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한국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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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것이다. 그러나 불교계 한편에서의 지나친 친일성향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일본불교와 총독부의 불교정책에 대해 호감을 가져온 많은 불교인들이 무비판적으로 그것을 수용하고 식민정책에 적극 동조해 온 것이다.

3. 조계종의 출발 - 해방이후의 불교

신 불교운동과 불교 근대화 노력이 경주되는 한편에서 불교교단이 친일과 반일의 상반되는 모습을 드러냈던 것은, 불교계로서나 우리 민족에게 있어 다같이 불행한 시대적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교단발전을 위한 방안들이 끊임없이 모색되었다. 당시 선교양종이라는 종명에 의하여 합법적이고 통일적인 중앙통제기구를 갖고 있기는 하였으나, 그것이 전국 사찰의 의사를 전적으로 반영하여 이룩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선교양종 대신 보다 선명한 종명과 특징 있는 종지, 그리고 좀더 유기적이고 집약적인 중앙통제 체제가 여전히 요청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에서는 종헌을 비롯한 제 법규를 다시 제정하고 종내 최고의 원로기관인 교정과 의결기관으로서 종회 등을 설치하기도 하였으나 이 또한 오래가지 않았다. 보다 근본적인 개신(改新)을 위해서는 총본산 체제가 더욱 필요한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41년 봄에는 태고사(현 서울의 조계사)를 세워 총본산으로 삼고 종명은 조계종으로 결정하였다.

일제의 사찰령 이후 지금까지 조선불교 선교양종이라고 불리던 종명을 조계종이라고 한 것이다. 조계종이란 한국 재래 선종의 전통적인 명칭이었다. 신라 하대로부터 전래된 선법이 신라말 고려초에 이르면서 구산선문을 형성한 이래 그 총칭적인 종명으로 조계종이라 하였고, 그것이 고려일대를 거쳐 조선 초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여말선초에 11종 또한 7종이던 교단이 세종이후 선종과 교종의 2재 종파로 뭉쳐졌다가 연산군 및 중종 · 명종 이래 종명마저 없어져 왔지만, 사실에 있어서 조선 중기 이후의 승단계통은 법맥 상 선종이었으며 선맥은 엄밀히 말해서 조계종이었다. 이러한 역사의 과정을 상기할 때 조계종의 출현은 당연한 결과였다. 한국선종의 특유한 전통적 종명이었던 조계종으로 그 종의 이름을 되찾은 것이다.

이와 같은 종단을 통제하기 위하여 31본산 위에 전국 사찰을 통일적으로 총괄하는 총본산을 둔 것인데, 이에 1941년 4월에는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산 태고사 사법’의 인가를 얻었다. 조계종으로 발족한 종단에서는 제1대 종정(태고사 주지)에 방한암을 추대하고, 동년 6월부터 총본산 태고사 종무원에서 종무를 개시하였다. 이로써 한국불교는 조계종이라는 선명한 종명아래 총본산 태고사를 중심으로 하여 전국 승려가 총 결속할 수 있었다.

불교계가 이렇게 하여 최소한 그 외양 면에서나마 모처럼의 통합된 모습을 나타내보이고 있던 1945년 조국은 해방을 맞이하였다. 이에 조계종은 해방된 그 해 10월 전국승려대회를 열고, 일제의 사찰령과 지금까지의 조계종 총본산 태고사 사법 등을 폐지하고 새로운 조선불교 교헌을 제정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새 교헌을 제정하는 한편 교단의 초대 교정에 박한영을 추대하고, 중앙총무원장에는 김법린이 선출되었다. 이제 불교교단은 명실공히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한국불교로서 힘찬 발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때부터 한국불교 앞에는 다시 해결해야 할 무거운 과제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제 식민불교의 청산과 한국불교의 정통성 확립 등이 곧 그러한 과제들이었다. 여기에다 해방 이후 몇 년 동안 우리 사회에 거세게 불어 닥친 좌 · 우익의 사상적 대립과 알력은 불교계에도 그대로 파장이 미쳤고, 더구나 6.25전란을 겪으면서 대가람의 소실 등 전국사찰이 입은 피해는 다시 한 번 불교교단에 심대한 타격을 주어, 그 정신적 물적 복구 또한 벅찬 과제들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이토록 어려운 현실에 처해 있는 불교계 내부에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휴화산 같은 이슈들이 잠복하고 있었다. 일제 이후 새로운 의미로 쓰이게 된 이판 · 사판의 유별, 혹은 비구승 · 대처승 간에 문제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려하던 대로 마침내 6.25전쟁이 멈춘 뒤 오래지 않아 1956년경부터 세상을 경악케 하는 불교계의 분규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일은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정화로도 혹은 분규로도 불린다. 뿐만 아니라 그 원인에 대해서도 한국 불교의 순수한 전통으로의 회복운동과 그에 대한 반대 활동으로 파악하기도 하고 주도권 쟁탈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불교계의 기독교 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미 제국주의의 구조적인 문화침략에 의해 조장 · 반조되었다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그 원인이 어떻게 분석되든 간에 이로 인해 한국불교가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은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해방 이후로부터 최근까지도 계속되어온 종단의 분규에 대해서는 여기서 언급을 생략하거니와 역사과정 속에서 그 맥락을 찾는다면 이는 무엇보다도 근세 불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배불의 오랜 질곡 속에 있던 우리의 불교는 자율적 역량을 미쳐 갖출 겨를도 없이 근세에 진입하였다. 이 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일본불교였고, 그것이 식민통치하에서는 일제에 대한 야합과 투쟁이라는 양면성을 노출시키면서 불교발전을 위한 응집력의 분산을 가져 왔다. 결국 이러한 상황들이 해방 이후의 한국 불교에 직 · 간접으로 인관관계로서 표출되어온 것이다.

이상과 같이 1천 6백여 년의 역사를 이어온 한국불교는 힘찬 창조와 진전의 시기가 있었는가 하면 때로 답습과 침체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대한불교 조계종을 비롯하여 20여개 종단을 헤아리는 오늘의 한국불교는 민족정신과 문화를 선도해 온 오랜 역사와 전통에 대한 자부심으로 새로운 내일을 열어가고 있다. 복잡 다양한 현대사회 속에서도 전통적인 수행의 가풍을 그대로 유지해 가고 있는 한국 사원의 생활이나, 불교에 대한 일반의 새로운 인식과 불교 신자층의 증가, 그리고 정치 · 사회 · 교육 · 문화 등 사회 각 분야에 걸친 불교적 기능과 역할의 확대 등을 통해, 우리는 다시 밝아오는 한국 불교의 여명을 느낄 수 있다.

키워드

불교,   소승,   대승
  • 가격3,500
  • 페이지수75페이지
  • 등록일2007.08.05
  • 저작시기2007.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23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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