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저자 유진 피터슨
▣ Short Summary
▣ 차례
제1부 부활의 경이
1장_ 부활이 신앙생활의 중심이다
2장_ 복음서에 나타난 부활 이야기
3장_ 부활 이야기가 영성 형성에 주는 의미
4장_ 일터에 계신 하나님
제2부 부활의 식사
5장_ 평소처럼 그렇게 살라
6장_ 우리를 변화시키는 평범한 식사
7장_ 갈릴리에서의 부활 아침 식사
8장_ 식사에서 성찬으로
제3부 부활의 친구들
9장_ 전문가와 비전문가
10장_ 친구들과 함께
11장_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앎
12장_ 부활을 사는 신앙
▣ Short Summary
▣ 차례
제1부 부활의 경이
1장_ 부활이 신앙생활의 중심이다
2장_ 복음서에 나타난 부활 이야기
3장_ 부활 이야기가 영성 형성에 주는 의미
4장_ 일터에 계신 하나님
제2부 부활의 식사
5장_ 평소처럼 그렇게 살라
6장_ 우리를 변화시키는 평범한 식사
7장_ 갈릴리에서의 부활 아침 식사
8장_ 식사에서 성찬으로
제3부 부활의 친구들
9장_ 전문가와 비전문가
10장_ 친구들과 함께
11장_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앎
12장_ 부활을 사는 신앙
본문내용
계발이나 교회의 복음 전파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본연의 자부심과 자신감을 회복하는 일이다.
10장 친구들과 함께
바울 서신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애초부터 복음을 사람들의 삶에 뿌리내리게 만들고 또 계속 역사해 가도록 하는 사건이다. 부활에 관한 바울의 진술들은 대부분 예수님의 부활이 차지하는 중심적 위치나 죽은 자들 가운데서 우리가 부활할 소망의 확실성, 혹은 이 두 가지 전부를 강조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들 중 어떤 부활 관련 구절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지금 현재 계속되는 우리의 영적 성장과 관련되어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 미래의 부활이 아니라 현재적 의미의 부활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관심을 가지는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바울이 증언하는 한 가지 사실은 부활이 예수님에 관해 우리가 믿어야 할 교리적, 역사적 진리, 혹은 우리 자신의 미래에 관해 믿어야할 교리적, 종말론적 진리를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의 일차적 관심은 우리의 영성 형성, 곧 부활에 기초한 영성 형성에 있다. 이렇게 하여 바울 또한 우리가 복음서 기록들에서 만나는 부활 친구들의 무리, 그러니까 기독교적 영성 형성이란 본질적으로 부활의 실천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친구들 중 한 사람이 된다.
예수님의 부활은 서로를 너무도 잘 아는 친구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부활이란 서로 인격적으로 얽히는 법이 없는 불특정한 군중들 앞에서 일어나는 무슨 공연 같은 사건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를 다른 사람과 엮어 놓는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된다. 부활은 친구들 간의 유대관계를 형성해준다. 부활이 우리를 인도해 들어가는 곳은 서로가 서로를 의존하는 공동체다. 자기 자신을 더 이상 독자적인 존재로 생각할 수 없는 남자들, 여자들, 혹은 아이들의 공동체다. 하지만 이런 부활 공동체는 결코 획일적인 것이 아니다.
11장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앎
직접적이며 관계적인 방식 말고는 우리가 하나님을 영접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여기서 초연한 지성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된다. 황홀한 체험이나 환상 같은 것을 추구함으로써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통달할 수 있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고, 우리가 써먹을 수 있는 비인격적 힘도 아니며, 또 우리가 탐닉할 수 있는 개인적인 체험도 아니다. 그래서 부활에 근거한 영성 형성은 친밀하며 인격적인 경험일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부활을 깨닫고 거기 응답하면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역동적 관계 속으로 완전히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부활 친구들의 공동체 속에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이 조성되는 방식이다. 그래서 부활에 근거한 영성 형성은 친밀하며 인격적인 경험일 수밖에 없다. 우리들 쪽에서는 부활 친구들과의 친밀한 인격적 관계 속에, 그리고 하나님 편에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 속에 우리가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12장 부활을 사는 신앙
부활의 삶은 실천하는 것이다. 악보를 보고 피아노를 연습하거나 골프의 스윙을 연습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의사가 개업하여 의술을 시행한다고 말할 때처럼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실천을 말한다. 우리의 본질과 우리의 하루 일과를 전부 규정하는 그런 일이다. 우리가 부활을 실천한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부활을 경험한 친구들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친밀한 임재로 가득한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처럼 우리의 일상과 평범함을 조건으로 포괄적 의미의 기독교적 삶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실천적 영성의 회복이다. 그것은 수련회를 간다거나 강연회에 참석한다거나 혹은 특별한 집회에 가야만 실천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다. 우리 가정과 일터의 일상적 삶 속에서 실천되는 부활의 영성인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나타나시고, 알려지시며, 또 우리로 하여금 그 부활 속에 참여하게 하신다. 부활의 삶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은 살아서 지금 여기 계신다. 부활을 실천한다는 것은 이것을 알아채고, 그 속에 들어가 거기에 몰입하는 것이다.
부활의 삶을 실천하는 것, 곧 예수님을 살리셨고 또 지금 우리를 살리시는 성령을 존중하는 삶은 곧 어려움에 봉착한다. 이것은 대개 부활의 삶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생겨나는 경우가 많다. 부활의 삶을 얻게 된 우리들 중 어떤 이들은 곧바로 자신의 힘으로 그 삶을 움직이고 싶어 한다. 반면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이 부족하고 이처럼 고상하고 거룩한 일에는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들은 옛 습관을 따라 전문가를 부르기도 한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자기 힘으로 하려는 문화, 그리고 전문가에게 의존하는 문화 속에서 살아왔다. 이렇게 오래된 문화 속에서 강화된 습관과 전제를 깨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영혼으로서 우리의 본질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해답은 매우 분명하고 간단하다. 거룩한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우리가 받은 세례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다.
세례 의식 속에는 두 가지 명령이 암묵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모든 기독교 전통에 공히 해당되는 사항이다. 그리고 이해하기 어려울 것도 없다. 하지만 이 명령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것이 되려면 지속적인 관심과 훈련이 요구된다. 바로 ‘회개하라’와 ‘따르라’는 두 단어다. 회개는 부활에 의한 영성 형성이 부인하는 것을, 따름은 그것이 긍정하는 것을 가리킨다. 각 개인의 삶 속에서 이 두 낱말들은 공동체의 삶을 통해 변화하고 다양한 여건 속에서 구체화되어야 한다.
우리의 삶은 세례를 통해, 부활에 의해 규정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알고 그 삶이 알려지듯이 우리 또한 알고 알려진다. 여기가 우리의 출발점이다. 매일의 삶을 통해 항상 새롭게 행할 출발점인 것이다. 세례를 기억하라. 이 문제에 관한 한 우리는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칼 바르트가 끈질기게 주장했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초보자일 뿐이다.
10장 친구들과 함께
바울 서신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애초부터 복음을 사람들의 삶에 뿌리내리게 만들고 또 계속 역사해 가도록 하는 사건이다. 부활에 관한 바울의 진술들은 대부분 예수님의 부활이 차지하는 중심적 위치나 죽은 자들 가운데서 우리가 부활할 소망의 확실성, 혹은 이 두 가지 전부를 강조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들 중 어떤 부활 관련 구절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지금 현재 계속되는 우리의 영적 성장과 관련되어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 미래의 부활이 아니라 현재적 의미의 부활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관심을 가지는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바울이 증언하는 한 가지 사실은 부활이 예수님에 관해 우리가 믿어야 할 교리적, 역사적 진리, 혹은 우리 자신의 미래에 관해 믿어야할 교리적, 종말론적 진리를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의 일차적 관심은 우리의 영성 형성, 곧 부활에 기초한 영성 형성에 있다. 이렇게 하여 바울 또한 우리가 복음서 기록들에서 만나는 부활 친구들의 무리, 그러니까 기독교적 영성 형성이란 본질적으로 부활의 실천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친구들 중 한 사람이 된다.
예수님의 부활은 서로를 너무도 잘 아는 친구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부활이란 서로 인격적으로 얽히는 법이 없는 불특정한 군중들 앞에서 일어나는 무슨 공연 같은 사건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를 다른 사람과 엮어 놓는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된다. 부활은 친구들 간의 유대관계를 형성해준다. 부활이 우리를 인도해 들어가는 곳은 서로가 서로를 의존하는 공동체다. 자기 자신을 더 이상 독자적인 존재로 생각할 수 없는 남자들, 여자들, 혹은 아이들의 공동체다. 하지만 이런 부활 공동체는 결코 획일적인 것이 아니다.
11장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앎
직접적이며 관계적인 방식 말고는 우리가 하나님을 영접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여기서 초연한 지성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된다. 황홀한 체험이나 환상 같은 것을 추구함으로써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통달할 수 있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고, 우리가 써먹을 수 있는 비인격적 힘도 아니며, 또 우리가 탐닉할 수 있는 개인적인 체험도 아니다. 그래서 부활에 근거한 영성 형성은 친밀하며 인격적인 경험일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부활을 깨닫고 거기 응답하면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역동적 관계 속으로 완전히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부활 친구들의 공동체 속에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이 조성되는 방식이다. 그래서 부활에 근거한 영성 형성은 친밀하며 인격적인 경험일 수밖에 없다. 우리들 쪽에서는 부활 친구들과의 친밀한 인격적 관계 속에, 그리고 하나님 편에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 속에 우리가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12장 부활을 사는 신앙
부활의 삶은 실천하는 것이다. 악보를 보고 피아노를 연습하거나 골프의 스윙을 연습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의사가 개업하여 의술을 시행한다고 말할 때처럼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실천을 말한다. 우리의 본질과 우리의 하루 일과를 전부 규정하는 그런 일이다. 우리가 부활을 실천한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부활을 경험한 친구들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친밀한 임재로 가득한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처럼 우리의 일상과 평범함을 조건으로 포괄적 의미의 기독교적 삶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실천적 영성의 회복이다. 그것은 수련회를 간다거나 강연회에 참석한다거나 혹은 특별한 집회에 가야만 실천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다. 우리 가정과 일터의 일상적 삶 속에서 실천되는 부활의 영성인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나타나시고, 알려지시며, 또 우리로 하여금 그 부활 속에 참여하게 하신다. 부활의 삶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은 살아서 지금 여기 계신다. 부활을 실천한다는 것은 이것을 알아채고, 그 속에 들어가 거기에 몰입하는 것이다.
부활의 삶을 실천하는 것, 곧 예수님을 살리셨고 또 지금 우리를 살리시는 성령을 존중하는 삶은 곧 어려움에 봉착한다. 이것은 대개 부활의 삶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생겨나는 경우가 많다. 부활의 삶을 얻게 된 우리들 중 어떤 이들은 곧바로 자신의 힘으로 그 삶을 움직이고 싶어 한다. 반면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이 부족하고 이처럼 고상하고 거룩한 일에는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들은 옛 습관을 따라 전문가를 부르기도 한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자기 힘으로 하려는 문화, 그리고 전문가에게 의존하는 문화 속에서 살아왔다. 이렇게 오래된 문화 속에서 강화된 습관과 전제를 깨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영혼으로서 우리의 본질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해답은 매우 분명하고 간단하다. 거룩한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우리가 받은 세례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다.
세례 의식 속에는 두 가지 명령이 암묵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모든 기독교 전통에 공히 해당되는 사항이다. 그리고 이해하기 어려울 것도 없다. 하지만 이 명령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것이 되려면 지속적인 관심과 훈련이 요구된다. 바로 ‘회개하라’와 ‘따르라’는 두 단어다. 회개는 부활에 의한 영성 형성이 부인하는 것을, 따름은 그것이 긍정하는 것을 가리킨다. 각 개인의 삶 속에서 이 두 낱말들은 공동체의 삶을 통해 변화하고 다양한 여건 속에서 구체화되어야 한다.
우리의 삶은 세례를 통해, 부활에 의해 규정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알고 그 삶이 알려지듯이 우리 또한 알고 알려진다. 여기가 우리의 출발점이다. 매일의 삶을 통해 항상 새롭게 행할 출발점인 것이다. 세례를 기억하라. 이 문제에 관한 한 우리는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칼 바르트가 끈질기게 주장했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초보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