올랐다.
- 여로보암은 다윗과 솔로몬 제국시대에 존재했던 동쪽과 북쪽 경계를 유지 할 수 있었다.
스가리아 746-745, 6개월
- 6개월 이내에 그의 후계자가 암살 당했다.
- 단과 벧엘에서 여로보암의 숭배를 계속 했다.
이스라엘의 쇠퇴(B.C751-722, 왕하15:13-17:41)
살룸 745, 1개월
- 살룸은 스가랴를 죽이고 왕으로 선언 함
- 므나헴이 그를 죽임
므니헴 745-738
- 므나헴은 총 10년간 다스렸다.
- 므나헴 통치 기간 동안 앗수리아의 세력이 다시 한번 지중해 국가들에게 미치게 되었다.
- 디글랏빌레셀의 주전 743년 원정은 이스라엘에까지 미치게 되어 여기에 므나헴이 휘말리
게 되었다.
브가히아 738-737/베가 737-732
- 므나헴이 죽자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왕위를 계승 하였다.
- 그러나 2년을 다스렸을때에 군대 장관인 베가(Pekah)사마리아 궁전에서 그를 암살하고 왕위에 올라 이스라엘의 8대 왕조를 세웠다.
- 베가의 단독 통치 6년인 주전 734년에 디글랏빌레셀 3세는 반역적 동맹을 진압 하고자 서쪽으로 돌아 왔다.
호세아 732-724
- 호세아가 즉위 할시 이스라엘은 큰나라가 아니었다.
- 살만에셀은 사마리아로 건너가 수도를 포위 하였다.
- 마침내 사마리아성은 무너졌고 주권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 앗시리아 제국 군대가 사마리아를 정복함(722)
- 사마리아 성이 무너지자 앗수리아 총독이 그 당에 오게 됨으로써 요단 서편의 이스라엘도 역시 주(Province)로 편입 되었다.
바벨론 포로기, (B.C 587-538, 왕하 22-25장, 대하34-36장)
(1) 느부갓네살
① 군사적 활동
- 느부갓네살은 전쟁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 그는 두로섬을 실제로 취하지는 못하였지만 바벨론의 종주권을 인정 받았다.
- 그는 주전 582년에 코엘레-수리아, 모압, 암몬등을 원정 하였다.
- 주전 568년 애굽을 침략 하였다.
② 건축사업
- 그는 복잡한 구조의 요새를 건축하였다.
-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미디안 왕비를 위해 느부갓네살이 테라스 위에 메달아 세운 정원이었다.
(2) 느부갓네살의 후계자
- 그의 아들 아벨-마르둑이 2년간 통치 하였다.
- 아벨-마르둑은 그의 매부 네리 글리살에 의해 살해되었고 대신 그가 주전 560년 8월 왕위에 올랐다.
- 그이 아들 라바시-마르둑이 정권을 잡았으나 몇개월후 나보디누스를 포함한 신하들에 의해 암살 되었고 나보디누스가 왕권을 잡게 되었다.
(3) 나보디누스
- 하란출신인 나보디누스는 느부갓네살이후 가장 유력한 통치자였다.
- 재임 초기에 실리시아와 수리아에 대하여 두번의 원정을 하였다.
- 나보디누스가 없는 바벨론에서는 오랫동안 연례의 새해 잔치가 중단되었다.
-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이 바벨로니아 제국을 멸망시킴(539)
- 페르시아 제국 시대, 539-333
(4)일반 포로들
① 숫 자
- 두번째 추방때 : 용사 7,000 , 기술자 1,000명을 포함한 10,000명이었다.
② 에스겔
- 그는 포로 가운데 하나님의 사자로서 죄를 꾸짖기도 하고 구원의 약속으로 위로를 하기도 하였다.
(5) 바벨론에서의 생활
① 조직이 유지됨
- 유다의 지방 행정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계속 활동을 했다.
- 선지자와 제사장들의 조직도 보유 되었다.
② 이주의 자유
- 포로들은 그 땅에서 이주의 자유를 누렸다.
- 에스겔은 자기집을 소유 하면서까지 이동하였다.
③ 서신의 특권
- 유대인 들은 서신의 특권까지 누려 유다에 있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쓸 수 있었다.
④ 고용의 기회
- 포로들에게 고용의 기회가 열려 있었다.
- 느부갓네살이 포로로 선택한 사람들의 종류에서 발견된다.
⑤ 비옥한 땅에서 살다
- 많은 사람들이 그발강가에서 살았는데 이는 카바리 운하를 말하는것으로 보인다.
⑥ 계속적인 징벌
- 백성들이 그들의 고향에서 쫓겨나 안락한 환경ㅢ 생활에서 오는 모욕감을 견디더야 했다.
고레스 왕의 칙령, 538
(1) 고레스 칙령
- 고레스가 그 첫해 작은 나라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하였다.
- 고레스 칙령의 내용
* 고레스의 비용으로 예루살렘성전 재건
* 원하는 유대인은 귀국, 남아 있는 유대인 경제적 원조를 해줄것
* 느부갓네살이 취한 금,은을 예루살렘으로 돌려 보낼것.
(2) 귀 환
- 칙령이 발표된 직후 주전 538년이나 537년에 귀환이 이루어진것으로 보임.
포로기 이후, 538년 이후
- 예루살렘성전의 재건, 515
(1) 성전 건축
① 훌륭한 시작
- 성전 건축은 그땅에도착한 직후 시작되었다.
- 첫번 순서는 기초를 다지는 것이었는데 꽤 빨리 이루어진것 같다.
- 이때에 북쪽의 사마리아 사람들이 반대를 제기 하여 건축은 중단 되었다.
② 건축사업이 다시 시작 되다.
- 다리오 2년에 학개와 스가랴 선지는 건축활동의 재기를 촉구 하였다.
- 그해 6월에 작업이 시작 되었고 4년후 다리오 6년에 성전이 완성 되었다.
결론.
이스라엘을 정의하면, 하나님의 주권에 맡겨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 할 수 있다. 열왕들의 패역으로, 망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국가 멸망의 불행 속에서 야웨를 불신하고 다른 신을 구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하나님 야웨의 새로운 발견과 해석에 힘썼다. 이것이 바로 나라가 망했음에도 불구하고, 포로기의 이스라엘이 정치적인 독립을 완전히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벨론에 의해 붕괴되지 않고 살아남게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
  • 가격3,000
  • 페이지수21페이지
  • 등록일2006.10.26
  • 저작시기2006.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68785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