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유명한인물들에관한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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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f1의 황제 미하엘 슈마허

2. 독일 테니스 영웅 보리스 베커

3. 독일 과학자들

4. 독일의 시성과 예술계의 거목들

본문내용

상을 떠나게 되며 그 이후 바그너의 가족은 라이프치히에서 드레스덴으로 거처를 옮긴다. 바그너는 소년시절에 드레스덴 극장에서 연주되었던 베버의 "마탄의 사수"를 보고 감명을 받으며, 특히 바그너 자신도 한번 지휘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바그너는 벌써 13살나이로 호프만(E.T.A. Hoffmann)과 섹스피어(W. Shakespeare)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며 그 결과 김나지움 학창시절(1828부터 라이프치히에 있는 김나지움을 다님)에 로이발트(Leubald)라는 드라마를 만든다. 물론 이시기에 나타나는 바그너의 작품들은 아직 천재성이 들어있다고 보기에는 너무 이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 그의 능력이자 성격일지도 모르지만 - 이러한 그의 어설픈 어린 시절의 작품들은 중간에 중단되지 않고 계속 작업되어 끝을 맺었다는 것에 어느 정도는 의미가 있다(예를 들어 후에 바그너의 주요작품인 "니벨룽의 반지"는 거의 26년에 걸쳐 완성된다). 끈기와 인내로서 노력한 몇 년의 세월들은 바그너를 능력있는 예술가로서 승격시킨다. 그러나 바그너는 김나지움의 학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결국 1830년 부활절을 기하여 니콜라이 학교를 떠나게 되며, 그 이후 1831년 2월까지 토마스 학교에 다시 편입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결국 대학 입학시험도 보지 못한 채 음악을 공부하기 위하여 라이프치히 대학에 지원을 시도해 본다. 다행이도 바그너는 대학입학시험을 보지 않고도 그 대학에서 음악학도로서 공부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게 되어 정식학생으로서 등록하게 된다. 이 시기에 특히 바그너는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였던 테오도르 바인리크(Thedor Weinlig)의 제자가 된다.
1833년부터 바그너는 본격적인 음악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1842년까지는 여러 도시를 방랑하는 젊은 오페라 카펠마이스터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바그너가 카펠마이스터로서 각도시에서 활동했을 때 생성된 것으로 낭만적 오페라인 "요정들" (Die Feen 1833-1834, Wurzburg)을 비롯하여 코믹오페라 "사랑의 금지" (Liebesverbot 1834-1836, Magdeburg), 비극적 그랜드오페라 "리엔치" (Lienzi 1838-1840, Riga/Paris)를 들 수 있다.
바그너는 1836년 11월에 여배우 민나 플라너(Minna Planer)와 결혼을 한다. 결혼한 이 두 사람은 1839년 9월에 런던으로 향하며, 거기서 다시 파리로 향하는데, 이 때부터 이들은 1842년까지 계속 파리에서 거주하게 된다. 파리에서의 생활은 바그너에게 많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역경을 가져다 준 시기였지만 다른 면에서는 그에게 문학적 그리고 음악적인 성장을 가져다 준 계기라고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바그너는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수많은 문학가와 예술가들과의 접촉을 가질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그곳에서 리스트(Franz Liszt)와의 만남은 그에게 아주 중요한 음악적 삶의 밑걸음이 된다. 바그너는 우선 미완성된 "리엔치"를 1840년에 파리에서 완성하고, 1841년에는 자신의 시와 음악으로 만들어진 낭만적 오페라 "방황하는 화란인"(Der fliegende Hollander)을 작곡한다.
1843년 1월 2일에 "방황하는 화란인"이 드레스덴에서 초연되자마자 바그너는 그 해 2월부터 1849년까지 드레스덴의 궁정 카펠마이스터로 임명된다. 이 시기는 바그너가 절정기에 도달하는 낭만적 오페라를 작곡한 때인데, 즉 "탄호이저"(Tannhauser 1842-1845)와 "로엔그린"(Lohengrin 1845-1848)이 그것이다. 1846년 4월에는 바그너가 처음으로 베토벤의 제9번교향곡을 지휘하기도 하는데, 베토벤에 대한 바그너의 존경심과 그의 음악적인 영향은 훗날에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바그너는 1849년에 36살의 나이로 드레스덴에서 일어났던 5월혁명에 가담하게 되어 지명수배에 오르게 되며, 이에 따라 그는 스위스의 취리히로 망명을 하게 된다.
1849년부터 1858년까지 지속되었던 취리히에서의 망명생활에서 바그너는 창작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미래의 예술작품"(Das Kunstwerk der Zukunft 1849)과 "오페라와 드라마"(Oper und Drama, 1851)를 비롯한 많은 저서들과 연속 4부작 시리즈 "니베룽겐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에 속하는 "라인의 황금"(Das Rheingold)과 "발퀴레"(Die Walkure) 등의 음악극(Musikdrama)이 만들어지는데, 이는 기존의 낭만적 오페라와는 구분되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을 의미한다.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 1862 - 1918)
클림트는 고귀한 명분속에 교묘히 숨겨졌던 에로티시즘이라는 주제를 세상밖으로 내놓은 최초의 화가였다. 그에 대한 당시의 비난은 당연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의 상품화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제 현대사회에서 에로티시즘은 사회와 문화전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슈로서 자리잡았다.
우리는 부정적으로 왜곡 되지 않은 건강한 성문화, 건강한 에로티시즘은 그 사회에 건전한 문화성을 부여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에로티시즘의 횃불을 드높인 클림트의 관능의 이브들은 우리에게 당당히 말하는 듯하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은 대부분 거의 우리가 알고 있는 아르누보라는 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아르누보란 전통으로부터 이탈된 자연형태에서 새 양식의 창조를 지향한 장식적이며 탐미적인 예술양식이다. 아르누보양식의 작가들은 모든 역사적인 양식을 부정하고 자연형태에서 모티프를 빌려 새로운 표현을 얻고자 했으며 특히, 덩굴풀이나 담쟁이 등 식물의 형태를 연상하게 하는 유연하고 유동적인 선과, 파상(波狀)·곡선·당초무늬[唐草文] 또는 화염(火焰)무늬 형태 등 특이한 장식성을 자랑했고, 유기적이고 움직임이 있는 모티프를 즐겨 좌우상칭(左右相稱)이나 직선적 구성을 고의로 피하여 곡선·곡면의 집적(集積)에 의한 유동적인 미를 추구했다. 이러한 양식의 대표적인 화가는 오늘날에는 뭉크와 툴루즈 로트렉과 에곤 실레, 알퐁소 무샤 등이 있다..

키워드

보리스,   황제,   슈마허,   베커
  • 가격2,000
  • 페이지수14페이지
  • 등록일2007.12.24
  • 저작시기2007.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44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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