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들어가며
Ⅱ. 경주의 행정구역과 인구
Ⅲ. 배리삼존석불입상
Ⅳ. 불국사
Ⅴ. 상선암 마애석가여래대불좌
Ⅵ. 부처바위
Ⅶ. 정혜사지 13층 석탑
Ⅷ. 이견대(利見臺)
Ⅸ. 천마총(天馬塚)
Ⅹ. 석굴암
Ⅺ. 분황사
Ⅻ. 안압지
ⅩⅢ. 반월성
ⅩⅣ. 남산리 3층석탑
ⅩⅤ. 나가며
Ⅱ. 경주의 행정구역과 인구
Ⅲ. 배리삼존석불입상
Ⅳ. 불국사
Ⅴ. 상선암 마애석가여래대불좌
Ⅵ. 부처바위
Ⅶ. 정혜사지 13층 석탑
Ⅷ. 이견대(利見臺)
Ⅸ. 천마총(天馬塚)
Ⅹ. 석굴암
Ⅺ. 분황사
Ⅻ. 안압지
ⅩⅢ. 반월성
ⅩⅣ. 남산리 3층석탑
ⅩⅤ. 나가며
본문내용
다. 하지만 지금은 없어지고 1741년에 월성 서쪽에서 이곳으로 옮겨 만든 석빙고(石氷庫)만 남아있다.
ⅩⅣ. 남산리 3층석탑
지금에 와서는 탑이 있던 자리에 있었을 절의 이름도 알 수 없으며 동서로 나뉘어진 이 남산리 쌍탑 언저리는 민가가 들어차서 옛 자취를 더듬어 불수가 없다.
이 탑은 모양과 형식을 달리하는 쌍탑이 동서로 대립한 특이한 탑이다. 이같이 쌍탑이 다른 형태로 고안, 설계, 제작 건립된 것으로는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이 있다.
절집에 탑을 세운 것은 부처님의 유골인 사리를 모시고 예배를 드리기 위함이었다. 우리 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초기에는 탑이 절집에서 중심되는 건축물이었다. 그래서 하나의 탑을 크고 웅장하게 건립했으니 황룡사 9층 목탑이 대표적인 것이다. 그러다가 차츰 부처님 모습[佛像]을 만들거나 그려서 불상을 숭배하게 되니 불상을 모시는 법당 건물이 더욱 중요하게 되고, 탑은 이전에 비해 다소 중요함이 떨어지게 됐다. 그러면서 하나 뿐이던 탑이 금당 앞에 두 채로 배치된 것이다. 통일신라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니 감은사 터 3층 쌍석탑(682년)이 대표적인 것이다. 금당 중심과 이등변삼각형을 이루는 지점에 탑을 두 기 세운 것이다. 이 쌍탑도 그런 양식에 따른 것인데, 대부분의 쌍탑이 쌍둥이인데 반해 불국사의 쌍탑처럼 동?서탑의 형태가 각각 다른 것이 특이하다. 동탑은 한 단의 기단 위에 세워진 3층 석탑인데 벽돌 탑 모양인 전탑 형식으로 만들어졌고, 서탑은 두 단의 기단 위에 기와집 모양인 목탑을 본떠서 나타낸 전형적인 신라 석탑으로 세워졌다.
동탑은 넓은 받침돌 위에 얕은 굄돌을 얹고는 그 위에 여덟 개의 큰 돌을 다듬어 짜 맞추어 기단을 만들었다. 이 탑은 기단이 독특한데, 돌의 크기, 높이, 너비가 모두 달라 이음새가 서로 어긋나게 되어 편평한 평면에 변화를 준다. 남쪽 면은 어쩌다가 열십(十)자로 만났는데 변화를 주기 위해, 가운데 부분에 홈을 파, 딴 돌을 박아넣어 균제를 깨뜨리고 있다. 이렇게 돌 이음 하나에도 새심한 배려를 하였기에 탑의 자태는 매우 안정되고 장중하게 보인다. 기단 위에 세 단으로 고임 받침을 만들고, 그 위에 기둥 모양을 새기지 않은 1층 몸체 돌을 얹었다. 1층 지붕 돌은 모두 수평선으로 아래는 5단, 위는 7단, 안쪽으로 너비를 줄여갔다. 2층과 3층 몸체 돌은 1층보다 높이는 반이나 줄었는데, 너비는 조금씩 줄어서 지붕 돌의 너비가 감소하는 비례와 같아 안정감을 주면서 상승감을 느끼게 한다. 지붕돌 층급받침은 물론 낙수면도 다섯 층을 둔 것이 특이하다. 전체 탑의 높이는 약7m이며 달리 장식은 없다.
서탑은 얕은 아래 기단 위에 얹힌 위 기단에 팔부신중(八部神衆)을 여덟 군데 새겼다. 석탑을 지키는 팔부신중은 신라 중대 이후 등장하는 드문 조각으로 단순히 탑의 장식에만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탑을 부처님의 세계인 수미산으로 나타내려는 신앙 차원의 바람이기도 하다. 탑에 십이지신상이나 팔부신중, 사천왕상을 새겨서 배치하는 것은 부처님 나라를 나타내기 위한 불교의 우주관이다. 이 탑에는남쪽에 건달바와 아수라, 동쪽에 야차와 용, 북쪽에 긴나라와 마후라가, 서쪽에 천과 가루라가 배치되어 있어 지옥에서 하늘까지를 나타내고 있다. 팔부신중은 모두 좌상으로 입에 염주를 물었거나 손에 여의주나 금강저를 든 모습 또는 합장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 위는 수미산 꼭대기 사왕천이고, 사왕천 위는 도리천, 도리천 위는 맑고 깨끗한 부처님 나라인 것이다. 기단 위에는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형식의 몸체 돌과 지붕 돌이 삼층으로 얹혀 있다. 1층 몸체 돌의 너비에 비해 위 기단의 너비는 배, 아래 기단의 너비는 3배의 비율로 돼 있어 매우 안정감이 있다. 그 위로 2, 3층이 알맞은 비례로 줄어들며 솟아올라 아름답게 느끼지는 탑이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모두 돌 하나로 되어 있고 각층에는 우주를 조각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지붕돌은 층급받침이 각각 5단이며 낙수면은 경사져 있다. 이 서탑은 불국사의 석가탑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균형이 잘 잡혀 있고, 높이는 약 5.6m 이다.
남산동의 이 두 석탑은 양식은 다르지만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며 마주보고 있다. 신라 통일 기의 동서 쌍탑은 대체로 동일 양식으로 만들어지는데, 이와 같은 특이한 형식도 간혹 있음을 알려 준다. 보물 제 124호 이다.
ⅩⅤ. 나가며
경주가 인근 도시에 비하여 인구증가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것은 문화관광도시로의 개발잠재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잠재력은 개발되지 않은 채, 보전을 목적으로한 도시개발 규제만이 이루어져 온데 그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인구증가의 상대적 부진은 인근도시와 비교해서 도시발전의 부진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으며, 거리에서 느껴지는 상대적인 낙후성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새로운 고층건물, 대형건물의 개발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서 도심의 형상과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점에서 더욱 낙후되어 보인다. 이러한 도시발전의 낙후성은 결국 토지가격에도 영향을 주게 되고, 이는 주민들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상의 상대적 손실을 가져오게 된다. 이런 까닭에 규제 받는 주민들의 불만은 상당기간 지속되어 왔으며, 현재도 규제를 풀려는 개발압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렇다고 개발규제를 풀자니 매장되어있는 잠재적 문화재들이 대부분 파괴될 것이 분명하며, 고층, 대형건물들이 들어설 경우, 문화역사도시로서의 이미지는 사라질 것이 자명한 일이다. 정부의 입장에서는 주민들의 민원해소도 중요하지만, 천년문화의 보전은 더욱 중요하여, 선뜻 정책의 방향을 한가지로 정할 수 없는 실정이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정부가 매장문화재가 위치하는 곳이나, 옛 도읍의 중심으로서 역사적으로 복원, 보전할 필요가 있는 지역을 민간으로부터 매입하여, 민원을 원천적으로 해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장 정부가 주민들의 재산상의 손실을 보전해줄 수 있는 비용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며, 매장문화재를 발굴하고 보전할 수 있는 재원은 더더욱 없다. 따라서 정부는 이러 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유곡의 입장에 서있는 것이다.
ⅩⅣ. 남산리 3층석탑
지금에 와서는 탑이 있던 자리에 있었을 절의 이름도 알 수 없으며 동서로 나뉘어진 이 남산리 쌍탑 언저리는 민가가 들어차서 옛 자취를 더듬어 불수가 없다.
이 탑은 모양과 형식을 달리하는 쌍탑이 동서로 대립한 특이한 탑이다. 이같이 쌍탑이 다른 형태로 고안, 설계, 제작 건립된 것으로는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이 있다.
절집에 탑을 세운 것은 부처님의 유골인 사리를 모시고 예배를 드리기 위함이었다. 우리 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초기에는 탑이 절집에서 중심되는 건축물이었다. 그래서 하나의 탑을 크고 웅장하게 건립했으니 황룡사 9층 목탑이 대표적인 것이다. 그러다가 차츰 부처님 모습[佛像]을 만들거나 그려서 불상을 숭배하게 되니 불상을 모시는 법당 건물이 더욱 중요하게 되고, 탑은 이전에 비해 다소 중요함이 떨어지게 됐다. 그러면서 하나 뿐이던 탑이 금당 앞에 두 채로 배치된 것이다. 통일신라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니 감은사 터 3층 쌍석탑(682년)이 대표적인 것이다. 금당 중심과 이등변삼각형을 이루는 지점에 탑을 두 기 세운 것이다. 이 쌍탑도 그런 양식에 따른 것인데, 대부분의 쌍탑이 쌍둥이인데 반해 불국사의 쌍탑처럼 동?서탑의 형태가 각각 다른 것이 특이하다. 동탑은 한 단의 기단 위에 세워진 3층 석탑인데 벽돌 탑 모양인 전탑 형식으로 만들어졌고, 서탑은 두 단의 기단 위에 기와집 모양인 목탑을 본떠서 나타낸 전형적인 신라 석탑으로 세워졌다.
동탑은 넓은 받침돌 위에 얕은 굄돌을 얹고는 그 위에 여덟 개의 큰 돌을 다듬어 짜 맞추어 기단을 만들었다. 이 탑은 기단이 독특한데, 돌의 크기, 높이, 너비가 모두 달라 이음새가 서로 어긋나게 되어 편평한 평면에 변화를 준다. 남쪽 면은 어쩌다가 열십(十)자로 만났는데 변화를 주기 위해, 가운데 부분에 홈을 파, 딴 돌을 박아넣어 균제를 깨뜨리고 있다. 이렇게 돌 이음 하나에도 새심한 배려를 하였기에 탑의 자태는 매우 안정되고 장중하게 보인다. 기단 위에 세 단으로 고임 받침을 만들고, 그 위에 기둥 모양을 새기지 않은 1층 몸체 돌을 얹었다. 1층 지붕 돌은 모두 수평선으로 아래는 5단, 위는 7단, 안쪽으로 너비를 줄여갔다. 2층과 3층 몸체 돌은 1층보다 높이는 반이나 줄었는데, 너비는 조금씩 줄어서 지붕 돌의 너비가 감소하는 비례와 같아 안정감을 주면서 상승감을 느끼게 한다. 지붕돌 층급받침은 물론 낙수면도 다섯 층을 둔 것이 특이하다. 전체 탑의 높이는 약7m이며 달리 장식은 없다.
서탑은 얕은 아래 기단 위에 얹힌 위 기단에 팔부신중(八部神衆)을 여덟 군데 새겼다. 석탑을 지키는 팔부신중은 신라 중대 이후 등장하는 드문 조각으로 단순히 탑의 장식에만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탑을 부처님의 세계인 수미산으로 나타내려는 신앙 차원의 바람이기도 하다. 탑에 십이지신상이나 팔부신중, 사천왕상을 새겨서 배치하는 것은 부처님 나라를 나타내기 위한 불교의 우주관이다. 이 탑에는남쪽에 건달바와 아수라, 동쪽에 야차와 용, 북쪽에 긴나라와 마후라가, 서쪽에 천과 가루라가 배치되어 있어 지옥에서 하늘까지를 나타내고 있다. 팔부신중은 모두 좌상으로 입에 염주를 물었거나 손에 여의주나 금강저를 든 모습 또는 합장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 위는 수미산 꼭대기 사왕천이고, 사왕천 위는 도리천, 도리천 위는 맑고 깨끗한 부처님 나라인 것이다. 기단 위에는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형식의 몸체 돌과 지붕 돌이 삼층으로 얹혀 있다. 1층 몸체 돌의 너비에 비해 위 기단의 너비는 배, 아래 기단의 너비는 3배의 비율로 돼 있어 매우 안정감이 있다. 그 위로 2, 3층이 알맞은 비례로 줄어들며 솟아올라 아름답게 느끼지는 탑이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모두 돌 하나로 되어 있고 각층에는 우주를 조각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지붕돌은 층급받침이 각각 5단이며 낙수면은 경사져 있다. 이 서탑은 불국사의 석가탑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균형이 잘 잡혀 있고, 높이는 약 5.6m 이다.
남산동의 이 두 석탑은 양식은 다르지만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며 마주보고 있다. 신라 통일 기의 동서 쌍탑은 대체로 동일 양식으로 만들어지는데, 이와 같은 특이한 형식도 간혹 있음을 알려 준다. 보물 제 124호 이다.
ⅩⅤ. 나가며
경주가 인근 도시에 비하여 인구증가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것은 문화관광도시로의 개발잠재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잠재력은 개발되지 않은 채, 보전을 목적으로한 도시개발 규제만이 이루어져 온데 그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인구증가의 상대적 부진은 인근도시와 비교해서 도시발전의 부진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으며, 거리에서 느껴지는 상대적인 낙후성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새로운 고층건물, 대형건물의 개발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서 도심의 형상과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점에서 더욱 낙후되어 보인다. 이러한 도시발전의 낙후성은 결국 토지가격에도 영향을 주게 되고, 이는 주민들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상의 상대적 손실을 가져오게 된다. 이런 까닭에 규제 받는 주민들의 불만은 상당기간 지속되어 왔으며, 현재도 규제를 풀려는 개발압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렇다고 개발규제를 풀자니 매장되어있는 잠재적 문화재들이 대부분 파괴될 것이 분명하며, 고층, 대형건물들이 들어설 경우, 문화역사도시로서의 이미지는 사라질 것이 자명한 일이다. 정부의 입장에서는 주민들의 민원해소도 중요하지만, 천년문화의 보전은 더욱 중요하여, 선뜻 정책의 방향을 한가지로 정할 수 없는 실정이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정부가 매장문화재가 위치하는 곳이나, 옛 도읍의 중심으로서 역사적으로 복원, 보전할 필요가 있는 지역을 민간으로부터 매입하여, 민원을 원천적으로 해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장 정부가 주민들의 재산상의 손실을 보전해줄 수 있는 비용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며, 매장문화재를 발굴하고 보전할 수 있는 재원은 더더욱 없다. 따라서 정부는 이러 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유곡의 입장에 서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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