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중국의 한국전쟁 참전결정의 계기는?
2.정책결정자들이 인식하는 외교정책목표는?
3.정책옵션은 어떠한 것들이 있었는가?
4.왜 정책옵션 중 특정한 옵션을 최종 정책으로 선택하였는가?
5. 정책결정의 결과는?
2.정책결정자들이 인식하는 외교정책목표는?
3.정책옵션은 어떠한 것들이 있었는가?
4.왜 정책옵션 중 특정한 옵션을 최종 정책으로 선택하였는가?
5. 정책결정의 결과는?
본문내용
담에서 모택동이 당시 주은래는 중국은 소련의 군사원조 없이는 한국전에 참전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가지고 소련에 갔었으며, 스탈린이 이에 대해 매우 화를 냈고, 나중에 가서야 전화로 소련 공군이 압록강까지만 갈 수 있다고 전해왔다는 것을 회고한 것은 당시 모택동의 참전결정이 소련의 군사원조를 전제로 한 것이었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13일 정치국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다시 한번 참전 여부에 관한 찬반토론을 거친 결과, 소련의 공군지원이 없더라도 참전이 결국 중국에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모스크바의 주은래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문을 보내 소련 측에 중국의 참전결정을 통보토록 지시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10월 19일 한국전쟁에 중국군을 투입하기 이전의 최후의 결정이었다.
① 정치국 동지들과 의논한 결과, 아군의 조선출동이 유리하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음. 처음에는 전적으로 남한군대와만 싸울 수 있음. 우리 군은 남한군대에는 자신이 있음. 원산, 평양선 이북의 넓은 산간지역에 근거지를 만들어 북한 인민을 고무시킬 수 있음. 이 시기에 한국군 몇 개 사단군만 섬멸하면 조선정세는 우리에게 유리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 것임.
② 우리가 취하는 이러한 적극적 정책은 중국에 대해 조선에 대해, 동양에 대해, 세계에 대해 모두 극히 유리함. 그러나 우리가 참전하지 않고 적으로 하여금 압록강변까지 압박해 들어오게 하고 국내, 국제의 반공열기가 고조된다면 各方에 모두 불리하게 됨. 우선 동북지역이 더욱 불리하게 되며 전체 東北邊方軍은 흡수 될 것이며 南滿의 電力도 장악될 것임.
어쨌든 우리는 모두 응당 참전해야 하며, 또 반드시 참전해야 한다고 보고 있고 참전하면 이득이 극히 크고 참전하지 않으면 손실이 극히 크다고 생각함.
결국 모택동은 10월 17일 팽덕회, 고강, 등화, 홍학지 등에게 전문을 보내 10월 19일을 기해 출동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고 이에 따라 19일을 기해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너 전면 출동함으로써 중국의 한국전 참전은 시작되었다.
5. 정책결정의 결과는?
결과적으로 중국이 한국전쟁을 통해서 얻은 것이라고 한다면 건국 초기에 중국인민들을 대상으로 애국주의를 공고화할 수 있었으며 이것은 체제의 안정에 도움을 주었다. 한편 반혁명적 사상자들의 대대적인 숙청을 애국주의 속에서 정당화합리화 할 수 있었다. 즉 결론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혁명정부의 체제안정을 이룩할 수 있었고 공고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모택동이 한국전쟁 참가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한 목표가 달성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과정이 있은 후에 소련의 신임을 받아 소련으로부터 실질적인 지원을 보장받게 되어 중국 인민해방군의 현대전 참전 경험을 통해 느낀 중국 인민해방군의 현대화를 촉진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참전을 통해 중국은 당시 세계 패권국인 미국과 적대국이 되면서 미국의 장기간에 걸친 중국 봉쇄작전으로 국제적인 고립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소련에 대한 의존이 더욱 심화되었다. 또한, 한국전쟁의 승리로 대만 해방의 역량을 강화하고자 했던 중국의 목표는 무기한 연장이 되고, 한반도 내 미군이 주둔함으로써 한미 동맹이 더욱 강화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이 모택동을 아직까지 중국인들의 가슴 속에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남을 수 있게 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참전결정은 거의 모택동에 의해 이루어졌고 참전결정과정에서 주은래를 비롯한 당정치국소속 위원 등 소수의 고위 정치 지도자들과 협의조정과정을 거쳤으나 모두 모택동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로 인해 대만 해방이라는 목표가 멀어지긴 했지만, 중국 혁명정부의 체제안정으로 오늘날의 중국의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모택동이 한국전쟁 참전결정은 한국과 미국에서는 한반도 통일에서 멀어지게 된 최악의 결정이었고, 중국의 입장에서 중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시점에서 최고의 결정이었던 것이다.
※ 참고문헌
-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결정에 관한 연구(한국외대 학술논문, 지재운)
-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정종욱)
- 중국의 한국전 참전: 1949년 5월 - 1951년 7월(옥스포드 대학 박사논문, David Tsui)
-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원인, 한국전쟁과 중국(백산서당, 박두복)
- 중국 인민지원군의 한국전쟁 참전 결정과정(이완범)
- 『建國以來毛澤東文稿』第1冊
- 『在歷史巨人身邊-師哲回憶錄』
- 『人民日報』1950년 11월 6일자, John Gittings
그러나 모택동은 13일 정치국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다시 한번 참전 여부에 관한 찬반토론을 거친 결과, 소련의 공군지원이 없더라도 참전이 결국 중국에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모스크바의 주은래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문을 보내 소련 측에 중국의 참전결정을 통보토록 지시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10월 19일 한국전쟁에 중국군을 투입하기 이전의 최후의 결정이었다.
① 정치국 동지들과 의논한 결과, 아군의 조선출동이 유리하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음. 처음에는 전적으로 남한군대와만 싸울 수 있음. 우리 군은 남한군대에는 자신이 있음. 원산, 평양선 이북의 넓은 산간지역에 근거지를 만들어 북한 인민을 고무시킬 수 있음. 이 시기에 한국군 몇 개 사단군만 섬멸하면 조선정세는 우리에게 유리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 것임.
② 우리가 취하는 이러한 적극적 정책은 중국에 대해 조선에 대해, 동양에 대해, 세계에 대해 모두 극히 유리함. 그러나 우리가 참전하지 않고 적으로 하여금 압록강변까지 압박해 들어오게 하고 국내, 국제의 반공열기가 고조된다면 各方에 모두 불리하게 됨. 우선 동북지역이 더욱 불리하게 되며 전체 東北邊方軍은 흡수 될 것이며 南滿의 電力도 장악될 것임.
어쨌든 우리는 모두 응당 참전해야 하며, 또 반드시 참전해야 한다고 보고 있고 참전하면 이득이 극히 크고 참전하지 않으면 손실이 극히 크다고 생각함.
결국 모택동은 10월 17일 팽덕회, 고강, 등화, 홍학지 등에게 전문을 보내 10월 19일을 기해 출동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고 이에 따라 19일을 기해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너 전면 출동함으로써 중국의 한국전 참전은 시작되었다.
5. 정책결정의 결과는?
결과적으로 중국이 한국전쟁을 통해서 얻은 것이라고 한다면 건국 초기에 중국인민들을 대상으로 애국주의를 공고화할 수 있었으며 이것은 체제의 안정에 도움을 주었다. 한편 반혁명적 사상자들의 대대적인 숙청을 애국주의 속에서 정당화합리화 할 수 있었다. 즉 결론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혁명정부의 체제안정을 이룩할 수 있었고 공고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모택동이 한국전쟁 참가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한 목표가 달성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과정이 있은 후에 소련의 신임을 받아 소련으로부터 실질적인 지원을 보장받게 되어 중국 인민해방군의 현대전 참전 경험을 통해 느낀 중국 인민해방군의 현대화를 촉진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참전을 통해 중국은 당시 세계 패권국인 미국과 적대국이 되면서 미국의 장기간에 걸친 중국 봉쇄작전으로 국제적인 고립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소련에 대한 의존이 더욱 심화되었다. 또한, 한국전쟁의 승리로 대만 해방의 역량을 강화하고자 했던 중국의 목표는 무기한 연장이 되고, 한반도 내 미군이 주둔함으로써 한미 동맹이 더욱 강화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이 모택동을 아직까지 중국인들의 가슴 속에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남을 수 있게 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참전결정은 거의 모택동에 의해 이루어졌고 참전결정과정에서 주은래를 비롯한 당정치국소속 위원 등 소수의 고위 정치 지도자들과 협의조정과정을 거쳤으나 모두 모택동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로 인해 대만 해방이라는 목표가 멀어지긴 했지만, 중국 혁명정부의 체제안정으로 오늘날의 중국의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모택동이 한국전쟁 참전결정은 한국과 미국에서는 한반도 통일에서 멀어지게 된 최악의 결정이었고, 중국의 입장에서 중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시점에서 최고의 결정이었던 것이다.
※ 참고문헌
-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결정에 관한 연구(한국외대 학술논문, 지재운)
-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정종욱)
- 중국의 한국전 참전: 1949년 5월 - 1951년 7월(옥스포드 대학 박사논문, David Tsui)
-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원인, 한국전쟁과 중국(백산서당, 박두복)
- 중국 인민지원군의 한국전쟁 참전 결정과정(이완범)
- 『建國以來毛澤東文稿』第1冊
- 『在歷史巨人身邊-師哲回憶錄』
- 『人民日報』1950년 11월 6일자, John Gitt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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