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2. 강화천도의 결행과 叛民들의 동향
3. 천도 뒤의 諸施策과 그 결과
4. 맺음말
2. 강화천도의 결행과 叛民들의 동향
3. 천도 뒤의 諸施策과 그 결과
4. 맺음말
본문내용
화경에서 최씨일문은 실로 온갖 사치와 향략을 누리면서 영구 집권을 꾀하였다. 그러나 강화경은 최의가 죽임을 당하고 무인최씨정권이 몰락하자 호화스럽던 자태가 곧 퇴락해지기 시작하였다.
4. 맺음말
강화천도의 반대자는 많았었다. 반대자들의 의견과 입장을 요약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천도를 단행하여 백성들을 적의 예봉 앞에 내어 맡길 것이 아니라, 信과 禮를 다한 우리의 외교적 교섭으로서 몽고의 재침을 방지토록 하자는 것.
둘째, 개경은 태조이래로부터 당시에 이르기까지 지켜왔기 때문에 성벽이 견고하고 兵食이 풍족하므로 충분히 적을 방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같은 의견과 입장은 최이의 천도강행의 위압아래에서 표명타진된 것이다.
최이를 비롯한 문무관료들과 왕까지 개경을 떠나 강화경으로 들어가 버리자, 어사대 조예 이통이 경기 초적과 성중 노예 및 여러 절의 승도 등으로 연합군을 조직해서 개경의 수호를 결의하고 반기를 들었다. 이것은 이들 모두가 천도를 반대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강화천도의 반대자가 위와 같이 압도적 다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최이는 개경의 수성책이 입안되어 있지 않다는 명분을 내세워 천도를 기어이 강행해 버렸다.
최이가 천도를 강행하게 된 요인 중에는 몽병의 재침을 방어할 묘책이 없었던 것 밖에, 초적과 지방 반민들의 저항활동이 더욱 활발해 지자 여기에 더 큰 불안을 느꼈던 것이 포함되어야 될 것이다.
천도 후 무인최씨정권은 초적을 비롯한 지방반민들의 직접적인 위협을 받지 아니했다. 이들은 강화경에 많은 재화를 축적해 두고 환락의 세계에서 안주해 왔다. 그러나 본토에 남아 있었던 각 도의 군현민-산성이나 해도에 입보하고 있던 주민까지 모두가 전쟁이 장기화함에 따라 식랴의 부족과 적의 야만적인 살육약탈 속에서 온갖 고초와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원종 11년 5월 23일 재추들이 모여 환 復都舊京을 단행케 함으로써 강화경시대는 그 막을 내리고 개경시대가 다시 열렸다. 그러나 몽병들이 그 동안 할퀴고 간 상처는 너무나 컸다. 살육과 포로 등으로 인한 인명 손실 뿐 아니라 많은 재화의 약탈 특히 우마 등 가축의 상실은 당시 농민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었다.
강화천도가 단행되지 않고, 전 고려민이 일체가 되어 항몽전에 참여해서 몽병을 퇴치했더라면, 이들의 살육약탈로부터 고려의 군현민들이 입었던 손실은 어느정도 줄일 수 있었을 것이고, 이들의 약탈 지배가 장기화할 수 없었을 것으로 믿는다.
4. 맺음말
강화천도의 반대자는 많았었다. 반대자들의 의견과 입장을 요약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천도를 단행하여 백성들을 적의 예봉 앞에 내어 맡길 것이 아니라, 信과 禮를 다한 우리의 외교적 교섭으로서 몽고의 재침을 방지토록 하자는 것.
둘째, 개경은 태조이래로부터 당시에 이르기까지 지켜왔기 때문에 성벽이 견고하고 兵食이 풍족하므로 충분히 적을 방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같은 의견과 입장은 최이의 천도강행의 위압아래에서 표명타진된 것이다.
최이를 비롯한 문무관료들과 왕까지 개경을 떠나 강화경으로 들어가 버리자, 어사대 조예 이통이 경기 초적과 성중 노예 및 여러 절의 승도 등으로 연합군을 조직해서 개경의 수호를 결의하고 반기를 들었다. 이것은 이들 모두가 천도를 반대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강화천도의 반대자가 위와 같이 압도적 다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최이는 개경의 수성책이 입안되어 있지 않다는 명분을 내세워 천도를 기어이 강행해 버렸다.
최이가 천도를 강행하게 된 요인 중에는 몽병의 재침을 방어할 묘책이 없었던 것 밖에, 초적과 지방 반민들의 저항활동이 더욱 활발해 지자 여기에 더 큰 불안을 느꼈던 것이 포함되어야 될 것이다.
천도 후 무인최씨정권은 초적을 비롯한 지방반민들의 직접적인 위협을 받지 아니했다. 이들은 강화경에 많은 재화를 축적해 두고 환락의 세계에서 안주해 왔다. 그러나 본토에 남아 있었던 각 도의 군현민-산성이나 해도에 입보하고 있던 주민까지 모두가 전쟁이 장기화함에 따라 식랴의 부족과 적의 야만적인 살육약탈 속에서 온갖 고초와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원종 11년 5월 23일 재추들이 모여 환 復都舊京을 단행케 함으로써 강화경시대는 그 막을 내리고 개경시대가 다시 열렸다. 그러나 몽병들이 그 동안 할퀴고 간 상처는 너무나 컸다. 살육과 포로 등으로 인한 인명 손실 뿐 아니라 많은 재화의 약탈 특히 우마 등 가축의 상실은 당시 농민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었다.
강화천도가 단행되지 않고, 전 고려민이 일체가 되어 항몽전에 참여해서 몽병을 퇴치했더라면, 이들의 살육약탈로부터 고려의 군현민들이 입었던 손실은 어느정도 줄일 수 있었을 것이고, 이들의 약탈 지배가 장기화할 수 없었을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