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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고 항복하는 반란군을 모두 파묻어 죽임으로써 백성들의 울분을 키웠다. 이에 따라 반란군의 활동도 더욱 격력해졌다. 616년 5월 민중군의 위협이 절박해지자 양제는 몇몇 관료만을 낙양에 남겨둔 채 대부분의 조정관료들과 함께 강남의 강도로 피신했다. 이후 반란군들은 몇 개의 대 새력으로 통합되어 각각 황제나 왕을 칭하면서 패권쟁탈전을 벌였다. 낙양에서는 이밀, 하북에서는 두건덕, 강회에서는 두복위와 서원랑, 유주에서는 나예, 하동에서는 유무주, 하서에서는 양사도와 아궤, 농서에서는 설거, 양자강 중류에서는 임사홍과 소선이 황제나 천자를 자칭하고 패권다툼에 뛰어들었다. 중원평원에서 치열한 패권전쟁이 벌어졌지만 정작 대세를 장악하고 새로운 통일왕조를 창업하여 황제로 군림하게 된 사람은 사태를 관망하던 관롱의 귀족출신 이연이었다. 이연은 617년 5월 태원에서 기병하고, 7월에 관중으로 출정한 뒤 겨우 4개월 만인 11월에는 장안을 점령하여 관중 전체를 확보했다. 양제가 강남에서 우문화급에게 살해되자 618년 4월 선양형식을 빌려 황제로 즉위하고 당을 건국했다.624년 두건덕의 부하 유흑달이 두차례에 걸쳐 완강한 저항을 벌이다가 패함으로써 수말의 농민반란은 종식되고 당의 통일 제국이 완성되었다. 백성들은 원래 생존권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봉기하여, 마침내 정권을 수립하고 패권을 다투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그들의 반란은로부터 시작된 대동란은 그들의 삶의 터전을 죽음의 세계로 만들었으며 대동란전과 후의 인구비교를 하면 전체인구의 2/3가 유실되었다.
다섯 번째로는 안록산의 난을 살펴보면 시기는 755년 유목민족 출신으로 화북지방의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처에서 이에 호응하여 화북지방의 대부분이 8년대동란의 소용돌이에 빠진 것이다. 배경을 보면 당나라 전기의 군사제도는 주로 수도권 방위를 위한 부병체제였고, 주변 이민족의 위협에 대해서는 이이제이의 기미정책으로 대처한다는 것이 기본 틀이었다. 기미정책이란 통일국가를 완성한 수와 당나라가 풍부한 물자를 미끼로 이민족의 내분을 조장하여 서로 견제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민족들이 통일국가를 건설하여 당나라를 위협하자 변경에 야전군편성이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그 위협이 장기화되자 야전군을 상설화시켰는데 이 야전군의 지휘관이 절도사였다. 또 당시 사회는 대토지 소유가 성행하여 자립 소농민층은 토지를 상실하고 유민이 되었으므로 세금을 징수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동북방 지방에서 18만여 명의 군사력을 거느리며 대군벌이 된 안록산은 당나라 정권을 위협할 만한 거대세력이었다. 안록산은 755년 11월 15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간신 양국충을 제거한다’는 구실로 수도장안을 향해 진격했다. 당의 장안을 지키기 위해 요세인 동관에 방어진을 쳤고, 배후에서는 하북태수 안진경과 그의 형 안고경, 곽자의, 이광필등이 의병을 일으켜 반군을 교란했으므로 한때 전황은 교착상태에 빠졌지만 이듬해 6월 가서한이 이끈 방위군이 대패하여 동관이 함락되고 이어서 수도 장안도 무너졌다. 이에 현종은 서쪽의 파촉으로 피신했는데 피난도중에 양국충은 살해되고 양귀비도 목을 매달아 죽였다. 현종은 곧 퇴위하고 황태자 이형이 즉위하여 숙종이 되었다. 반란군 내에서는 일시 당나라에 항복한 사사명이 758년 다시 반기를 들고 스스로 제위에 오른 뒤 안경서를 죽이고 낙양을 점령했다. 그러나 사사명도 761년 2월 그의 아들 사조의에게 살해되었으며, 사조또한 763년 1월 위글군대에게 패배하여 자살함으로써 8년간의 대전란은 종결되었다. 755년 11월부터 763년 1월까지 8년에 걸친 대전란은 당나라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는데 첫째로 당나라의 저
다섯 번째로는 안록산의 난을 살펴보면 시기는 755년 유목민족 출신으로 화북지방의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처에서 이에 호응하여 화북지방의 대부분이 8년대동란의 소용돌이에 빠진 것이다. 배경을 보면 당나라 전기의 군사제도는 주로 수도권 방위를 위한 부병체제였고, 주변 이민족의 위협에 대해서는 이이제이의 기미정책으로 대처한다는 것이 기본 틀이었다. 기미정책이란 통일국가를 완성한 수와 당나라가 풍부한 물자를 미끼로 이민족의 내분을 조장하여 서로 견제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민족들이 통일국가를 건설하여 당나라를 위협하자 변경에 야전군편성이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그 위협이 장기화되자 야전군을 상설화시켰는데 이 야전군의 지휘관이 절도사였다. 또 당시 사회는 대토지 소유가 성행하여 자립 소농민층은 토지를 상실하고 유민이 되었으므로 세금을 징수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동북방 지방에서 18만여 명의 군사력을 거느리며 대군벌이 된 안록산은 당나라 정권을 위협할 만한 거대세력이었다. 안록산은 755년 11월 15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간신 양국충을 제거한다’는 구실로 수도장안을 향해 진격했다. 당의 장안을 지키기 위해 요세인 동관에 방어진을 쳤고, 배후에서는 하북태수 안진경과 그의 형 안고경, 곽자의, 이광필등이 의병을 일으켜 반군을 교란했으므로 한때 전황은 교착상태에 빠졌지만 이듬해 6월 가서한이 이끈 방위군이 대패하여 동관이 함락되고 이어서 수도 장안도 무너졌다. 이에 현종은 서쪽의 파촉으로 피신했는데 피난도중에 양국충은 살해되고 양귀비도 목을 매달아 죽였다. 현종은 곧 퇴위하고 황태자 이형이 즉위하여 숙종이 되었다. 반란군 내에서는 일시 당나라에 항복한 사사명이 758년 다시 반기를 들고 스스로 제위에 오른 뒤 안경서를 죽이고 낙양을 점령했다. 그러나 사사명도 761년 2월 그의 아들 사조의에게 살해되었으며, 사조또한 763년 1월 위글군대에게 패배하여 자살함으로써 8년간의 대전란은 종결되었다. 755년 11월부터 763년 1월까지 8년에 걸친 대전란은 당나라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는데 첫째로 당나라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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