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사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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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주변 국가의 자국 중심적 발해사 인식


발해사 연구를 두고 벌이는 논쟁의 원인


발해가 우리나라 역사인 근거


발해의 대외 관계


맺음말


참고 자료

본문내용

일본에 전파하는 교량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중 일 관계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도 한 것이다.
발해와 일본은 공동의 정치목적을 위하여 200년간 우호 왕래하고 중국과 일본의 우호관계사의 중요한 한 폐이지가 되었다. 왕승례(王承禮)는 도표를 이용하여 발해의 일본에 대한 34차의 방문, 그리고 일본의 13에 걸친 방문을 자세히 정리하여, 발해와 일본의 전반적인 교류를 한눈에 살필 수 있게 해 주었다.
일본과 발해의 외교는 3가지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일본과 외교가 개시되는 무왕대부터 발해의 '신라침공계획'이 무산되는 시점까지는 당과 신라와의 정치, 외교적 갈등이 심화된 단계로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武의 시대로 규정할 수 있다. 발해의 건국 후 2대 왕인 무왕 대무예는 예상되는 당나라와의 충돌에 대비하는 방책의 일환으로 727년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통교하였다. 이때 무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밝히고 우호관계를 맺자고 제의하였다. 일본 조정 역시 평등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여 발해의 정치요구에 비록 명확한 답을 주지는 않았으나 “비록 거친바다가 놓여있지만 끊임없이 왕래하자.”라고 하였다. 문왕 3년 (738년)에 재개된 대일외교는 모두 11차에 걸쳐 진행된다. 전기에는 성덕왕 30년 일본의 신라 침공계획에 따른 긴밀한 관계를 맺는 군사 외교의 성격을 갖고 후기에는 경제, 문화 외교의 성격을 갖는다. 한편, 762년에 발해국가로 지위가 상승하고 당이 중재하는 국제관계 속에서 770년대 이후부터 康王代에 聘期問題와 발해각원이 설치되는 사실은 근거로 경제적 성격과 부합하는 초기교양의 시대로 상정할 수 있다.
그리고 해동성국의 기틀을 마련해 가는 선왕대 부터 대황진, 대건황, 대현석대까지는 사신단의 구성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과 동아시아 전체가 교역에 치중하던 시기였다는 점, 그리고 두령을 중심으로 한 상업활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후기교역의 시대로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에는 대당 실리 외교에 대일 경제 외교를 통한 실리추구로 중흥의 기틀을 마련한 시기이다.
마지막으로 대건황, 대현석대에는 교역의 시대와 함께 문화외교를 지향하는 문의 시대를 새롭게 조성하였다는 점이 또 하나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3)신라와의 대외관계
1. 시대별 신라와의 관계
1)건국기 : 발해는 국가터전을 마련하는 시기이고 신라는 삼국통일로 전성기를 이루던 시기
-이 시기에 발해가 신라에 사신을 보내지만 신라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
(신라는 大國이었기에)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에 신라가 일찍이 대조영에게 제5품 대아찬의 벼슬을 주었다고 했는데, 일찍이 대조영이 한 번 신라에 귀복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2)팽창기(대무예시기, 719~737) : 발해가 세력을 팽창해나감
-발해의 팽창에 따라 신라는 위기를 느낌→발해와 신라 사이에 적대관계 성립
(성덕왕 20년에 장정 2000명을 징발해 발해의 남진에 대비하는 장성 축조)
-신라와 당이 연합하여 발해를 공격
3)성장기(대흠무시기, 737~794) : 신라가 중대에서 하대로 넘어가던 시기
-발해와 신라 사이에 교통로가 개설되었을거라 추측
(가탐의 [고금군국지]에 발해의 책성부(중국 길림성 훈춘)와 신라 국경의 천정군(원산시 부근 덕원) 사이에 39개의 역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신당서] 발해전에는 발해의 주요 대외교통로의 하나로서 신라도를 적고 있다.→둘 사이에 교섭이 활발했음을 의미)
4)중흥기(대인수시기, 818~830) : 발해는 해동성국의 전성기였고 신라는 하대의 정치적 혼란기
-발해가 신라의 영토를 빼앗음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발해의 공격에 대비하여 패강에 300리나 되는 장성을 쌓는 등 방어에만 주력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897년 당에 간 발해 왕자 대봉예가 국명의 호칭문제나 외교적 서열에 있어 '신라-발해'가 아닌 '발해-신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발해국력이 신라보다 우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5)멸망기(대인선시기, 906~926) : 거란이 세력확장을 하여 발해에 위협을 가하던 시기
-외교적 고립을 피하기 위해 다시 신라와 교섭하려고 노력함
-신라에 이은 고려에 대해서도 혼인정책을 취하는 등 외교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함
2. 신라와의 관계속에서 드러나는 발해의 위상
발해는 건국기부터 멸망기에 이르기까지 주변국과 수많은 항쟁 또는 교섭을 통해 성장하였다. 신라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 항쟁과 교섭의 일련의 과정들이 특히 잘 드러난다.
발해는 건국기에 삼국통일로 전성기를 이루고 있던 신라에 사신을 보냄으로써 자국을 알리려 하는데, 이 때까지만 해도 발해는 신라에 위협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곧 팽창기, 성장기를 겪으면서 발해는 자국의 위상이 급격히 높아짐을 경험한다. 그리고 중흥기 즉 대인수시기에 들어서는 종전에 전성기를 구가하던 신라와 국력의 세기가 역전되면서 발해의 위상이 최고조에 다다르게 된다. 발해의 멸망기인 대인선시기에는 거란의 팽창으로 외교적 고립의 상황에 놓여진 발해가 신라와의 적대감을 풀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취하는 등 그 때까지 유지해왔던 위상이 크게 꺾인다.
이처럼 발해는 신라를 위협하는 나라의 '강성'과 외교적 고립을 피하기 위해 숙이고 들어가는 나라의 '쇠약'을 동시에 경험했다.
5. 맺 음 말
남북국시대가 전개되고 있을 때, 신라에는 전쟁이 없었고, 민중의 생활도 조금 나아졌다. 문자 그대로 태평성대를 구가하지는 못하였지만 안정된 바탕 위에서 창조적인 활동이 왕성하게 일어났고, 사상, 문화의 수준도 높아졌다. 이 무렵 신라는 우리가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찬란한 예술품들을 많이 만들어 냈다.
신라와 발해는 서로 갈등을 겪으며 경쟁했으나 침략전쟁을 자제하며 그런대로 평화관계를 유지했다. 발해는 건국하여 영토 확장이라는 기반을 다진 뒤 제 2단계로 신라나 당나라보다는 먼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가지면서 해동성국으로 발돋움 하였다.
6. 참고 자료
저 서
-발해의 기원과 문화 「최무장」저
-한국사 이야기4 「이이화」저
-중국의 발해사 연구 「고구려 연구 재단」편
논 문
-발해의 대일본외교 연구 「박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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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11.14
  • 저작시기20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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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71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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