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표지와 시작하는 말
1. 서론: 역사의 역할
2. 정상과학에로의 길
3. 정상과학의 성격
4. 퍼즐 풀이로서의 정상과학
5. 패러다임의 우선성
6. 이상 현상 그리고 과학적 발견의 출현
7. 위기 그리고 과학 이론의 출현
8. 위기에 대한 반응
9. 과학 혁명의 성격과 필연성
10. 세계관의 변화로서의 혁명
11. 혁명의 비가시성
12. 혁명의 해결
13. 혁명을 통한 진보
14. 추가
이 책을 읽고
1. 서론: 역사의 역할
2. 정상과학에로의 길
3. 정상과학의 성격
4. 퍼즐 풀이로서의 정상과학
5. 패러다임의 우선성
6. 이상 현상 그리고 과학적 발견의 출현
7. 위기 그리고 과학 이론의 출현
8. 위기에 대한 반응
9. 과학 혁명의 성격과 필연성
10. 세계관의 변화로서의 혁명
11. 혁명의 비가시성
12. 혁명의 해결
13. 혁명을 통한 진보
14. 추가
이 책을 읽고
본문내용
록 노력해야 한다.
다른 주제로 넘어가기 전에 한 가지만 더 말하고 싶다. 쿤은 패러다임의 전환이 하나의 종교적 개종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의 앞뒤를 바꾸어 종교적 개종은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 말이 맞는다면 다른 사람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시도하는 것이고, 여기서 분명히 패러다임의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고 생각한다. 성경에는 그런 패러다임의 충돌의 예가 여러 번 나온다. 먼저 예수님의 존재가 그런 충돌을 일으켰다. 구약의 전통을 이어받은 유대교에 있어서 예수의 말과 행동은 자신들이 가진 믿음의 근본을 흔드는 도전이었다. (이스라엘의 종교에서 정상과학과도 같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던) 유대교 신앙의 근본을 흔들만한 새로운 문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이다. 그들은 이 문제를 자신들의 전통 안에서 이해하려고 했다. 그래서 지혜의 선생이나 선시자 같은 수많은 이해들이 그 시기에 만연하게 되었다. 그 모두가 예수를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이해하려고 했던 시도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패러다임으로 예수의 존재를 도무지 설명해 낼 수 없었고, 차츰 유대교 안에서 심리적 위기감이 만연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받아들이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추종자들이 불어나기 시작했고, 그 때 두 패러다임은 본격적으로 충돌하게 된 것이다.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의 변화된 삶과 유대교의 갈등은 성경에 나오는 패러다임충돌의 두 번째 예가 될 것이다. 예수의 존재를 기존의 유대교적 패러다임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그들은 예수의 참 제자들인 그들의 존재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반증 사례, 다시 말해 기존의 패러다임이 풀지 못하는 문제가 하나(예수)에서 수십 수백 개(예수를 따르는 참 제자들)로 늘어난 것이다. 나는 기독교 신앙이 이런 식으로 퍼져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란시스 쉐퍼는 “정통교리가 있는데 정통적 실천이 없으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외치면서 실천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패러다임은 자신들만이 참 진리라고 주장하는 ‘기독교’라는 문제를 풀어낼 수 있다. ‘독단적인 종교, 거짓 종교집단’이라는 간단한 답으로 말이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의 정통 교리를 실천하면 어떻게 될까? 나는 먼저 세상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의 문제들을 풀어내는 우리의 패러다임을 보고 놀랄 것이며,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그들이 가진 패러다임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가 될 것이라 믿는다. 기독교는 이렇게 전파되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입으로 전하는 복음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우리의 삶 자체가 이 세상 패러다임의 반증사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흥미로웠던 발견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것은 쿤의 주장과 이것이 가져온 영향력이 그 자체로서 패러다임 전환의 예시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는 과학철학의 주류에서 당연시 되어 오던 누적적 발전을 받아들이지 않고 독창적인 주장으로 기존의 관념을 뒤엎었다. 이것은 그가 과학의 발전에 대한 그의 주장과 너무나도 맞아 떨어진다. 어쩌면 그가 과학철학에 있어서 독창적이고 도발적인 주장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과학철학의 주류가 아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역사학이나 철학에 대해서는 정규 학위 과정을 밟지는 않았는데, 오히려 이런 쿤의 특이한 이력이 현실적이면서도 흥미로운 새 과학관을 가능하게 한 요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령 쿤이 당대의 정통 철학자들이 간과했던 실제 과학의 작동 모습, 과학자 집단의 행동 양식, 그리고 과학자의 심리에 대해 상대적으로 더 큰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지적 이력의 차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쿤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창하는 과학자들의 특성을 8장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는데, 그 자신이 바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주장의 예가 되는 모습이 참 인상 깊었다.
패러다임의 존재를 통해 과학의 특별함을 설명해 보려했던 쿤. 참고 서적들을 읽어보니 쿤을 상대주의 과학관의 효시로서 간주하기도 하는 것 같다. 그에 따르면 과학 혁명을 통해 패러다임이 교체되면 과학자들은 자연 세계를 이전과는 다른 시각에서 보게 된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패러다임이 바뀌면 세계관이 바뀌는 정도가 아니라 ‘세계 자체가 바뀐다’고 까지 주장했다. 말하자면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세계가 저 밖의 어딘가에 있고, 그것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우리의 관점 자체가 패러다임에 따라 바뀐다는 정도의 주장이 아니라, 세계란 우리가 패러다임을 통해 인식하는 바로 그것을 뿐이라는 주장인 것이다. 어쩌면 과격하게도 들리는 그의 주장은 진리에 대한 상대주의적 관점을 보여주는 것 같다. 과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주장하려면, 먼저 이런 상대주의적 관점을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를 과학철학자들은 어떻게 해결했는지 궁금하다.
쿤의『과학혁명의 구조』를 다 읽고 나니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 생명과학을 하는 한 사람으로서 과학에 대해 좀 알아야 할 텐데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다. 이번에 읽은 이 난해하고도 어려운 책이 내게 준 가장 큰 유익은 나의 무식을 깨닫게 해준 것이 아닐까 싶다. 책을 읽으면서 토마스 쿤까지 과학철학의 개괄적인 흐름을 슬쩍슬쩍 살펴보았던 것도 내게 큰 유익이었다. 참고서적의 뒷부분을 보니 포퍼와 쿤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하려했던 라카토쉬, 포퍼와 쿤을 넘어서려고 했던 파이어아벤트, 그리고 과학을 사회적 구성물로 보는 사회 구성주의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포퍼의 반증주의와 쿤의 패러다임 논의는 이들에 의해 어떤 식으로 변화되고 재해석 되었을까? 이 궁금증을 잘 간직해서 이번 학기가 끝나면 과학철학의 전반적인 내용을 깊게 공부해볼 생각이다.
정말 힘들었지만 적절한 시기에 꼭 필요한 책을 읽은 것 같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격언으로 며칠을 책상 앞에서 끙끙거렸던 나를 위로한다. 그리고 그냥 먹으라고 했으면 먹지 않았을 쓴 약을 억지로 먹게 해주신 교수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다른 주제로 넘어가기 전에 한 가지만 더 말하고 싶다. 쿤은 패러다임의 전환이 하나의 종교적 개종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의 앞뒤를 바꾸어 종교적 개종은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 말이 맞는다면 다른 사람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시도하는 것이고, 여기서 분명히 패러다임의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고 생각한다. 성경에는 그런 패러다임의 충돌의 예가 여러 번 나온다. 먼저 예수님의 존재가 그런 충돌을 일으켰다. 구약의 전통을 이어받은 유대교에 있어서 예수의 말과 행동은 자신들이 가진 믿음의 근본을 흔드는 도전이었다. (이스라엘의 종교에서 정상과학과도 같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던) 유대교 신앙의 근본을 흔들만한 새로운 문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이다. 그들은 이 문제를 자신들의 전통 안에서 이해하려고 했다. 그래서 지혜의 선생이나 선시자 같은 수많은 이해들이 그 시기에 만연하게 되었다. 그 모두가 예수를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이해하려고 했던 시도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패러다임으로 예수의 존재를 도무지 설명해 낼 수 없었고, 차츰 유대교 안에서 심리적 위기감이 만연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받아들이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추종자들이 불어나기 시작했고, 그 때 두 패러다임은 본격적으로 충돌하게 된 것이다.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의 변화된 삶과 유대교의 갈등은 성경에 나오는 패러다임충돌의 두 번째 예가 될 것이다. 예수의 존재를 기존의 유대교적 패러다임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그들은 예수의 참 제자들인 그들의 존재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반증 사례, 다시 말해 기존의 패러다임이 풀지 못하는 문제가 하나(예수)에서 수십 수백 개(예수를 따르는 참 제자들)로 늘어난 것이다. 나는 기독교 신앙이 이런 식으로 퍼져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란시스 쉐퍼는 “정통교리가 있는데 정통적 실천이 없으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외치면서 실천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패러다임은 자신들만이 참 진리라고 주장하는 ‘기독교’라는 문제를 풀어낼 수 있다. ‘독단적인 종교, 거짓 종교집단’이라는 간단한 답으로 말이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의 정통 교리를 실천하면 어떻게 될까? 나는 먼저 세상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의 문제들을 풀어내는 우리의 패러다임을 보고 놀랄 것이며,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그들이 가진 패러다임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가 될 것이라 믿는다. 기독교는 이렇게 전파되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입으로 전하는 복음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우리의 삶 자체가 이 세상 패러다임의 반증사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흥미로웠던 발견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것은 쿤의 주장과 이것이 가져온 영향력이 그 자체로서 패러다임 전환의 예시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는 과학철학의 주류에서 당연시 되어 오던 누적적 발전을 받아들이지 않고 독창적인 주장으로 기존의 관념을 뒤엎었다. 이것은 그가 과학의 발전에 대한 그의 주장과 너무나도 맞아 떨어진다. 어쩌면 그가 과학철학에 있어서 독창적이고 도발적인 주장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과학철학의 주류가 아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역사학이나 철학에 대해서는 정규 학위 과정을 밟지는 않았는데, 오히려 이런 쿤의 특이한 이력이 현실적이면서도 흥미로운 새 과학관을 가능하게 한 요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령 쿤이 당대의 정통 철학자들이 간과했던 실제 과학의 작동 모습, 과학자 집단의 행동 양식, 그리고 과학자의 심리에 대해 상대적으로 더 큰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지적 이력의 차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쿤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창하는 과학자들의 특성을 8장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는데, 그 자신이 바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주장의 예가 되는 모습이 참 인상 깊었다.
패러다임의 존재를 통해 과학의 특별함을 설명해 보려했던 쿤. 참고 서적들을 읽어보니 쿤을 상대주의 과학관의 효시로서 간주하기도 하는 것 같다. 그에 따르면 과학 혁명을 통해 패러다임이 교체되면 과학자들은 자연 세계를 이전과는 다른 시각에서 보게 된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패러다임이 바뀌면 세계관이 바뀌는 정도가 아니라 ‘세계 자체가 바뀐다’고 까지 주장했다. 말하자면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세계가 저 밖의 어딘가에 있고, 그것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우리의 관점 자체가 패러다임에 따라 바뀐다는 정도의 주장이 아니라, 세계란 우리가 패러다임을 통해 인식하는 바로 그것을 뿐이라는 주장인 것이다. 어쩌면 과격하게도 들리는 그의 주장은 진리에 대한 상대주의적 관점을 보여주는 것 같다. 과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주장하려면, 먼저 이런 상대주의적 관점을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를 과학철학자들은 어떻게 해결했는지 궁금하다.
쿤의『과학혁명의 구조』를 다 읽고 나니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 생명과학을 하는 한 사람으로서 과학에 대해 좀 알아야 할 텐데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다. 이번에 읽은 이 난해하고도 어려운 책이 내게 준 가장 큰 유익은 나의 무식을 깨닫게 해준 것이 아닐까 싶다. 책을 읽으면서 토마스 쿤까지 과학철학의 개괄적인 흐름을 슬쩍슬쩍 살펴보았던 것도 내게 큰 유익이었다. 참고서적의 뒷부분을 보니 포퍼와 쿤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하려했던 라카토쉬, 포퍼와 쿤을 넘어서려고 했던 파이어아벤트, 그리고 과학을 사회적 구성물로 보는 사회 구성주의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포퍼의 반증주의와 쿤의 패러다임 논의는 이들에 의해 어떤 식으로 변화되고 재해석 되었을까? 이 궁금증을 잘 간직해서 이번 학기가 끝나면 과학철학의 전반적인 내용을 깊게 공부해볼 생각이다.
정말 힘들었지만 적절한 시기에 꼭 필요한 책을 읽은 것 같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격언으로 며칠을 책상 앞에서 끙끙거렸던 나를 위로한다. 그리고 그냥 먹으라고 했으면 먹지 않았을 쓴 약을 억지로 먹게 해주신 교수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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