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더스 문명] 인더스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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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더스 문명] 인더스 문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시가 좀 더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것인지도 모른다. 예컨데 이전에 아라비아해 연안에 위치하고 있었던 인더스 문명의 몇몇 항구도시는 현재 해안에서 50킬로미터 정도의 지점에 있다. 북부에 있어서 인더스 문명의 소멸에 대해서는 이러한 설명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이 지역에서의 인더스 문명에 대한 최후의 일격은 갑작스럽고 격심한 것이었다. 일부 역사학자의 추측에 의한다면, 급소를 찌른 것은 기원전 2000년기의 중반 무렵 중앙아시아로부터 인도 북서부의 평원에 밀려 들어온 키가 크고 피부색이 흰 유목민이다. 그들은 이 지방일대를 휩쓸고 다니며, 자기들의 것보다 훨씬 고도한 문화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들 유목민은 그 이후의 인도 역사가 가야할 길을 정했다. 침입자들은 스스로를 아리아인 (고귀한 자란는 뜻)이라고 불렀다. 이 명칭은 오래전에 사여된 인도-유럽어에서 유래된 듯하다. 인도-유럽어에는 밀접한 관계를 지닌 몇몇 방언으로 발달해 있었던 것인데, 기원전 2000년경, 중앙 아시아의 초원 지대에서 이동하기 시작한 엄청난 수의 민족이 사용하고 있던 언어이다. 그들 유목 생활을 영위하는 여러 부족 중에서 일부는 소아시아와 페르시아에 정착했고, 일부는 그리스인의 조상이 되었다. 수백년의 세월에 걸쳐 인도에 도달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아리아인은 그들 전체를 대표하는 민족이었던 듯 여겨진다. 아리아인은 인도 북서부를 단숨에 통과하여 동쪽으로 전진, 펀쟈브 지방으로 들어가, 그 곳에서 그 후 수백년에 걸쳐 계속되는 생활양식을 전개한다. 그들 간에는 부족 사이의 싸움이 일상 다반사이며, 비아리아계 사람들을 정복, 또는 종속시킬 필요가 있을때만 일시적인 동맹을 맺었다. 이러한 동맹 중의 어떤 것은 인더스 문명을 구축한 사람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결정된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공격에 즈음하여 아리아인은 말이 끄는 경쾌한 이륜 마차를 타고, 덜커덩거리는 우차 이상으로 빠르고 기동성이 있는 탈 것은 볼 일이 없는 민족에게 달려 들었다. 인더스 문명 여러 도시의 방비를 굳힌 성새까지도 아리아인의 포위와 공격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다. 침입 민족이 가장 오래된 기록에는 그 정복과정이 서술되어 있는데, 적인 피부가 검은 비아리아인이 살고 있던 곳을 푸르(성채), 그리고 자신들의 전쟁의 신을 푸람아라(성채의 파괴자)라고 부르고 있다. 일부 고고학자는 이런 성채들 중 아리아인이 하리.유푸야라고 기록한 것이 인더스 문며의 대도시 하랍파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기도 하다. 정복민족은 인더스 유역 전체에 걸쳐 그 곳에 성립되었던 고도한 도시 문명을 멸하게 되었다. 아리아인은 유목민이었으므로, 식량도 의복도 소에서 얻고 있었다. 암소와 황소의 소가 그들의 부의 척도였다. 이윽고 그들도 농경에 종사하기 시작했으나, 인간의 격은 곡물의 수확량이 아니라 가축의 수로 결정된다는 그들의 신념은 변하지 않았다. 이러한 민족이 복잡한 도시 문화를 유지 또는 이해할 수 있을 까닭이 없다.문자, 공예, 미술, 건축 등의 인더스 문명의 광채와 업적은 아리아인에 의해 멸망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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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0.14
  • 저작시기2008.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85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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