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보령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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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충남 보령을 다녀와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성주사지

3. 낭혜화상백월보광탑

4. 화암서원(花巖書院)

5. 신안서원(新安書院)

6. 보령향교(保寧鄕校)

7. 남포향교(藍浦鄕校)

8. 오천향교(鰲川鄕校)

9. 오천성지(鰲川城趾)

10. 당치(堂峙)

11. 경순왕(敬順王) 경모전(敬慕殿)

12. 웅천(熊川)의 오석(烏石)

본문내용

학자 백이정도「먹돌은 사람을 기름지게 하며 변함없는 사람의 심증이다」라고 시문에서 밝힌바와 같이 돌의 우아함에서 예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허나 이조때 토정 이지함은 제자 서기에게 말하기를「까마귀는 사람과 천생의 연분이 없는건데 까마귀 털은 윤기가 나고 검은데 하필이면 돌에서 윤기가 있어서야」하고 말하며 그의 텁텁한 성격을 도로하였을 때 서기는「사람의 마음이 갈고 닦아지는 것처럼 오석은 갈고 닦을수록 빛이 있습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지함은 그 말을 받아서「갈고 닦는것도 끝이 있는 법이로다. 사람 목숨보다 수명이 짧은 것은 돌이 아니야」하고 뱉었다니 두 선비의 도학적 판단을 잘 표현한 이야기라 하겠다. 서기는 그 후 제주도까지 이지함을 따라 갔다가 헤어져서 이곳에 와서 서당을 차렸다. 그는 학문에 밝았으나 서족출신이며 남의 집 가노로 있었으므로 이곳 양반들은 서족출신이 무슨 서당 선생이냐고 배척하였었다.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면서도 자기가 가장 부러워 하는 것이 오석이라고 말하며 돌에 기대어 울었다 한다. 사람의 마음은 수시로 변화를 일으키지만 돌에는 변화가 없다 했다. 그래서 그는 여기를 떠나 공주 공암에서 서당을 차리고 많은 선생들과 유생들이 모였을 때 비석엔 자기 고향의 오석을 쓰게 했고 자기도 죽어선 이곳 오석으로 비를 세우게 했다. 오석의 매끈한 돌임을 싫어하던 이지함은 그 후 성주산에 자주 들렀으나 이곳은 잘 지나 다니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성주산 근처에 자기 묘자리를 잡아 놓고선 자기는 죽어서 명당자리에 들어간다 하였지만 나중에 그 명당자리를 남에게 내 준다. 그 후 풍문에는 이곳이 싫어져서 남에게 넘겨줬다 한다. 그도 죽어서 고만에 묻혔지만 그의 비석은 이곳의 윤기 흐르는 오석이다. 이조 왕실의 건축자재에 사용하기도 하고 장식품으로 사용되기도 하는 오석은 현대화함에 따라 더욱 사용도가 늘어난다. 요즈음은 미술공예품으로 등장을 해서 많은 애호를 받는다. 웅천에 가면 석공장이 크게 번창을 한다. 성주산 꼭대기에 마치 톱으로 산을 갈라 놓은 듯 산허리를 자르고 돌을 꺼내는 자국이 있다. 특히 가옥이 현대화함에 따라 웅천의 오석은 더욱 사용도가 늘어난다. 옛날에는 묘비명 또는 신도비로 세워져서 오랜 세월동안 역사의 증인처럼 사용되었던 오석이 가옥안에서 장식품으로도 등장을 하게 되었다. 보령시에서 유일하게 특산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웅천의 오석은 그래서 돌 중의 돌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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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5.11
  • 저작시기2007.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92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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