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여는 말
Ⅱ. 그물에 걸린 신화들
Ⅲ. 신화를 남긴 상처들
Ⅳ. 닫는 말
Ⅱ. 그물에 걸린 신화들
Ⅲ. 신화를 남긴 상처들
Ⅳ. 닫는 말
본문내용
시키지 않으려고 했다. 말더듬이들의 자기 방어적인 일단의 회피전략인 것이다. 그러나 유정이 술을 먹었거나 방송을 할 때 ‘야담이나 고담식’으로 또는 ‘시골 오입장이적 어조’로 좌석을 번쩍 들었다 놓을 정도로 이야기를 했다는 것도 이 회피전략의 단계중 하나이었다. 유정은 평소와 다른 말투로 자신의 장애를 감추는 책략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스스로 틀어막은 언어의 마개를 열어 음성언어가 아닌 문자언어를 통해 호흡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그의 문학행위로 나타난 것이다. 그는 말을 퍼내려고 했고, 생각을 퍼내려고 했고, 마침내 사랑과 삶을 퍼내려고 했다. 그것이 그의 생활이자 생명의 연장선 위에 놓이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의 문학행위는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투쟁행위였던 것이다. 유정의 문체 특징의 하나인 어휘들의 풍요함과 그 적절한 선택과 시적인 표현, 리듬감을 타는 구연체적 서술들, 이야기 구조의 입체화 등은 바로 그의 생존과 직결된 숨막히는 투쟁의 전리품들이었던 것이다.
한편 유정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농투성이 우직하고 바보스런 인간들에게 가졌던 끝없는 관심과 애정과 자기 동일시는 바로 일상에서 일탈된 언어장애자로서의 자신의 아픔이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지적으로 일탈된 일상적 삶의 장애자들의 그것과 그대로 합치된 것에 있었다. 그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유정과 말더듬―그의 평생의 짐이었던 불행은 오히려 그의 문학을 풍성하게 하고 그를 축복받은 작가의 자리에 올려 세웠다. 유정은 자신의 인간적인 결함을 오히려 그의 문학적 성공의 요인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B. 칼과 모순의 수용
유정의 작품에서 가장 흔하게 보이는 것이 모순된 관념의 공존이다. 남편과 잘살기 위해서 몸을 파는 아내들―산골 나그네의 나그네는 병든 걸인 남편의 겨울 옷을 위해 위장결혼하여 새 남편의 새 옷을 훔쳐낸다. 소낙비의 춘호 처는 남편에게 매나 맞지 않고 잘 살기 위해 이주사에게 몸을 판다. 가을의 복만이 처는 농사 빚을 감당하지 못하는 남편을 위해, 만무방의 기호 처는 남편의 장사 밑천을 위해 팔려간다. 정조의 행랑어멈은 주인남자를 유혹하여 고뿌술집 차릴 200원돈을 뜯어내고, 아내의 남편도 잘살아보려고 아내를 술장수시킬 훈련을 시킨다. 이들은 모두 아내팔기 모티브의 반복이며 명목상 이들의 행위는 남편과 가족을 위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아내들은 열녀가 되기 위해 불열녀의 길―모순의 삶을 택하며 이때 남편들은 동조하거나 방관한다. 이들 외에도 살기 위해 자기 논의 벼를 자신이 훔쳐야 하는 만무방의 응오, 가난이 싫어서 자신의 다리를 자해하면서 금을 훔쳐내오는 금의 덕순, 아버지를 사랑하면서도 아버지에게 갖은 패악을 저지르는 형의 형, 동생을 사랑하면서도 동생을 괴롭히는 따라지, 연기, 생의 반려의 누님과 그 누님을 증오하면서도 누님을 떠나지 못하는 동생들은 모두 모순된 삶을 그대로 포용한다.
유정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이들 모순의 태도는 부분적이기는 하나 이미 선각들에 의해 지적된 바 있다. 한상무는 김유정이 ‘인간체험의 대조 또는 모순의 면상에 대한 거의 기질적이라 이를 만한 각별한 관심과 흥미’를 드러냄에 주목하고 유정이 ‘인간체험의 대조, 또는 모순의 양면을 동시에 지향하는 삶의 의미에 대한 확실성을 탐구하지 않은 반어적 관점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여기서 삶의 의미에 대한 확실성의 탐구란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다른 하나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는 唯一性의 문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유정의 선택은 양가적이다. 유정은 있는 그대로의 모순된 삶의 증언일 뿐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는 것이다. 김상태는 유정문체의 특징 중 하나로 이중의 비젼―이중의 부정어법을 주목한다. 그리고 유정의 이런 이중부정법의 애용은 바로 사물을 앰비발렌트한 관점에서 보고 있는 그의 정신적 자세에서 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유정의 이와 같은 앰비발렌트한 관점, 대조 또는 모순의 양면을 동시에 지향하는 삶의 자세는 어디에서 기인된 것일까. 김유정 사후 발표된 그의 자전적 소설 형에 다음과 같은 부분이 나온다.
아버지가 형님에게 칼을 던진 것이 정통을 때렸으면 그 자리에 엎퍼질 것을 요행 몸을 비켜서 땅에 떨어질 제 나는 다르르 떨었다. 이것이 십오 성상을 지난 묵은 기억이다. 마는 그 인상은 언제나 나의 가슴에 새로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열살 미만에 목격했던 아버지와 형의 불화가 절정에 이른 순간 벌어졌던 일이다. 그렇게도 효성이 지극했던 형이 여학생 첩살림을 차리면서 갑자기 불량해지기 시작했고, 그런 아들을 향해서 아버지가 던진 것은 부자 절연을 위한 증오와 응징의 칼날이었다. 그러나 유정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재산을 지키려던 아버지를, 아버지의 재산을 써야만 하는 형을 양면에서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효자와 불효를 동일시하는 나의 관념의 모순도 이때 생긴 것’이라고 증언한다.
유정이 휘문고보를 다닐 때 만취한 유정의 형님은 “네 이놈 칼을 받을 터이냐?” “네 이놈 주먹을 받을 터이냐?”라고 했다 물론 유정은 주먹을 받았다. 아버지의 칼은 장남에게로 유전되었다.
그는 술을 마시면 집안 세간을 부수고 도끼를 들고 기둥을 팼다. 그리고 가족들을 일일이 잡아가지고 폭행을 하였다. 비녀쪽을 두발로 잡고 그 모가지를 밟고 서서는 머리를 뽑았다. 또는 식칼을 들고는, 피해 달아나는 가족들을 쫓아서 행길까지 맨발로 나오기도 하였다. (필자 밑줄)
자식에게 본능적 애정을 느끼면서도 재산을 지키기 위해 아들을 향해 아버지가 내던진 증오의 ‘칼’, 철저한 악인도 아니면서 인간의 얼굴과 야수의 심정으로 한길까지 뛰어나와 가족들을 위협하던 형님의 ‘칼’을 유정은 기억한다. 아버지의, 형님의 모순은 유정에게 또한 유전된다. 그는 학생 신분으로 연상의 기생이며 남편 있는 명창 박녹주에게 혈서(혈서는 변형된 유정이 또다른 ‘칼’이다)를 보내고, 박녹주의 집으로 찾아가 결혼을 강요하고 또 협박한다. 그는 박녹주에게 사랑을 구걸하면서 사랑의 거절에 그녀를 증오한다. ‘칼’에서 비롯된 모순된 관념이 유정의 일생을 지배하는 것이다. 이선영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형을 향해 칼을 던지던 그 순간의 섬
한편 유정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농투성이 우직하고 바보스런 인간들에게 가졌던 끝없는 관심과 애정과 자기 동일시는 바로 일상에서 일탈된 언어장애자로서의 자신의 아픔이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지적으로 일탈된 일상적 삶의 장애자들의 그것과 그대로 합치된 것에 있었다. 그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유정과 말더듬―그의 평생의 짐이었던 불행은 오히려 그의 문학을 풍성하게 하고 그를 축복받은 작가의 자리에 올려 세웠다. 유정은 자신의 인간적인 결함을 오히려 그의 문학적 성공의 요인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B. 칼과 모순의 수용
유정의 작품에서 가장 흔하게 보이는 것이 모순된 관념의 공존이다. 남편과 잘살기 위해서 몸을 파는 아내들―산골 나그네의 나그네는 병든 걸인 남편의 겨울 옷을 위해 위장결혼하여 새 남편의 새 옷을 훔쳐낸다. 소낙비의 춘호 처는 남편에게 매나 맞지 않고 잘 살기 위해 이주사에게 몸을 판다. 가을의 복만이 처는 농사 빚을 감당하지 못하는 남편을 위해, 만무방의 기호 처는 남편의 장사 밑천을 위해 팔려간다. 정조의 행랑어멈은 주인남자를 유혹하여 고뿌술집 차릴 200원돈을 뜯어내고, 아내의 남편도 잘살아보려고 아내를 술장수시킬 훈련을 시킨다. 이들은 모두 아내팔기 모티브의 반복이며 명목상 이들의 행위는 남편과 가족을 위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아내들은 열녀가 되기 위해 불열녀의 길―모순의 삶을 택하며 이때 남편들은 동조하거나 방관한다. 이들 외에도 살기 위해 자기 논의 벼를 자신이 훔쳐야 하는 만무방의 응오, 가난이 싫어서 자신의 다리를 자해하면서 금을 훔쳐내오는 금의 덕순, 아버지를 사랑하면서도 아버지에게 갖은 패악을 저지르는 형의 형, 동생을 사랑하면서도 동생을 괴롭히는 따라지, 연기, 생의 반려의 누님과 그 누님을 증오하면서도 누님을 떠나지 못하는 동생들은 모두 모순된 삶을 그대로 포용한다.
유정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이들 모순의 태도는 부분적이기는 하나 이미 선각들에 의해 지적된 바 있다. 한상무는 김유정이 ‘인간체험의 대조 또는 모순의 면상에 대한 거의 기질적이라 이를 만한 각별한 관심과 흥미’를 드러냄에 주목하고 유정이 ‘인간체험의 대조, 또는 모순의 양면을 동시에 지향하는 삶의 의미에 대한 확실성을 탐구하지 않은 반어적 관점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여기서 삶의 의미에 대한 확실성의 탐구란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다른 하나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는 唯一性의 문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유정의 선택은 양가적이다. 유정은 있는 그대로의 모순된 삶의 증언일 뿐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는 것이다. 김상태는 유정문체의 특징 중 하나로 이중의 비젼―이중의 부정어법을 주목한다. 그리고 유정의 이런 이중부정법의 애용은 바로 사물을 앰비발렌트한 관점에서 보고 있는 그의 정신적 자세에서 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유정의 이와 같은 앰비발렌트한 관점, 대조 또는 모순의 양면을 동시에 지향하는 삶의 자세는 어디에서 기인된 것일까. 김유정 사후 발표된 그의 자전적 소설 형에 다음과 같은 부분이 나온다.
아버지가 형님에게 칼을 던진 것이 정통을 때렸으면 그 자리에 엎퍼질 것을 요행 몸을 비켜서 땅에 떨어질 제 나는 다르르 떨었다. 이것이 십오 성상을 지난 묵은 기억이다. 마는 그 인상은 언제나 나의 가슴에 새로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열살 미만에 목격했던 아버지와 형의 불화가 절정에 이른 순간 벌어졌던 일이다. 그렇게도 효성이 지극했던 형이 여학생 첩살림을 차리면서 갑자기 불량해지기 시작했고, 그런 아들을 향해서 아버지가 던진 것은 부자 절연을 위한 증오와 응징의 칼날이었다. 그러나 유정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재산을 지키려던 아버지를, 아버지의 재산을 써야만 하는 형을 양면에서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효자와 불효를 동일시하는 나의 관념의 모순도 이때 생긴 것’이라고 증언한다.
유정이 휘문고보를 다닐 때 만취한 유정의 형님은 “네 이놈 칼을 받을 터이냐?” “네 이놈 주먹을 받을 터이냐?”라고 했다 물론 유정은 주먹을 받았다. 아버지의 칼은 장남에게로 유전되었다.
그는 술을 마시면 집안 세간을 부수고 도끼를 들고 기둥을 팼다. 그리고 가족들을 일일이 잡아가지고 폭행을 하였다. 비녀쪽을 두발로 잡고 그 모가지를 밟고 서서는 머리를 뽑았다. 또는 식칼을 들고는, 피해 달아나는 가족들을 쫓아서 행길까지 맨발로 나오기도 하였다. (필자 밑줄)
자식에게 본능적 애정을 느끼면서도 재산을 지키기 위해 아들을 향해 아버지가 내던진 증오의 ‘칼’, 철저한 악인도 아니면서 인간의 얼굴과 야수의 심정으로 한길까지 뛰어나와 가족들을 위협하던 형님의 ‘칼’을 유정은 기억한다. 아버지의, 형님의 모순은 유정에게 또한 유전된다. 그는 학생 신분으로 연상의 기생이며 남편 있는 명창 박녹주에게 혈서(혈서는 변형된 유정이 또다른 ‘칼’이다)를 보내고, 박녹주의 집으로 찾아가 결혼을 강요하고 또 협박한다. 그는 박녹주에게 사랑을 구걸하면서 사랑의 거절에 그녀를 증오한다. ‘칼’에서 비롯된 모순된 관념이 유정의 일생을 지배하는 것이다. 이선영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형을 향해 칼을 던지던 그 순간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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