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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바다로 변하게 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지만, 미국이 제3차 대전을 무릅쓰고 대항할 것인지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당시의 정보판단에 의하면, 인천 서울지역의 적세력은 모두5천명 내지1만 명 정도로 약간 과소평가 되고 있었다. 특히 상륙지점인 인천자체엔 아몬드 장군이 말했듯이 경미하게 방어된 해안으로서, 이른바 '최악의 상륙가능 해안'이라 할만했다.
북한군 소속의2개 서해안방어연대가 배치되어있고, 76미리와 106미리포로 장비된 2개해안포대가 해안방어에 임하고 있다는 정도가 상륙직전의 정보 보고였다. CHROMITE작전계획에 포함된 상륙기동부대의 임무는 다음과 같았다.
* 인천항탈취 및 해안교두보선 확보
* 신속전진 및 김포비행장 점령
* 수도 서울점령 확보
* 서울의 북, 북동, 그리고 동쪽 차단진지 점령
* 인천 서울을 점령한 군사력이 철상(ANVIL)이 되고 북상하는 제8군이 망치가 되어 공산 군 을 타격.
맥아더는 본 작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제7합동기동부대(JTF-7)를 편성했는데 상륙작전교리에 따라 제7함대사령관인 스터러블제독이 본 작전에 참가하는 모든 해군과 상륙군을 총지휘하는 합동기동부대 사령관이 되고, 상륙군으로 해병 제1사단과 육군 제7사단을 제10군단으로 편성했는데 알몬드 장군이 군단장을 맡았다. 합동기동부대의 편성은 인상적이었다. 71,339명의 한 미 육해군 및 해병대 장병과 7개국의 해군함정 230척뿐만 아니라, 34척의 일본 LST까지 참여하였다. 그러나 지원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항공지원세력으로서 함재기와의 미공군부대는 기동편성에 포함되지 않았다. D일전작전으로서는 진남포와 군산 그리고 주문진에대한 함포사격에 이은 양동 및 양공작전이 실시되었고, 2일간에 걸쳐 치열한 함포사격과 항공폭격이 인천항에 집중되었다 이는 과거 태평양전쟁당시의 경험에 비추어 5일간의 공격준비지원화력의 필요성도 거론되었으나, 합동기동부대 사령관의 결심에 따라 2일로 결정된 것이다.
드디어 1950년 9월 15일 미해병제5연대 제3대대가 배속된 한국해병 1개중대와 함께 상륙주정에 전재한 다음 5시 40분에 월미도로 향발했다. 기동함대 기함에서는 맥아더와 주요지휘관 및 참모들이 쌍안경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월미도일대는 포연에 쌓여 잘볼수없었다. 제1파가'녹색해안'에 상륙한 것은 6시 31분이었다. 뒤이어 6시 59분에는 대대 예비대까지 상륙이 끝났다. 월미도에 배치된 적은 인민군 제226독립연대 예하의 1개중대와 918연대 예하의 1개포대로서 총병력은 400명 정도였다. 적의 저항은 경미하였고 포로 136명에 적시체 180구를 확인하는 전과를 단번에 올렸으나 아군의 피해는 부상17명에 지나지 않았다
대대장의 상황보고가 기함인 메킨리호에 탑승하고있는 맥아더에게 전달되자, 그는 다음과 같이 격찬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해군과 해병은 오늘 아침보다 더 찬란하게 빛난 적이 없다." 제1단계 상륙은 성공하였으나 오후 만조시간의 제2단계상륙은 주력부대의 본격적인 상륙으로서 인천 북방고지대를 끼고있는 암벽지대인"적색해안'에 제5연대가, 남쪽의 부두를 끼고있는 '청색해안'에 제1연대가 상륙하며 예비대인 한국해병 제1연대가 역시 청색해안에 상륙하도록 함안이동계획이 짜여져 있었다.
D일 오후 5시31분에 예정대로 상륙주정으로 적색해안에 도착한 제5연대는 사전에 준비해간 알루미늄 사닥다리를 이용하여 상륙에 성공하였고, 청색해안은 평탄한 해안조건인바 제1연대가 수륙양용차를 타고 해안깊숙히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뒤이어 예비대가 상륙하여 해안을 정리하자 30분 후에 LST가 접안하여 보급품을 양육하기 시작하였다. 우려했던 타라와 상륙작전의 재판은 아니었다. 미해병 제2사단이 태평양전쟁시 상륙했던 타라와에서는 상륙 초일 1500여명의 사상자를 낸 최악의 상륙이었던데 비하면 인천 상륙작전은 초일 전사21명에 전상175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일몰시각까지의 짧은 시간 내에 적의 반격을 무릅쓰고 3000톤에 달하는 상륙군의 보급품이 양육되고 상륙한 3개연대가 적포화 유효사정권 밖으로 진격하여 해안교두보선을 확보함으로서 야간 진지보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급조된 해병사단이지만 그 요원들은 모두 제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역전의 상륙작전 베트랑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12일 후에는 치열한 격전 끝에 서울을 탈환할 수 있었고, 북한군은 병참선이 차단된 상황 하에서 제10군단과 제8군의 양익포위공격에 압착섬멸당하고, 반신불수가 되어 38도선 북쪽으로 도주하였다. 전세는 역전되고 말았다.
북한군 소속의2개 서해안방어연대가 배치되어있고, 76미리와 106미리포로 장비된 2개해안포대가 해안방어에 임하고 있다는 정도가 상륙직전의 정보 보고였다. CHROMITE작전계획에 포함된 상륙기동부대의 임무는 다음과 같았다.
* 인천항탈취 및 해안교두보선 확보
* 신속전진 및 김포비행장 점령
* 수도 서울점령 확보
* 서울의 북, 북동, 그리고 동쪽 차단진지 점령
* 인천 서울을 점령한 군사력이 철상(ANVIL)이 되고 북상하는 제8군이 망치가 되어 공산 군 을 타격.
맥아더는 본 작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제7합동기동부대(JTF-7)를 편성했는데 상륙작전교리에 따라 제7함대사령관인 스터러블제독이 본 작전에 참가하는 모든 해군과 상륙군을 총지휘하는 합동기동부대 사령관이 되고, 상륙군으로 해병 제1사단과 육군 제7사단을 제10군단으로 편성했는데 알몬드 장군이 군단장을 맡았다. 합동기동부대의 편성은 인상적이었다. 71,339명의 한 미 육해군 및 해병대 장병과 7개국의 해군함정 230척뿐만 아니라, 34척의 일본 LST까지 참여하였다. 그러나 지원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항공지원세력으로서 함재기와의 미공군부대는 기동편성에 포함되지 않았다. D일전작전으로서는 진남포와 군산 그리고 주문진에대한 함포사격에 이은 양동 및 양공작전이 실시되었고, 2일간에 걸쳐 치열한 함포사격과 항공폭격이 인천항에 집중되었다 이는 과거 태평양전쟁당시의 경험에 비추어 5일간의 공격준비지원화력의 필요성도 거론되었으나, 합동기동부대 사령관의 결심에 따라 2일로 결정된 것이다.
드디어 1950년 9월 15일 미해병제5연대 제3대대가 배속된 한국해병 1개중대와 함께 상륙주정에 전재한 다음 5시 40분에 월미도로 향발했다. 기동함대 기함에서는 맥아더와 주요지휘관 및 참모들이 쌍안경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월미도일대는 포연에 쌓여 잘볼수없었다. 제1파가'녹색해안'에 상륙한 것은 6시 31분이었다. 뒤이어 6시 59분에는 대대 예비대까지 상륙이 끝났다. 월미도에 배치된 적은 인민군 제226독립연대 예하의 1개중대와 918연대 예하의 1개포대로서 총병력은 400명 정도였다. 적의 저항은 경미하였고 포로 136명에 적시체 180구를 확인하는 전과를 단번에 올렸으나 아군의 피해는 부상17명에 지나지 않았다
대대장의 상황보고가 기함인 메킨리호에 탑승하고있는 맥아더에게 전달되자, 그는 다음과 같이 격찬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해군과 해병은 오늘 아침보다 더 찬란하게 빛난 적이 없다." 제1단계 상륙은 성공하였으나 오후 만조시간의 제2단계상륙은 주력부대의 본격적인 상륙으로서 인천 북방고지대를 끼고있는 암벽지대인"적색해안'에 제5연대가, 남쪽의 부두를 끼고있는 '청색해안'에 제1연대가 상륙하며 예비대인 한국해병 제1연대가 역시 청색해안에 상륙하도록 함안이동계획이 짜여져 있었다.
D일 오후 5시31분에 예정대로 상륙주정으로 적색해안에 도착한 제5연대는 사전에 준비해간 알루미늄 사닥다리를 이용하여 상륙에 성공하였고, 청색해안은 평탄한 해안조건인바 제1연대가 수륙양용차를 타고 해안깊숙히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뒤이어 예비대가 상륙하여 해안을 정리하자 30분 후에 LST가 접안하여 보급품을 양육하기 시작하였다. 우려했던 타라와 상륙작전의 재판은 아니었다. 미해병 제2사단이 태평양전쟁시 상륙했던 타라와에서는 상륙 초일 1500여명의 사상자를 낸 최악의 상륙이었던데 비하면 인천 상륙작전은 초일 전사21명에 전상175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일몰시각까지의 짧은 시간 내에 적의 반격을 무릅쓰고 3000톤에 달하는 상륙군의 보급품이 양육되고 상륙한 3개연대가 적포화 유효사정권 밖으로 진격하여 해안교두보선을 확보함으로서 야간 진지보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급조된 해병사단이지만 그 요원들은 모두 제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역전의 상륙작전 베트랑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12일 후에는 치열한 격전 끝에 서울을 탈환할 수 있었고, 북한군은 병참선이 차단된 상황 하에서 제10군단과 제8군의 양익포위공격에 압착섬멸당하고, 반신불수가 되어 38도선 북쪽으로 도주하였다. 전세는 역전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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