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차 례
인생을 통찰하는 다섯 가지 지혜
1. 작은 자아에서 더 넓은 은혜로
2. 움켜쥠에서 내려놓음으로
3. 운명론에서 희망으로
4. 감정의 조종에서 순전한 사랑으로
5. 두려운 죽음에서 환희의 삶으로
인생을 통찰하는 다섯 가지 지혜
1. 작은 자아에서 더 넓은 은혜로
2. 움켜쥠에서 내려놓음으로
3. 운명론에서 희망으로
4. 감정의 조종에서 순전한 사랑으로
5. 두려운 죽음에서 환희의 삶으로
본문내용
지평을 훌쩍 뛰어넘는, 더 큰 생명의 일부가 되게 하시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망각하기 일쑤다.
우리는 때로 죽음 앞에서 버림받은 기분을 느낀다. 신약성경이 죽음을 ‘마지막 원수’라 부르는 이유가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만나셨을 때 거기에는 엄청난 대가가 뒤따랐다. 그분은 친히 고뇌에 찬 시편 22편 말씀을 빌어 버림받은 심정을 토로하셨다. 죽음은 때로 버림받음을 뜻할 수 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1). 죽음의 순간 터져 나온 예수님의 이 절규는 고뇌의 한복판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 우리도 이 시편 말씀으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버림받은 듯한 극도의 고통 속에서 친밀한 기도가 터져 나온다. 하나님이 우리의 간구에서 아득히 멀리 계시는 듯이 보여도 우리는 여전히 그분께 나아간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여정은 십자가에서 끝나지 않았다. 엠마오 도상에서 우리는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장면을 본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우리는 또 다른 길의 그림을 본다. 그 확실한 길이 있기에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 그 길이 있기에 우리는 생명에서 죽음으로 가는 여정이 결국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가는 여정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예수님의 작별은 분위기가 다르다. 예수님은 혼란스러워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 속에서 이별은 치명적인 힘을 잃는다. 이 모두가 가장 소중한 것을 상실해도 하나님이 곁에 오셔서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가 돼 주시기에 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의 죽음 뿐 아니라 내가 알고 사랑하고 함께 사는 이들의 죽음도 기꺼이 인정해야 한다. 떠남은 삶의 한 조건이다. 그리스도인이 성장하는 한 조건이다. 예수님의 작별은 우리의 인생을 친숙한 것에서 영원한 것을 향해, 잠깐 누리는 것에서 언젠가 영원히 누릴 것을 향해 끊임없이 떠나는 과정으로 이해하라는 조용한 부르심이다. 그런 면에서 삶은 떠남의 연속이다. 과거를 떠나 더 많은 독립과 더 많은 자유와 더 많은 진리에 이르는 과거로부터 죽는 것의 연속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 떠남은 평생 그토록 얻으려 했던 최후의 독립과 자유와 진리를 우리에게 안겨 준다. 나에게 그럴진대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왜 그렇지 않겠는가?
물론 사랑하는 이들에게 죽음이 찾아올 때 우리는 여전히 슬픔으로 몸부림치며, 자신에게 죽음이 닥쳐올 때도 여전히 겁을 낸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은 새 생명을 낳는 해산의 진통에 가깝다. 새 생명이 나오게 하는 진통 말이다. 죽음을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말라. 우리의 슬픔에 하나님을 모셔들이면 결코 홀로 걷지 않을 것이다. 죽음에 직면할 때 결국 우리는 삶을 더 잘 살 수 있다. 그리고 슬픔의 밤을 지나 희망의 아침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기쁨으로 더 잘 춤출 수 있다.
우리는 때로 죽음 앞에서 버림받은 기분을 느낀다. 신약성경이 죽음을 ‘마지막 원수’라 부르는 이유가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만나셨을 때 거기에는 엄청난 대가가 뒤따랐다. 그분은 친히 고뇌에 찬 시편 22편 말씀을 빌어 버림받은 심정을 토로하셨다. 죽음은 때로 버림받음을 뜻할 수 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1). 죽음의 순간 터져 나온 예수님의 이 절규는 고뇌의 한복판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 우리도 이 시편 말씀으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버림받은 듯한 극도의 고통 속에서 친밀한 기도가 터져 나온다. 하나님이 우리의 간구에서 아득히 멀리 계시는 듯이 보여도 우리는 여전히 그분께 나아간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여정은 십자가에서 끝나지 않았다. 엠마오 도상에서 우리는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장면을 본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우리는 또 다른 길의 그림을 본다. 그 확실한 길이 있기에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 그 길이 있기에 우리는 생명에서 죽음으로 가는 여정이 결국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가는 여정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예수님의 작별은 분위기가 다르다. 예수님은 혼란스러워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 속에서 이별은 치명적인 힘을 잃는다. 이 모두가 가장 소중한 것을 상실해도 하나님이 곁에 오셔서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가 돼 주시기에 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의 죽음 뿐 아니라 내가 알고 사랑하고 함께 사는 이들의 죽음도 기꺼이 인정해야 한다. 떠남은 삶의 한 조건이다. 그리스도인이 성장하는 한 조건이다. 예수님의 작별은 우리의 인생을 친숙한 것에서 영원한 것을 향해, 잠깐 누리는 것에서 언젠가 영원히 누릴 것을 향해 끊임없이 떠나는 과정으로 이해하라는 조용한 부르심이다. 그런 면에서 삶은 떠남의 연속이다. 과거를 떠나 더 많은 독립과 더 많은 자유와 더 많은 진리에 이르는 과거로부터 죽는 것의 연속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 떠남은 평생 그토록 얻으려 했던 최후의 독립과 자유와 진리를 우리에게 안겨 준다. 나에게 그럴진대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왜 그렇지 않겠는가?
물론 사랑하는 이들에게 죽음이 찾아올 때 우리는 여전히 슬픔으로 몸부림치며, 자신에게 죽음이 닥쳐올 때도 여전히 겁을 낸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은 새 생명을 낳는 해산의 진통에 가깝다. 새 생명이 나오게 하는 진통 말이다. 죽음을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말라. 우리의 슬픔에 하나님을 모셔들이면 결코 홀로 걷지 않을 것이다. 죽음에 직면할 때 결국 우리는 삶을 더 잘 살 수 있다. 그리고 슬픔의 밤을 지나 희망의 아침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기쁨으로 더 잘 춤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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