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
본 자료는 5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해당 자료는 5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5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인혁당사건
1. 시대적 배경
2. 사건개요
3. 쟁점사항과 조사결과
4. 인물들 - 사건이 관련자들의 삶에 끼친 영향
5. 성격

Ⅲ.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1. 시대적 배경
2. 사건개요
3. 쟁점사항과 조사결과
4. 사건 관련자
5. 사건의 성격

Ⅳ.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는 점이다. 민청학련의 학생지도부는 3 3 3 원칙에 따라 전국적인 대학시위를 준비하였다고 한다. 첫 번째 핵은 문리대와 법대, 그리고 상대의 세 축을 따라 서울대의 기타 단대를 연결하는 것이며, 두 번째 핵은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를 중심으로 서울지역 대학의 연계망을 구축하는 것이고, 세 번째 핵인 전국 조직은 서울대와 경북대, 전남대를 연결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대학 간 조직뿐만 아니라 고등학교와 기독교나 가톨릭의 종교계 인사까지도 연계망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셋째, 당시 민청학련 명의로 뿌려진 '민중 민족 민주 선언'으로 주도세력의 인식수준을 평가해 볼 때 지배체제의 본질적 성격이나 변혁전망에 대한 구도는 미흡하지만 이에 기초한 투쟁 노선은 1980년대 중반기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 한국사회가 도달해야 할 기본지표가 되었다는 점이다.
민청학련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첫째, 학생운동의 지향과 운동의 성격을 민중 지향적으로 바꾸어놓은 데 일조하였다는 점이다. 당시의 ‘민중. 민족. 민주선언’은 이 땅의 민주화운동과 학생운동 및 통일운동이 지향하여야 할 기본성격에 대해 비록 그것이 사회과학적, 철학적 정리수준은 아니었다 해도 최초의 이론화였다고 생각한다.
둘째, 민청학련은 군보독재 등장 이후 최초의 전국적인 학생운동을 창출하였다는 점이다. 비록 그 수준은 단일한 조직적 전망과 대열을 갖추지 못하고 통일적인 반유신 투쟁을 위한 연락체계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이는 학생운동의 당시 수준에서 평가해 본다면 대단히 진일보한 형태였다.
셋째, 학생운동이 가지고 있는 선봉대로서의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는 점이다.
넷째, 현재적 측면에서 볼 때 민청학련 그룹은 운동의 지속성을 지니고 있는 세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현재의 학생운동과 민청학련세대의 학생운동을 곧 바로 연결시키기에는 어럽지만, 민청학련의 대다수 주역들이 오늘의 현실에서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당시 자신들이 지향했던 민주와 통일, 그리고 분배의 정의로 표현되는 민중성의 신념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이는 민청학련세대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진보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민청학련 이전의 세대가 오늘날 사회진출 이후 보여주고 있는 기만성과 천차만별인 모습에서도 그 대비점을 찾을 수 있다. 1974년 4월, 민청학력운동계승사업회 엮음, 학민사, p.114
Ⅳ. 결론
오랫동안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논란과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그리고 그에 대한 진실규명 노력이 이루어져 왔고 그 결실로서 미흡하나마 작년 12월에 국정원에서 사건관련 보고서를 내놓았다. 국가의 불법행위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물론 우회적 표현이 많아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국가의 불법행위를 인정한 근거는 되었고, 그를 바탕으로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을 중심으로 인혁당 사건 공판에 대한 재심이 현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진행 중에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06년 12월 19일 결심공판이 이루어지고 다음달 23일 선고공판이 있게 된다고 한다.
공안사건은 정권의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서 정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사건에 불과했겠지만 그 사건의 당사자들과 그 주변 사람들에게는 삶을 마치거나 삶의 뿌리가 흔들렸던, 인생을 좌우하는 사건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유신정권의 잔재는 우리사회 곳곳에 남아있고 그러한 행위를 저질렀던 것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나 그들에 대한 명예회복조차 제대로 잘 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당장 그들을 바라보는 보통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아직도 그들은 빨갱이로 남아있는 것은 그러한 한 단면이 아닌가 싶다. 재심이라는 것이 모든 해결책은 될 수 없겠지만 최소한 공식적인 측면에서 희생자들과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결과를 내놓아 희생자들과 그 유족들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주는 결과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개체발생은 계통을 반복한다는 말이 이 사건에서도 역시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참고문헌목록】
세계 편집부 편, 1984, 「공안사건기록, 세계
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 2003, 1974년 4월, 학민사 (1,2,3권)
서중석, 1988, 특집·해방 후 학생운동의 민족사적 위치 3선개헌반대, 민청학련투쟁, 반유신투쟁,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 1988년 여름호
윤선자, 2002, 유신체제하 범국민 민주화운동 선언문, 한국근현대사학회, 『한국근대사연구』 22집
김진석, 1993, 20년 후의 민청학련 사람들, 사회평론 『길』 93
선종원, 1994, 민주화운동의 숨은 대부 고 장일순 선생“주교님, 자금제공 사실을 밝혀야 민청학련이 삽니다.”, 사회평론 『길』
이영민, 2006, 인혁당조작은 조작이다, 한국논단
권은중, 1998, 24년 만에 밝혀지는 터무니없는 조작극, 인혁당, 사회평론 『길』
조희연, 1990, 50·60·70년대 민족민주운동의 전개과정에 관한 연구, 조희연 편, 『한국사회운동사』, 죽산
정창현, 1991, 1960·70년대 ‘공안사건’의 전개양상과 평가,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분과 『한국현대사』3, 풀빛
김광운, 1991, 1970년대 대중조직의 성장과 자주적 대중조직의 대두,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분과 『한국현대사』3, 풀빛
마인섭, 1999, 1970년대 후반기의 민주화운동과 유신체제의 붕괴,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1970년대 후반기의 정치사회변동』, 백산서당
문화방송 시사교양국, 2001,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문화방송 시사교양국
천주교인권위원회, 2001, 『사법살인;1975년 4월의 학살』, 학민사
YTN 민주화 20주년 특별기획 진실, 제5편 8인의 사형수 - 인혁당 사건
국정원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 편, 2005,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
*목차
Ⅰ. 서론
Ⅱ. 인혁당사건
1. 시대적 배경
2. 사건개요
3. 쟁점사항과 조사결과
4. 인물들 - 사건이 관련자들의 삶에 끼친 영향
5. 성격
Ⅲ.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1. 시대적 배경
2. 사건개요
3. 쟁점사항과 조사결과
4. 사건 관련자
5. 사건의 성격
Ⅳ. 결론
*참고문헌
  • 가격1,500
  • 페이지수16페이지
  • 등록일2008.12.14
  • 저작시기2008.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04713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