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큰 공헌을 했다고 생각하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전천년설은 교회 전체로 전반적인 흐름이 무천년설에 있다고 볼 때 교회의 중추적인 흐름에서 벗어나는 사상이다. 개신교의 지배적인종말론인 무천년설에 신학적 관심을 돌려야 하며 종말론에 대한 교리적 공허감을 느끼고 있는 성도들의 영혼을 충족시켜 줄 메시지를 준비해야 한다고 보고 한국 침례교회를 위시해서 후천년설에 대해 무지한 상태를 비판함으로 후천년설이 갖는 장점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데 장신대의 최종진 교수가 말하는 후천년설이나 무천년설의 설득력있는 논리를 들어보지 못한 듯하다. 다른 신학교 학자들과의 교류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한국침례교의 회중예배의 특성에 대하여는 한국 침례교단에서 회중예배의 특성에 대한 객관적인 사회학적 조사로 공인된 통계를 사용한 첫 번째 연구라는 점에 있어서 예배학에 대해 많은 공헌을 했다고 본다. 앞으로 이 분야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참고자료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예배 음악 사용에 있어서 주일 낮 예배와 비교하면서 주일 낮 예배에 다양한 음악형태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주일 낮 예배와 모든 예배와의 구분으로 예배와의 격리를 시도하고 있는데 독자에게 처음부터 주일 낮 예배라고 지적해주지 않아 읽어가면서 의문을 갖게 한 점이 아쉽다. 일관성 있게 예배라고 사용하지 않고 어떤 경우에는 주일 낮 예배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함으로써 다른 부분에서 언급된 예배는 어떤 예배를 의미하는지 불 분명하다. 예배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해서 전반적인 전개가 없고 예배가 제도화된 예배를 드리므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성도들이 반응을 기대하기 어렵다. 예배는 전형화된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화답하는 참여하는 예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한국 침례교의 목회론에 대하여는 협동사업에 대한 저자의 지적이 한국침례교회의 발전에 꼭 필요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침례교회는 지역교회의 자율성을 존중한다. 그러나 침례교회는 지역교회의 자율성을 존중한다. 그러나 침례교회는 개교회가 독립성과 자립성을 가짐과 동시에 모든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선한 사업을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지적과 한국침례교회의 목회자들과 교회들이 인식이 변하여 협동사업이 잘 이루어질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제안은 매우 타당하다고 본다. 저자는 여성목사 안수라는 특별하고도 민감한 부분을 독자들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어떤 신학적인 타당성을 제시하여 주지 못하고 있는 점이 아쉽다. 또 저자는 21세기 목회를 위한 소그룹 활용을 제시하면서 소그룹의 필요성과 효율성을 충분히 논하였다. 그리고 소그룹을 작은 교회와 연계하여 작은 교회가 가지는 장점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소그룹공동체 모임이 대체 어떤 모임이냐를 명확하게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체 소그룹이 셀 모임인지 아니면 구역별 모임인지 목장모임인지에 대하여서 좀 더 명확하게 지적하고 구체적으로 전개해줬으면 하는 바램이 든다.
한국 침례교의 문화. 윤리관에 대하여는 한국침례교의 문화-윤리관 정립을 하는 일에 본인 스스로도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미국의 남침례교회들을 본 주제의 연구를 위한 기초자료로 삼은 것은 본인의 말대로 우리를 위한 교훈으로 삼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미국을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한국침례교회의 문화-윤리관에 대한 모델로 미국적 침례교회들을 분석, 비평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다시금 미국식 침례교회에로 답습 또는 그 한계 내에 머무를 수밖에 없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이러한 접근법은 발표자의 논문의 목적에는 부합할런지는 몰라도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한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에 어떤 예언자적 모델방안을 제시해줄 수 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국 침례교의 선교론에 대하여는 가장 큰 공헌이라면 무엇보다도 침례교의 선교를 위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대안들과 방향들을 제시했다는 데 있다. 가장 침례교적 선교란 실제로 선교의 인식성보다는 선교의 실천성에 그 우위성을 두고 있다. 즉 침례교는 선교에 대한 행함이 앎보다 우선이라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저자의 논문은 한마디로 실천적인 측면에서 한국 침례교의 선교를 행하기 위해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하며 무엇이 덜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귀한 논문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논문을 통해서 보여준 아쉬운 점들이 있다면 침례교의 선교론의 논의적 범주로 침례교의 선교론이라고 붙였다. 선교론이라고 할 때, 이는 어떤 학문의 방법론적 성격을 전제로 한다. 또 한국침례교회의 타종교에 대한 태도가 배타주의 혹은 유일주의로 선교활동을 실천하고 있으며, 선교현장에서의 침례교회가 호전적이라고 본다. 이러한 배타주의와 유일주의를 주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기독교 선교 자체의 생존을 위협 받는다. 타종교에 대한 실질적인 이유보다는 어떤 신학적인 이유에 근거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 침례교회의 선교가 보다 호전적인 태도를 취하는 한국 침례교의 태도는 어떤 실천적이고 전략적인 이유에서라기보다는 인식론적 기반, 즉 성서의 절대적인 명령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회성 그리고 임박한 종말론에 따른 복음과 선교의 절박한 요청 등과 같은 신학적인 기반에 의한 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앞으로 미전도 종족 또는 미전도 지역 중심의 선교 방향은 한국 침례교회가 견지하여야 할 방향으로 발전적 제안으로는 창의적 접근지역에 성교사를 직접 투입하기 위해서는 중간 매게체 역할을 할 수 있는 전문적인 전략조정 선교사를 적극 활용하는 방안을 고려해서 개인의 영혼 구원으로부터 점차 발전하여 현재는 개개영혼의 구원을 통하여 재 생산 가능한 토착화로 형성이라는 방향으로 잡혀가야 한다. 선교사의 훈련과 재정이라는 문제를 실제적인 문제로 보고 올바른 선교적 방향으로 세계적으로 방향을 정해야 할 것이다. 한국 침례교의 선교적인 문제점을 최대한 선교 2세기에 크게 이바지를 할 것이라고 본다.
전천년설은 교회 전체로 전반적인 흐름이 무천년설에 있다고 볼 때 교회의 중추적인 흐름에서 벗어나는 사상이다. 개신교의 지배적인종말론인 무천년설에 신학적 관심을 돌려야 하며 종말론에 대한 교리적 공허감을 느끼고 있는 성도들의 영혼을 충족시켜 줄 메시지를 준비해야 한다고 보고 한국 침례교회를 위시해서 후천년설에 대해 무지한 상태를 비판함으로 후천년설이 갖는 장점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데 장신대의 최종진 교수가 말하는 후천년설이나 무천년설의 설득력있는 논리를 들어보지 못한 듯하다. 다른 신학교 학자들과의 교류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한국침례교의 회중예배의 특성에 대하여는 한국 침례교단에서 회중예배의 특성에 대한 객관적인 사회학적 조사로 공인된 통계를 사용한 첫 번째 연구라는 점에 있어서 예배학에 대해 많은 공헌을 했다고 본다. 앞으로 이 분야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참고자료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예배 음악 사용에 있어서 주일 낮 예배와 비교하면서 주일 낮 예배에 다양한 음악형태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주일 낮 예배와 모든 예배와의 구분으로 예배와의 격리를 시도하고 있는데 독자에게 처음부터 주일 낮 예배라고 지적해주지 않아 읽어가면서 의문을 갖게 한 점이 아쉽다. 일관성 있게 예배라고 사용하지 않고 어떤 경우에는 주일 낮 예배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함으로써 다른 부분에서 언급된 예배는 어떤 예배를 의미하는지 불 분명하다. 예배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해서 전반적인 전개가 없고 예배가 제도화된 예배를 드리므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성도들이 반응을 기대하기 어렵다. 예배는 전형화된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화답하는 참여하는 예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한국 침례교의 목회론에 대하여는 협동사업에 대한 저자의 지적이 한국침례교회의 발전에 꼭 필요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침례교회는 지역교회의 자율성을 존중한다. 그러나 침례교회는 지역교회의 자율성을 존중한다. 그러나 침례교회는 개교회가 독립성과 자립성을 가짐과 동시에 모든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선한 사업을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지적과 한국침례교회의 목회자들과 교회들이 인식이 변하여 협동사업이 잘 이루어질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제안은 매우 타당하다고 본다. 저자는 여성목사 안수라는 특별하고도 민감한 부분을 독자들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어떤 신학적인 타당성을 제시하여 주지 못하고 있는 점이 아쉽다. 또 저자는 21세기 목회를 위한 소그룹 활용을 제시하면서 소그룹의 필요성과 효율성을 충분히 논하였다. 그리고 소그룹을 작은 교회와 연계하여 작은 교회가 가지는 장점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소그룹공동체 모임이 대체 어떤 모임이냐를 명확하게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체 소그룹이 셀 모임인지 아니면 구역별 모임인지 목장모임인지에 대하여서 좀 더 명확하게 지적하고 구체적으로 전개해줬으면 하는 바램이 든다.
한국 침례교의 문화. 윤리관에 대하여는 한국침례교의 문화-윤리관 정립을 하는 일에 본인 스스로도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미국의 남침례교회들을 본 주제의 연구를 위한 기초자료로 삼은 것은 본인의 말대로 우리를 위한 교훈으로 삼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미국을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한국침례교회의 문화-윤리관에 대한 모델로 미국적 침례교회들을 분석, 비평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다시금 미국식 침례교회에로 답습 또는 그 한계 내에 머무를 수밖에 없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이러한 접근법은 발표자의 논문의 목적에는 부합할런지는 몰라도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한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에 어떤 예언자적 모델방안을 제시해줄 수 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국 침례교의 선교론에 대하여는 가장 큰 공헌이라면 무엇보다도 침례교의 선교를 위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대안들과 방향들을 제시했다는 데 있다. 가장 침례교적 선교란 실제로 선교의 인식성보다는 선교의 실천성에 그 우위성을 두고 있다. 즉 침례교는 선교에 대한 행함이 앎보다 우선이라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저자의 논문은 한마디로 실천적인 측면에서 한국 침례교의 선교를 행하기 위해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하며 무엇이 덜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귀한 논문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논문을 통해서 보여준 아쉬운 점들이 있다면 침례교의 선교론의 논의적 범주로 침례교의 선교론이라고 붙였다. 선교론이라고 할 때, 이는 어떤 학문의 방법론적 성격을 전제로 한다. 또 한국침례교회의 타종교에 대한 태도가 배타주의 혹은 유일주의로 선교활동을 실천하고 있으며, 선교현장에서의 침례교회가 호전적이라고 본다. 이러한 배타주의와 유일주의를 주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기독교 선교 자체의 생존을 위협 받는다. 타종교에 대한 실질적인 이유보다는 어떤 신학적인 이유에 근거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 침례교회의 선교가 보다 호전적인 태도를 취하는 한국 침례교의 태도는 어떤 실천적이고 전략적인 이유에서라기보다는 인식론적 기반, 즉 성서의 절대적인 명령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회성 그리고 임박한 종말론에 따른 복음과 선교의 절박한 요청 등과 같은 신학적인 기반에 의한 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앞으로 미전도 종족 또는 미전도 지역 중심의 선교 방향은 한국 침례교회가 견지하여야 할 방향으로 발전적 제안으로는 창의적 접근지역에 성교사를 직접 투입하기 위해서는 중간 매게체 역할을 할 수 있는 전문적인 전략조정 선교사를 적극 활용하는 방안을 고려해서 개인의 영혼 구원으로부터 점차 발전하여 현재는 개개영혼의 구원을 통하여 재 생산 가능한 토착화로 형성이라는 방향으로 잡혀가야 한다. 선교사의 훈련과 재정이라는 문제를 실제적인 문제로 보고 올바른 선교적 방향으로 세계적으로 방향을 정해야 할 것이다. 한국 침례교의 선교적인 문제점을 최대한 선교 2세기에 크게 이바지를 할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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