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1) 대군외교(大君外交)체제의 의미
2) 대군외교체제의 두 측면
2. 대군외교체제의 확립
1) 소우씨의 어가 소동
2) 「국서개찬」사건
3) 「대구외교체제」의 여러특질
3. 맺음말 - 대군외교체제 해체에 의 전망
1) 양국사절의 왕래
2) 대마번의 조선무역
4. 나오며
1) 대군외교(大君外交)체제의 의미
2) 대군외교체제의 두 측면
2. 대군외교체제의 확립
1) 소우씨의 어가 소동
2) 「국서개찬」사건
3) 「대구외교체제」의 여러특질
3. 맺음말 - 대군외교체제 해체에 의 전망
1) 양국사절의 왕래
2) 대마번의 조선무역
4. 나오며
본문내용
조선은 히데요시의 침략전쟁 이래 일본에 대한 경계심이 고조되어 일본인 사절의 접대를 부산포에 한정하고, 일본인이 내륙지방에 발을 들여 놓는 것을 금했다. 일본인의 도항을 국왕사와 소우씨, 대마수직인에 한정했다.
이렇게 일본에서는 소우씨의 사송선만이 부산에 내항하고, 조선에서는 통신사가 도일하고, 역관이 대마도에 파견되는 변칙적인 사절왕래의 형태가 형성되었다.
- 조선통신사의 도일
도꾸가와 정권 시기에 조선통신사는 전후 12회에 걸쳐 도일했다. 그 중 초기 3회는 「회답겸환쇄사」로 조선은 조선인포로의 쇄환을 직접 사절을 파견하여 목적을 달성하려했고, 일본의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대일본정책의 방침을 세우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일본의 요구에 응함으로써 남방의 정세를 안정시키려고 하였다.
도꾸가와 정권에 있어서 조선통신사 도일의 의미는 국내적으로 어례 떠는 입공으로 위치시켜서 조선이 도꾸가와 정권의 무의에 복속하고 있다고 꾸미고, 자기권력을 조선유구도란다 등에 의해 형성된 화이의식의 중심에 두고, 도꾸가와권력이 일본의 통치권과 외교권의 실권자인 것을 과시하려 하였다.
조선통신사일행이 부산포를 출발하면서부터 귀국할 때까지의 경비는 모두 일본 측에서 부담하고 있었다. 후에 조선과 일본 양국의 재정난에 빠지만서 일조외교체제의 유지가 관란하게 되었고, 양국을 내습한 서구열강의 동아시아 진출에 의한 대외적 위기의 구체화가 이 외교체제의 붕괴를 촉진시켰다.
- 조선역관의 대마래방
통신사와는 별도로 조선에서 대마에 외교사절로서 역관이 파견되었다. 역관의 종류는
① 통신사도일 떼에 실무상의 제문제를 협의 하는 외교문제에 관한 것
② 도꾸가와가의 ★★에 관한 것
③ 소우씨의 경조에 관한 것이 있다.
이들을 접대하는 경비는 모두 대마번에서 부담했다. 이후 대마번은 재정이 악화되어 막부로부터 재정을 원조 받게 되었다.
- 수우씨가 조선에 보낸 외교사절
조선에 가는 소우씨의 선박은 아시카카시대 이래의 전토에 의해 반드시 사송선의 형식을 취했다. 즉 선박마다 외교사절을 세우는데 외교사절은 항상 소우씨의 도서를 받은 서류를 휴대하며, 서계를 받을 사람에 대한 대진을 가지고 조선에 갔다. 이들 선박은 대개가 봉진 이외에도 공★역품을 실었기 때문에 사송선인 동시에 무역선이었다.
2) 대마번의 조선무역
- 조선무역의 막번제적 특질
① 도꾸가와정권의 무역정책통화정책과 나가사끼무역에 직접영향을 받는 구조를 갖고 있다.
② 소우씨의 가역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
③ 소우씨의 지행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
- 막부의 대마번에 대한 재정원조
막부로부터 재정원조를 끌어내는 대마번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① 대마번은 소지행으로 조선을 견제하는 임무를 부담하였고 그 때문에 분수에 맞지 않는 가신단을 갖고 있었다.
② 과대한 군역에 대한 지행의 부족분은 조선 무역에서 보충하였고, 따라서 조선무역은 지행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③ 조선 무역의 쇠퇴는 지행의 삭감과 같아서, 지행이 삭감되면 군역을 유지하기 힘들다.
④ 군역이 어렵게 된다는 것은 대마번만의 문제가 아니라 막부권력의 권위에도 관계된 문제이다.
막부는 기본적으로 대마번의 주장을 인정하였고 그 때문에 대마번은 독자적으로 무역진흥에 노력해야 했다. 대군외교체제는 중세 이래 통교의 실적을 가진 소우씨를 매개로 하여 비로서 성립된 체제이기 때문에 소우씨를 전봉하여 바꿀 수 없었다. 이는 조선과의 국교단절을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막부는 대군외교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소우씨를 존속시켜야 했고 소우씨를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재정원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4. 나오며
이 글은 일본인 학자인 아라노 야스노리가 1987년에 도꾸가와정권의 대군외교체제를 연구한 글이다. 여기서는 도꾸가와 장군이 스스로의 국제적 호칭을 ‘일본국대군’으로 설정함으로써 자기를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를 재편성해가는 것과 소우씨와 야나가와씨의 갈등을 해결 하는 과정에서 소우씨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소우씨를 도꾸가와정권의 강력한 통제하에 두고 자신들의 외교방침을 관철시키고 있는 측면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이 연구 이후에 이루어졌던 조일 관계에 대한 한일 양국의 연구들은 자신의 문화적 우수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자문화 중심주의에 빠져 조일관계를 제대로 보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 글은 1980년대의 글이고 일본인 학자가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연구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도꾸가와정권의 대군외교체제의 성립과정을 ‘소우씨의 어가소동’과 ‘일본국대군호’를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당시 조일관계의 두 측면인 대마도와 막부정권의 상황을 보다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이전의 수업에서는 조일관계의 이중적인 구조를 살펴보고 그 속에서 대마도주의 역할을 공부했다면, 이 글을 통해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대마도주인 소우씨의 어가소동을 통해 소우씨가 조일 관계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과정과 그 속에서 도꾸가와정권이 취한 행동을 분석함으로써 조일관계의 본질에 한걸음 더 다가간 느낌이었다. 20여 년 전의 연구가 현재의 연구보다 조일 관계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바탕으로 객관적인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의 연구자들이 반성하고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한일 관계에 있어서 아직도 뜨거운 감자와 같은 독도 문제, 역사왜곡의 문제 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는 양국 모두가 ‘자민족중심주의’라는 독선과 허구성에 빠져서 상대방의 상황을 이해하거나 알아보려고 하지 않고 ‘우리가 무조건 옳고 그들은 틀리다.’는 식의 논리로 대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아라노 야스노리가의 ‘도꾸가와정권의 대군외교체제’와 같은 연구는 그 학문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국제관계에 있어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자세를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국제관계에 있어서 ‘우리가 무조건 옳고 그들은 틀리다.’는 식의 논리는 더 이상 설득적이지 않다. 상대방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선행되지 않고는 우리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전개할 수 없으며 감정에 북받친 우기기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상대방에 대한 무조건 적인 적대감과 근원을 알 수 없는 민족적 우월감을 버리고 올바른 태도로 그들에 대응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일본에서는 소우씨의 사송선만이 부산에 내항하고, 조선에서는 통신사가 도일하고, 역관이 대마도에 파견되는 변칙적인 사절왕래의 형태가 형성되었다.
- 조선통신사의 도일
도꾸가와 정권 시기에 조선통신사는 전후 12회에 걸쳐 도일했다. 그 중 초기 3회는 「회답겸환쇄사」로 조선은 조선인포로의 쇄환을 직접 사절을 파견하여 목적을 달성하려했고, 일본의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대일본정책의 방침을 세우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일본의 요구에 응함으로써 남방의 정세를 안정시키려고 하였다.
도꾸가와 정권에 있어서 조선통신사 도일의 의미는 국내적으로 어례 떠는 입공으로 위치시켜서 조선이 도꾸가와 정권의 무의에 복속하고 있다고 꾸미고, 자기권력을 조선유구도란다 등에 의해 형성된 화이의식의 중심에 두고, 도꾸가와권력이 일본의 통치권과 외교권의 실권자인 것을 과시하려 하였다.
조선통신사일행이 부산포를 출발하면서부터 귀국할 때까지의 경비는 모두 일본 측에서 부담하고 있었다. 후에 조선과 일본 양국의 재정난에 빠지만서 일조외교체제의 유지가 관란하게 되었고, 양국을 내습한 서구열강의 동아시아 진출에 의한 대외적 위기의 구체화가 이 외교체제의 붕괴를 촉진시켰다.
- 조선역관의 대마래방
통신사와는 별도로 조선에서 대마에 외교사절로서 역관이 파견되었다. 역관의 종류는
① 통신사도일 떼에 실무상의 제문제를 협의 하는 외교문제에 관한 것
② 도꾸가와가의 ★★에 관한 것
③ 소우씨의 경조에 관한 것이 있다.
이들을 접대하는 경비는 모두 대마번에서 부담했다. 이후 대마번은 재정이 악화되어 막부로부터 재정을 원조 받게 되었다.
- 수우씨가 조선에 보낸 외교사절
조선에 가는 소우씨의 선박은 아시카카시대 이래의 전토에 의해 반드시 사송선의 형식을 취했다. 즉 선박마다 외교사절을 세우는데 외교사절은 항상 소우씨의 도서를 받은 서류를 휴대하며, 서계를 받을 사람에 대한 대진을 가지고 조선에 갔다. 이들 선박은 대개가 봉진 이외에도 공★역품을 실었기 때문에 사송선인 동시에 무역선이었다.
2) 대마번의 조선무역
- 조선무역의 막번제적 특질
① 도꾸가와정권의 무역정책통화정책과 나가사끼무역에 직접영향을 받는 구조를 갖고 있다.
② 소우씨의 가역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
③ 소우씨의 지행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
- 막부의 대마번에 대한 재정원조
막부로부터 재정원조를 끌어내는 대마번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① 대마번은 소지행으로 조선을 견제하는 임무를 부담하였고 그 때문에 분수에 맞지 않는 가신단을 갖고 있었다.
② 과대한 군역에 대한 지행의 부족분은 조선 무역에서 보충하였고, 따라서 조선무역은 지행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③ 조선 무역의 쇠퇴는 지행의 삭감과 같아서, 지행이 삭감되면 군역을 유지하기 힘들다.
④ 군역이 어렵게 된다는 것은 대마번만의 문제가 아니라 막부권력의 권위에도 관계된 문제이다.
막부는 기본적으로 대마번의 주장을 인정하였고 그 때문에 대마번은 독자적으로 무역진흥에 노력해야 했다. 대군외교체제는 중세 이래 통교의 실적을 가진 소우씨를 매개로 하여 비로서 성립된 체제이기 때문에 소우씨를 전봉하여 바꿀 수 없었다. 이는 조선과의 국교단절을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막부는 대군외교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소우씨를 존속시켜야 했고 소우씨를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재정원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4. 나오며
이 글은 일본인 학자인 아라노 야스노리가 1987년에 도꾸가와정권의 대군외교체제를 연구한 글이다. 여기서는 도꾸가와 장군이 스스로의 국제적 호칭을 ‘일본국대군’으로 설정함으로써 자기를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를 재편성해가는 것과 소우씨와 야나가와씨의 갈등을 해결 하는 과정에서 소우씨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소우씨를 도꾸가와정권의 강력한 통제하에 두고 자신들의 외교방침을 관철시키고 있는 측면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이 연구 이후에 이루어졌던 조일 관계에 대한 한일 양국의 연구들은 자신의 문화적 우수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자문화 중심주의에 빠져 조일관계를 제대로 보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 글은 1980년대의 글이고 일본인 학자가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연구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도꾸가와정권의 대군외교체제의 성립과정을 ‘소우씨의 어가소동’과 ‘일본국대군호’를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당시 조일관계의 두 측면인 대마도와 막부정권의 상황을 보다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이전의 수업에서는 조일관계의 이중적인 구조를 살펴보고 그 속에서 대마도주의 역할을 공부했다면, 이 글을 통해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대마도주인 소우씨의 어가소동을 통해 소우씨가 조일 관계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과정과 그 속에서 도꾸가와정권이 취한 행동을 분석함으로써 조일관계의 본질에 한걸음 더 다가간 느낌이었다. 20여 년 전의 연구가 현재의 연구보다 조일 관계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바탕으로 객관적인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의 연구자들이 반성하고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한일 관계에 있어서 아직도 뜨거운 감자와 같은 독도 문제, 역사왜곡의 문제 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는 양국 모두가 ‘자민족중심주의’라는 독선과 허구성에 빠져서 상대방의 상황을 이해하거나 알아보려고 하지 않고 ‘우리가 무조건 옳고 그들은 틀리다.’는 식의 논리로 대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아라노 야스노리가의 ‘도꾸가와정권의 대군외교체제’와 같은 연구는 그 학문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국제관계에 있어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자세를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국제관계에 있어서 ‘우리가 무조건 옳고 그들은 틀리다.’는 식의 논리는 더 이상 설득적이지 않다. 상대방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선행되지 않고는 우리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전개할 수 없으며 감정에 북받친 우기기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상대방에 대한 무조건 적인 적대감과 근원을 알 수 없는 민족적 우월감을 버리고 올바른 태도로 그들에 대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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