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례의 역사와 과정
본 자료는 5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해당 자료는 5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5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머리말> 혼례의 유래와 역사

<본론>
1. 조선시대 혼례의 절차
1) 서류부가혼
2) 친영례
3) 반친영
2. 친영논쟁
1) 조선 초기 친영례의 도입
2) 조선중기 친영논쟁
3) 조선 후기 혼례의 변화와 서류부가혼의 잔존
3. 납폐와 예장의 폐단
4. 이혼과 재혼
1) 재가금지법의 제정
2) 조선시대의 이혼

<맺음말>
현대 혼인의 의미

본문내용

를 잘 섬기지 못함은 불효의 표현이고, 둘째, 가계를 계승할 아들을 낳지 못함은 가계의 존속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셋째 부정한 음적 행위는 가계 계승에 따르는 혈통의 순결성과 남편의 독점욕에 반대되는 행위라 한 것이고, 넷째, 질투하는 것은 처첩을 두고 생활하는데 있어서 방해물이 되는 것이며, 다섯째, 나병, 간질병 등은 자식의 번창에 해로운 것이며, 여섯째, 말이 많은 것은 가족생활에서 불화와 이간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며, 일곱째,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그 가문의 명예를 손상하는 일이 된다.
‘삼불출’이란 이혼하지 못하는 세 가지 조건이다. 앞에서 칠출에 해당되는 사유가 있다 하더라도 삼불출에 해당하는 사유가 있으면 이혼하지 못했다.
1. 시부모를 위하여 3년상(喪)에 복(服)한 경우
2. 혼인 당시에는 비천했는데 후에 부귀하게 된 경우
3. 처가 이혼당한 후에 돌아갈 집이 없는 경우
여기에서 보면 세 가지 조건은 대가족제도의 정신에 따라 당연히 있어야 할 도의상의 요구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칠출삼불출을 살펴보면 조선 여성들이 이혼의 공포에 시달렸어야 했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이혼이 거의 허락되지 않았다. 재가가 금지된 상황에서 이혼녀가 많아지면 이는 곧 사회문제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양반집 남편들은 형식적으로는 부부로 생활하지만 실제로는 남남처럼 지내는 소박이라는 형태로 이혼을 했고 축첩이 허용되던 당시의 관습을 이용, 마음에 드는 여자를 후처로 맞아 살았다.
여성은 남편이 의절 처의 조부모, 부모를 때리거나 처의 외조부, 백숙부모, 형제, 고모, 자매를 죽였거나 장모와 간통한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을 범했거나 집을 떠나 행방도 모른 채 3년 이상 지났을 때, 남편에게 뼈가 부러질 정도로 심하게 구타를 당했을 경우 이혼소송이 가능했다. 그러나 사대부 여성은 재혼이 불가능했고 사회, 경제적 활동도 없었기 때문에 거의 이혼을 신청하지 못했다.
이혼 문제에 미친 대가족 제도의 영향
조선의 가부장제적 대가족 제도하의 결혼과 이혼은 단지 당사자들의 문제만인 것이 아니라 먼 조상으로부터 계승하여 온 전 가족에 관계되는 문제였다. 가계 존속을 중시하는 가족제도 하에서 가족의 전체 성원들은 가장의 엄격한 통솔 아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가계를 존속시키는 일에 온 마음을 기울인다. 그러므로 남편이 아무리 처를 사랑한다 해도 그의 부모가 싫어하여 이혼을 명령하면 이에 복종해야 했고, 그와는 반대로 그가 아무리 처를 싫어한다 해도 그 처가 시부모를 잘 섬기고 또 시부모가 며느리를 좋아하는 경우에는 이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조선 시기의 법적 이혼 원인인 칠출에서도 부모를 섬기는 문제를 첫 자리에 놓았던 것이다.
이 칠출의 사유 중에는 남편의 행위를 규제하는 조목이 하나도 없으며 오직 여성의 행위만을 하나하나 규제하였는데 역시 철저한 여성의 예속적 지위를 말해 주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이혼 규제는 양반에게만 강력하게 적용되었고 민간에서는 이른바 합의이혼도 있었다. 이것은 부부가 불화로 인하여 더는 부부 생활을 계속할 수 없다고 생각되면 서로 자기의 사정을 토로하고 이혼하는 것을 말하는데, ‘할급휴서(割給休書)’ 혹은 ‘사정파의(事情罷議)’라고도 한다. ‘할급휴서’란 혼서지(婚書紙)를 절반으로 쪼개어 이혼하거나 혹은 윗적삼 옷고름을 잘라 이혼의 뜻을 표시하는 것이며 ‘사정파의’는 이혼하지 않으면 안 될 사정에 놓였을 때, 부부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이혼 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이야기하고 서로 승낙하는 것을 말하지만 이를 종용하는 남편의 요구를 거절하면 자동적으로 버림받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합의를 가장한 강제이혼이었다.
맺음말- 현대 혼인의 의미
혼례는 우리 생활의 몇 가지 통과 의례 중에서 가장 의의가 큰 행사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혼례는 젊은 두 남녀가 만나 부부가 되고 새로운 가정을 이루어 나가는 절차로서 개인에게 있어 자신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혼례는 사적인 행사로서 가풍과 지역적 관습이 전달되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지만 사회적으로도 큰 의의를 담고 있다. 사회적으로 보면 혼례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회적 현상 혹은 문화적인 단면을 볼 수 있는 사회상으로서 그 시대 사람들의 가치, 규범 등이 혼례를 통해 표출되기도 하며, 경제적인 상황이 드러나기도 하고 또한 전통적인 문화가 계승되는 것이기도 하다.
혼례는 이와 같이 개인적,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경제적으로 많은 의미를 가진 통과의례임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치러지는 혼례는 본래의 의미는 퇴색된 채 자기과시, 과대소비, 축재의 기회로 삼는 등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의 세태이다.
‘人倫之大事’라고 하는 혼례는 배우자 선택에서부터 의례절차, 의례비용 등에 있어 신중한 결정을 하여야 하는데 이때 그 결정은 무엇보다도 혼인 당사자와 부모의 가치관, 소신 그리고 사회적 의식에 기초를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자본주의와 경쟁사회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 사람들은 혼례의 본뜻보다는 허례허식으로 자신을 실제보다 더 과대하여 표현하고자 하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더욱이 급속한 경제성장에서 비롯된 문화 지체현상으로 사람들은 가치관의 혼란을 겪으며 이러한 현상이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데 자신의 뚜렷한 소신을 갖지 못하고 시류(時流)에 따라 그대로 흘러가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제 3자적 입장에서 볼 때는 혼례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막상 자기가 혼례의 당사자가 되면 남들과 똑같이 시류에 따라 하고 있는 것이다.
혼인의 의미는 성장한 남녀가 만나 동반자 관계를 형성하고,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부부로서의 책임을 다져 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결혼식이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혼인을 축하해주는 이들이 모여 축복받는 결합이 됨을 함께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이해관계에 의한 결합이나 과시, 허례 등은 혼인문화에서 배제되어야 한다고 본다.
참고문헌
- 조선 시대 혼례제도의 변천과 성격, 한만영
- 중종대의 친영논쟁과 조선 중기 혼례제도의 변화, 한만영
- 조선민족혼인사연구, 박경휘
- 네이버 백과사전
  • 가격2,500
  • 페이지수17페이지
  • 등록일2007.11.03
  • 저작시기2007.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35129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