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비문학의 세계 4공통] 역사적 인물에 관한 인물전설 2편을 선택하고 각 인물전설이 갖는 의미에 관하여 기존 연구 성과를 참고하여 자신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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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구비문학의 세계 4공통] 역사적 인물에 관한 인물전설 2편을 선택하고 각 인물전설이 갖는 의미에 관하여 기존 연구 성과를 참고하여 자신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제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역사적 인물에 관한 인물전설 2편

1) 세종대왕
(1) 세종의 업적
(2) 세종의 외교
(3) 세종의 리더십

2) 율곡 이이
(1) 이이의 업적
(2) 이이의 사상

2. 역사적 인물에 관한 인물전설 2편에 대한 나의 견해

1) 세종대왕에 대한 기존 연구 성과를 참고 한 나의 견해
2) 율곡 이이에 대한 기존 연구 성과를 참고 한 나의 견해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역량을 감당할 만하고 의리로써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났던 사람에는 조광조와 율곡 두 분이었다.”라고 평가하고 율곡이야말로 만세토록 태평성대의 나라를 세우려 했으니 그 공로가 원대하다 말하겠다며 극찬하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동방지성인(東方之聖人)이라는 칭호를 받고 기호학파를 형성하여, 후세의 학계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제자로는 사계 김장생, 중봉 조헌, 수몽 정엽, 묵재 이귀 등의 학자들이 율곡의 문하였다.
율곡이 대학자이면서 뛰어난 정치가로 평가 받을 수 있었던 점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신사임당을 어머니로 두었다는 점이다. 율곡은 어렸을 때 문학, 예술에 조예가 깊은 신사임당으로부터 수학했다. 조선 시대에는 여성은 한문 서적을 읽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어머니에게서 글을 배우고 학문을 익히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고, 또 그것이 남들과는 독자적인 길을 갈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둘째, 퇴계 이황이라는 선배가 있었다는 점이다. 율곡은 23세 때 도산서원으로 직접 퇴계를 방문했고, 그 뒤로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과 개인적 신상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퇴계를 극구 만류했고, 퇴계가 죽고 나서는 만시(輓詩)를 지어 애도했다. 퇴계와 함께 조선 성리학의 두 줄기를 형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후대 학자들이 학파와 붕당의 형성에 따라 퇴계와 율곡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는 것처럼 만들고, 그에 따라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적대적인 관계처럼 되어버렸지만, 당대에는 서로를 인정한 좋은 선후배였다. 율곡은 그런 선배와의 편지 교류 등을 통해 학문적 연마를 할 수 있었고, 선배가 이루어놓은 성과를 디딤돌로 해서 자신의 학문적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셋째, 선조 시대에 활동했다는 점이다. 율곡이 관직에 진출하자마자 문정왕후가 사망하고 외척인 윤원형이 탄핵을 받았다. 사화로 얼룩졌던 시대는 지나가고 사림이 중앙의 무대에 오르는 때가 된 것이다. 개혁 의지가 강하고 학문적 역량이 있었던 율곡이 사림파가 정계의 중심이 된 때에 관직에 들어갔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율곡보다 서른다섯 살 위였던 퇴계의 경우 사림이 위축되었던 때에 관계에 있었으므로 조정에 염증을 느끼고 고향으로 물러나는 쪽으로 생각을 굳혔던 것과는 대비된다. 물론 선조의 한계, 사림의 분열 등 이후 전개되는 상황이 율곡을 괴롭혔다는 점을 간과할 순 없다. \'십만 양병설\' 등의 건의에 대해 선조가 미온적으로 받아들였고, 또 붕당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여 조율하려고 했으나 동인과 서인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결과를 낳아 정치적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렇더라도 율곡은 항상 중앙 정계의 한 중심에 서 있었다.
넷째, 학문적 지식이 있었던 친구들과 교류했다는 점이다. 평생의 친구인 성혼, 송익필, 정철 등 당대의 인사들이 주위에 있어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부족한 것을 채워주고 격려해 주어 자신의 역량을 펼칠 수 있었다. 율곡은 몸이 좋지 않거나 뜻이 좌절될 때면 선대의 고향인 파주로 물러나 학문과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학문과 교육 분야에서도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고 제자도 많이 양성했다.
Ⅲ. 결론
지금까지 본론에서는 역사적 인물에 관한 인물전설 2편을 선택하고 각 인물전설이 갖는 의미에 관하여 기존 연구 성과를 참고하여 나의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제시해보았다. 세종 임금은 우리 역사에서뿐 아니라, 세계 인류 역사에도 드물게 보는 위인이다. 천성이 어질고 부지런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취미와 재능이 여러 방면에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서화에도 뛰어났다. 정사를 보살피면서 독서와 사색에 머리쓰기를 쉬지 않았으며, 의지가 굳어서 옳다고 생각한 일은 어떠한 반대가 있더라도 기어코 실행하였다. 널리 국민을 사랑하고, 국민의 어려운 생활에 깊은 관심을 가져, 국민을 본위로 한 왕도 정치를 베풀었다. 세종조는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유교 정치, 찬란한 문화가 이룩된 시대이다.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은 시기였다. 집현전을 통하여 많은 인재를 길렀고, 유교 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나아가 겨레 문화를 높이는 데에 기본이 된 훈민정음의 창제, 방대한 편찬 사업, 농업과 과학 기술의 발전, 의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국토의 확장 등 수많은 업적으로 나라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율곡은 언젠가 오성대감이라고 불리는 이항복에게 \"슬프지 않은 울음에는 고춧가루 싼 수건이 좋다.\" 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겼다. 율곡의 <십만양병> 주장을 가볍게 생각하고 미리 국난을 대비하지 못한 선조와 대신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까지 피난해야 했고 명나라에 원병을 청할 수 밖에 없게 되는데 선조는 한음 이덕형을 명나라로 보내어 신종 황제로부터 원병을 받아냈다. 이에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끄는 4만의 원군이 오게 되었는데, 이 때 이 항복은 이들을 맞이하는 접빈사가 되었다. 국난에 처해 어쩔 수 없이 청병을 했지만 조금도 즐거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이항복은 명나라 원군을 고맙게 맞이한다는 표정이 얼굴에 전혀 나타나지 않아 고민이었다. 바로 그 때 이항복은 은연중에 지난날 율곡 선생의 가르침이 떠올라 일부러 고춧가루를 싼 수건을 넣고 가서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 맞이하는 모습을 연출했다고 한다. 오성은 그제서야 비로소 율곡이 자기에게 말한 것이 명나라에 청병하라는 뜻이었음을 깨달았던 것 이다. 이처럼 율곡은 임진왜란 10년여 전에 미리 화두같은 말을 이항복에게 남김으로써 어려움을 지혜롭게 대처하도록 하였던 것 이다.
참고문헌
박영식, 율곡 이이의 경장론에 대하여, 전북대학교, 2011
서근식, 율곡 이이의 소통적 역학관 연구, 고려대학교, 2009
이영호,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생활문학 사상, 한국국어교육학회, 2002
박현모, 세종대왕과 한국형 리더십, 예문동양사상연구원, 2008
백기복, 세종대왕의 경제정책, 예문동양사상연구원, 2008
이숭녕, 세종대왕의 개성의 고찰, 성균관대학교,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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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3.25
  • 저작시기2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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