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I. 항해를 시작하며
II.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
III. 그물을 던지며
IV. 바다를 떠다니며
V. 그물 망을 들여다보며
VI. 닻을 내리며
II.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
III. 그물을 던지며
IV. 바다를 떠다니며
V. 그물 망을 들여다보며
VI. 닻을 내리며
본문내용
해를 시작하며 계획한 것은 역사적 흔적을 찾고, 인식의 주체를 찾으며, 현상을 파악하며, 언어의 의미를 그리고, 포스트모던의 현상을 여러 각도에서 살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후설의 엄밀학으로서의 현상학으로부터 메를리-퐁티에 이르는 현상학적 이해에 대한 접근과, 소쉬르의 랑그와 빠롤 그리고 공시성과 통시성의 구분을 통해서 시작된 언어연구가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언어학을 거쳐 포스트구조주의의 미셀 푸코와 해체주의의 자크 데리다에게서 나타나는 역동적이며 동태적인 언어의 연구는 중간에서 그쳐야 했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 목적하는 성과를 다 이루지는 못하였고, 결론으로 이끌기에 부족하지만 어느 정도 자료는 준비되었다고 위로를 하면서 닻을 내린다. 역사적 흔적을 통하여 살펴본 바와 같이 현대성의 시작은 이성의 사유를 통하여 시작되었고, 반(反)변증적 사고의 흐름에 이르렀다. 필자는 프로테스탄트 정신과 현대성의 흔적을 살펴보고 "현대성은 무엇인가?"라는 명제의 부조리와 함께 "현대성은 어디에 기인하는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려고 한다.현대성은 프로테스탄트 정신, 새로운 공간, 자율적 이성(사유)이라는 세 가지 상징으로 환원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교리로 남아있고, 새로운 공간은 가상공간(Cyber-Space)을 맞이하게 되었고, 사유는 산업사회의 기계문명의 권력과 더불어 도구적 이성으로 전환되었다. 현대성의 흔적을 논하면서, 포스트모던 사회가 비판한 기독교의 교리와 현대성의 도구적 이성은 결국 사상이나 교리가 이념의 틀에서 절대화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 진정 사유나 교리의 틀을 변혁시킬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현대성을 하나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현대성은 다양하고 복합적인 역사를 지니고 있다. 역사 또한 푸코가 지적한 대로 맥락적인 것이 아니라 중첩적이기도 하고 단절적이기도 하다. 현대성이란 어떤 확실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실체를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기에 그 의미 규정은 공허한 것이다. 단지 현대성의 흔적들을 들추면서, 시대적으로 사상적으로 현대가 지니는 특징들을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가치있는 새로운 것들이 출현되는 현대의 의미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힘에 의존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힘으로서 출발한 사유는 결국 "자기보존"을 위하여 이성을 사유화 내지는 도구화함으로서 몰락하게 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변증을 통하여 지속적인 자기 성찰을 추구할 것 같았던 역사이성 또한 절대이성을 전제로 시작함으로 모든 다양성을 동질성으로 바꾸게 된다는 난관에 부딪친다.현대성의 비극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보여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원적 사상가인 니체는 기독교조차도 헤겔의 변증법적 틀과 함께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관찰함으로 디오니소스적 초인을 통하여 다양성과 복수성을 전제로하는 차이를 인정하고 가치변환, 가치초월을 통하여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사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내부에는 긍정만이 있을 뿐 부정이 결여됨으로 인하여 기쁨, 춤으로 고통과 노동이 대체될 수 있다고 하지만 살려는 의지의 현상이 초인으로 향하는 힘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것이 가능성은 없다. 그것은 니힐니즘을 의미하게 되며 결국 자기긍정이 자기파멸로 이어지게 된다. 가치변환은 보다 높은 삶의 고양이 아니라 퇴락적이고 육욕적인 대지로 이끌어갔다. 이러한 사실은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의 언어 속에 밝히 드러나는 것이었다. 하버마스는 주체철학이 지니는 한계를 인식하면서, 의사소통 즉 타자와의 담론을 통해 공동의 장에 이르는 시민사회를 주창함으로 계몽의 사유의 완성을 지향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자기 주체성을 벗어날 수 없고 칸트의 순수사유와 순수 담론의 장은 같은 맥락에서 언어를 포함한 현실적 상황의 난제들을 제거한 뒤에야 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실적인 문제가 남게 되는데 이는 아도르노가 지적한대로 과학문명의 발달은 고삐 풀린 상황이며, 또는 크리쉬나의 속도를 늦출 수 없는 마차와 같아서 인간의 정신을 앞서 질주하고 있다. . 정신적으로 가치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은 물질문명이 제공하는 유용성과 편리성 그리고 잉여가치를 통한 유혹에 의해 매도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 한편으로는 하버마스의 지적대로 구조적 틀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정치적 상황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체제의 힘을 소유한 기득권은 권력이 제공하는 뇌물에 현혹되어 새로운 창조성의 모험을 포기함으로 의식은 있으나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다시 물화된 정신을 일깨우고 새로운 신화로 권력을 통합한 도구적 이성을 대항하여 싸우는 힘이 되어야 한다. 또한 정치체제가 창조적 삶을 위한 변혁을 주도하지 못하고 자기보존과 잉여가치를 탐하기 위하여 왜곡된 모습을 드러낼 때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투쟁하는 힘이 되어야만 한다.모든 신적인 힘을 취하려는 경제적 수단이나, 정치적 수단, 또는 문화적 도구를 저항하는 힘은 참다운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계시를 수여 받은 프로테스탄트 정신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현대성, 즉 새로운 창조를 가능케 하는 변혁의 힘의 근원은 바로 프로테스탄트 정신이며, 이 정신만이 오늘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자기부정과 비판을 통해 늘 변혁된 사회의 부조리를 다시 바라보고 끊임없이 개혁을 추진하는 내적 변증과 외적 변증적 태도를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한한 어떤 창조적 결과도 절대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창조물은 창조주의 인식 아래서만 가능하며,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의 상황에서 이루어진 어떤 변혁적 창조도 절대적일 수 없으며, 상황에 따른 객관적 타당성은 인정 될 수 있어도 시공을 초월하여 진리가 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자기초월의 근원적인 힘으로서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다시 요구되는 시점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