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주 이상룡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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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너무나도 달랐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간의 대립으로 인한 임시정부의 내분도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이에 크게 낙담한 이상룡은 임정 국무령직을 사임하고 서간도로 돌아왔다. 서간도로 돌아온 그는 1928년 5월,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만이라도 통합을 이루기 위해 대표적 독립운동 조직인 정의부와 참의부 및 신민부의 삼부통합운동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1931년 9월 만주사변으로 만주 지역을 장악한 일제가 1932년 3월에 만주국을 수립함으로써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졌다. 그는 그해 5월에 길림성 서란 소성자에서 병을 얻어 그렇게 바라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외세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더욱 힘써 목적을 관철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영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의 공로를 높이 사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3장. 석주 이상룡에 대한 평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희곤 소장(안동대 교수)은 이상룡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고 한다.
“석주 이상룡은 1910년 만주로 망명해 조선인의 삶과 항쟁의 터전을 만들었다. 이들은 유교적 시각에서 이념을 해석하고 수용하려 했다. 공산주의를 공자가 말한‘대동세’로 이해하려 했다. 독립이 우선이고, 이념은 도구일 뿐이었다. 안동 전통양반가의 후손이었지만 만주족과 충돌하지 않으려고 중국옷을 입고 머리를 깎을 정도로 유연했다.”
또한, 충남대학교 이성우 교수님은 이상룡에 대해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대표적인 안동유림으로 의병전쟁, 계몽운동, 망명 후 해외독립운동기지를 건설했던 대표적인 유학자자 할 수 있지요. 성리학적 명분질서에 얽매이지 않고 대한협회에 참여하고 안동지역 교육 사업에도 참여했던 분입니다. 안동유림의 해외독립운동 건설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분이라고 할 수 있죠.”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대표적인 가문을 꼽으라고 하면 이회영, 이상룡, 허위의 세 가문을 꼽을 수가 있다. 이번에 조사하고 공부한 석주 이상룡 집안은 직계 삼대 외에도 아우와 조카까지 합쳐 아홉 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거의 전 가족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고 할 수 있다.
나 개인적인 평가로는 그의 사상이 어떻고 민족의식의 본질이 어떻다는 것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 범인이 근접할 수 없는 그러한 업적을 세운 것만으로도 높게 평가 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서간도 지역의 독립군 기지와 한민족의 터전을 만든 개척자로서 상해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 또한 만주 독립군 세력들 간의 통합을 추구했던 중도 민족주의자로서 노력을 높이 사며 혁신 유림으로서 그의 업적이 어떠한지 발표 자료를 만들면서 알 수 있었다.
참고문헌
채영국 - 서간도 독립군의 개척자 이상룡의 독립정신
한신대 안건호 - 이상룡과 사회진화론 (http://kr.blog.yahoo.com/sockokyu/1470882.html)
석주 이상룡의 삶과 자취
1858년 11월 24일 아버지 승목과 어머니 안동 권씨의 장남으로 태어남. 출생지는 안동시 법흥동 20의 임청각(보물 제 182호)
1871년 사서를 비롯한 모든 경서를 두루 공부하였고, 과거 시험 공부를 시작함.
1872년 의성김씨 도사진린의 장녀인 우락과 혼인.
1873년 부친상을 당함.
1876년 조부의 명을 받들어 서산 김흥락 문하에서 수학.
1886년 봄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탐관오리들의 부패로 인해 낙방하자 전국을 유람한 뒤 귀 향하여 학문에만 전념.
1894년 조부 상을 당함. 나라의 어지러움을보고 장래를 대비하여 도곡으로 이사하여 병법 연구에 몰두함.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당하고, 단발령 등으로 안동의 인사들이 이상룡의 외숙인 성대 권 세연을 대장으로 의병을 일으키자 그 자신은 할아버지의 상중이었으나 이에 참여 함.
1905년 일제의 을사늑약 강압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의병을 일으킬 목적으 로 매제인 박경종, 차성충 등과 가야산에 의병기지 구축
1907년 신식교육기관인 협동학교 설립운동에 앞장섬
1909년 2월에 의병활동을 했다하여 안동경찰서에 구굼되었으나 지역주민들의 항의로 풀려 남. 석방된 후 3월부터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설립하여 애국계몽운동 시작.
1910년 일제에 의해 한국이 병탄되자 친일파 송병준, 이용구 등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림.
1911년 1월 50여 가구를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
4월 서간도 최초의 한인 자치단체이자 독립운동 기관인 경학사를 유하현 추가가에 설립해 사장에 선출.
1912년 통화현 합니하에 경학사에 이은 서간도 두 번째 자치기관인 부민단을 설립해 단장 에 취임
1913년 <대동역사>를 저술해 민족교육기관이자 무관학교인 신흥학교 교재로 사용.
1918년 김좌진, 김동삼 등과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독립전쟁을 선포함.
1919년 독립운동기관인 한족회를 설립하여 회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군사기관인 서로군정서를 설립해 독판에 취임.
1920년 일제의 대병력이 서북간도를 침입해오자 서로군정서 사령관인 지청천에게 군사들을 이끌고 북만주로 이동하도록 함. 서로군정서 부대 이동 중 북간도의 독립군들과 연 합해 청산리대첩에 참전함.
1921년 북경으로 가 방용만, 신숙 등과 군사통일회의를 개최하여 항일무장 세력의 통합을 위해 노력함.
1923년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김동삼, 이진산, 배천택 등을 서간도 대표로 파 견함.
1924년 남만주 항일운동을 총괄할 정의부 설립. 이상룡은 노구로 이 단체의 어떤 직책도 맡지 않았으나 조직의 방향을 제시할 큰 어른으로 받들어 짐.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에 선출.
1926년 국무령 사임
1928년 만주를 침입한 일본군들이 이상룡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근접해오자 사집창 파려 하로 이주하고 손자인 병화를 남만청년총동맹의 간부로 보냄.
1932년 광복을 달성하기 전까지는 내 유골을 조국으로 가져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중 국 길림성 서란현에서 서거.
1938년 하얼빈 동취원창으로 유해 이장.
1990년 유해 환국하여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
1996년 유해 서울 동작구의 국립묘지 임정요인묘역으로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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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8.03.03
  • 저작시기2007.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4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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