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 리 말
Ⅱ. 보불전쟁의 배경
Ⅲ. 보불전쟁의 원인
Ⅳ. 보불전쟁의 경과
Ⅴ. 보불전쟁의 결과
Ⅵ. 맺음말
Ⅱ. 보불전쟁의 배경
Ⅲ. 보불전쟁의 원인
Ⅳ. 보불전쟁의 경과
Ⅴ. 보불전쟁의 결과
Ⅵ. 맺음말
본문내용
맺게 된다. 이는 당시 발칸반도를 둘러싼 오스트리아, 러시아 사이의 대립을 염두에 둔 이중적인 외교 전략이다. 프랑스에 대한 견제와 더불어, 발칸 반도를 둘러싼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대립하게 될 경우에 독일은 결국 한 국가의 편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두 나라 모두 동맹국으로 계속 유지할 것을 비스마르크는 결심하게 되었다 정상수, “비스마르크의 외교정책 1870/71-1878/79”, 서양사연구, Vol.26, No.1, 2000, p63
. 이후에도 비스마르크는 보불 전쟁의 알자스-로렌 합병으로 인한 침략전쟁의 성격을 망각시키기 위해 국제 정세를 이용한 외교적 노력을 계속 수행해야만 했다.
Ⅵ. 맺음말
이상과 같이 보불전쟁의 양상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 전쟁을 통하여 프랑스는 제정의 몰락을, 독일은 제정을 성립하는 어떻게 보면 상반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결과만 본다면 달리기 계주를 하던 선수가 다음 선수에게 바통을 터치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정치적 시스템이나 시민, 민중들의 정치적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프랑스는 역시 독일을 앞서고 있다. 독일 제국 성립 후에 구성된 독일의 통치 구조를 살펴보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프랑스와는 달리 민중들에 의해 절대 권력을 행사하던 왕정이 무너진 적도 없고, 혁명에 성공의 경험이 없는 독일의 민중들이 통일을 과연 주도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비스마르크가 주도한, 즉 위로부터의 독일 통일인 이상, 그 후 분배과정에서는 서민들은 소외되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대신 민중들은 비스마르크가 불러일으킨 민족주의에 선동당하여 비스마르크가 그의 철혈정책을 수행하는데 힘을 실어주는 역할은 한 것이다.
반면 프랑스는 민중들이 정부의 형태를 선택할 수 있는-1871년의 선거 결과가 보여 주듯이 비록 자신들의 의사를 올바르게 관철시킬 수 있는 의식은 아직 부족한 듯 보이지만-자신들이 정부를 선택할 수 있다는 의식적인 각성을 한 상태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이데올로기를 가진 집단들을 지원한다거나 반대하는 등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는 보불 전쟁이후, 제정의 몰락이후, 프랑스가 갈 수 있는 정치적인 제도에 있어서 한정되지 않고, 고를 수 있는 개방성이 존재했다고 본다.
그러나 독일의 민중들은 이런 선택을 할 수 없었다. 독일 제국의 성립 이후, 그들은 분열되었던 독일 내 민족들이 합쳐진 데에 대한 감정, 즉 민족주의적 감정을 계속 지닌 채였고, 이는 통치자에게 있어서는 통치하기에, 선동하기에 아주 용이한, 멀리 내다보면 제국주의적 팽창의 욕심을 가지게 하는 아주 좋은 토양이 되었다. 보불 전쟁의 의의는 이 전쟁의 결과 독일이 통일되었다는 독일사에 있어서는 아주 중대한 사건이며, 유럽에서의 한축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전쟁 이후 독일 국민들이 개인의 자유 추구보다는 국가 혹은 민족의 한 일원으로서의 역할로 자신들의 위치를 인식하게 된다는 결과를 낳았다고 본다.
참고 문헌
1. Walter Schmidt외, 독일근대사, 강대석 역, 한길사, 1994
2. 앙드레 모로아, 프랑스사, 신용석 역, 기린원, 1997
참고 논문
1. 이주천,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와 19세기 독일 통일의 교훈”, 최고여성지도자과정 강의 논집, 2호, 2001
2. 김상규, “비스마르크의 독일통일(1871) : 국제 정치사적 연구”, 사회과학논총, 권25, 건국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2001
3. 강미현, “비스마르크시대 엘사스-로트링겐 병합정책”, 부산사학, Vol.4 , No1, 1998
4. 정상수, “비스마르크의 외교정책 1870/71-1878/79”, 서양사연구, Vol.26, No.1, 2000
. 이후에도 비스마르크는 보불 전쟁의 알자스-로렌 합병으로 인한 침략전쟁의 성격을 망각시키기 위해 국제 정세를 이용한 외교적 노력을 계속 수행해야만 했다.
Ⅵ. 맺음말
이상과 같이 보불전쟁의 양상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 전쟁을 통하여 프랑스는 제정의 몰락을, 독일은 제정을 성립하는 어떻게 보면 상반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결과만 본다면 달리기 계주를 하던 선수가 다음 선수에게 바통을 터치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정치적 시스템이나 시민, 민중들의 정치적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프랑스는 역시 독일을 앞서고 있다. 독일 제국 성립 후에 구성된 독일의 통치 구조를 살펴보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프랑스와는 달리 민중들에 의해 절대 권력을 행사하던 왕정이 무너진 적도 없고, 혁명에 성공의 경험이 없는 독일의 민중들이 통일을 과연 주도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비스마르크가 주도한, 즉 위로부터의 독일 통일인 이상, 그 후 분배과정에서는 서민들은 소외되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대신 민중들은 비스마르크가 불러일으킨 민족주의에 선동당하여 비스마르크가 그의 철혈정책을 수행하는데 힘을 실어주는 역할은 한 것이다.
반면 프랑스는 민중들이 정부의 형태를 선택할 수 있는-1871년의 선거 결과가 보여 주듯이 비록 자신들의 의사를 올바르게 관철시킬 수 있는 의식은 아직 부족한 듯 보이지만-자신들이 정부를 선택할 수 있다는 의식적인 각성을 한 상태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이데올로기를 가진 집단들을 지원한다거나 반대하는 등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는 보불 전쟁이후, 제정의 몰락이후, 프랑스가 갈 수 있는 정치적인 제도에 있어서 한정되지 않고, 고를 수 있는 개방성이 존재했다고 본다.
그러나 독일의 민중들은 이런 선택을 할 수 없었다. 독일 제국의 성립 이후, 그들은 분열되었던 독일 내 민족들이 합쳐진 데에 대한 감정, 즉 민족주의적 감정을 계속 지닌 채였고, 이는 통치자에게 있어서는 통치하기에, 선동하기에 아주 용이한, 멀리 내다보면 제국주의적 팽창의 욕심을 가지게 하는 아주 좋은 토양이 되었다. 보불 전쟁의 의의는 이 전쟁의 결과 독일이 통일되었다는 독일사에 있어서는 아주 중대한 사건이며, 유럽에서의 한축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전쟁 이후 독일 국민들이 개인의 자유 추구보다는 국가 혹은 민족의 한 일원으로서의 역할로 자신들의 위치를 인식하게 된다는 결과를 낳았다고 본다.
참고 문헌
1. Walter Schmidt외, 독일근대사, 강대석 역, 한길사, 1994
2. 앙드레 모로아, 프랑스사, 신용석 역, 기린원, 1997
참고 논문
1. 이주천,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와 19세기 독일 통일의 교훈”, 최고여성지도자과정 강의 논집, 2호, 2001
2. 김상규, “비스마르크의 독일통일(1871) : 국제 정치사적 연구”, 사회과학논총, 권25, 건국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2001
3. 강미현, “비스마르크시대 엘사스-로트링겐 병합정책”, 부산사학, Vol.4 , No1, 1998
4. 정상수, “비스마르크의 외교정책 1870/71-1878/79”, 서양사연구, Vol.26, No.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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