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독립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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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독립영화의 정의

◎ 삭제의 문화에 관하여
1. 왜 삭제를 하는가?
2. 어떻게 삭제하는가?

◎ 한국 독립 영화의 흐름

◎ 볼만한 한국의 독립영화

◎ Homovideocuse

◎ 지리멸렬

◎ 행당동 사람들

◎ 미디어 숲속의 사람들
⊙ 한국 독립영화의 현실과 전망

◎ 미국의 독립영화

◎ 변방에서의 외침: 80년대의 민족영화

◎ 독립영화야! 90년대의 독립영화

본문내용

기존의 헐리우드 영화 속에서 찾을 수 없었던‘새로운 소재와 스타일’을 제시하면서 제작과 배급의 측면에서 헐리우드와의 공생관계에 의존하거나 혹은 헐리우드의 자본이 미치지 않는 틈새(niche)시장을 공략하면서 성장해 왔다. 헐리우드의 뻔한 이야기와 익숙한 장르, 스타시스템에 식상한 다양한 관객의 요구를 채워주는 저예산 독립영화의 제작과 배급은 새로운 영역으로 돌파구를 개척해 온 것이다.
변방에서의 외침: 80년대의 민족영화
한국영화사에서‘독립영화’ 혹은 비제도권, 비주류 영화의 존재를 대중적으로 알린 시기는 사회, 문화 전 분야에서 민주화의 꽃을 피웠던 1980년대 중·후반이었다. 80년대 초반에 대학의 영화 동아리를 중심으로 8mm, 16mm 단편 영화의 제작과 상영이 시작되었으며‘작은 영화’,‘열린 영화’ 등의 이름으로 주로 매니아들 사이에서 알려지다가 1987년 이후,‘장산곶매’와 같은 독립영화 단체들이 일련의 독립장편영화를 제작, 상영하면서 영화 검열의 공방을 일으키고 비주류 영화를 소개하기에 이른 것이다.“민족영화의 새 장을 열다”라는 선전 제호와 함께 독립영화는 발전되기 시작했다. 아마추어 동호회나 대학 영화과의 워크샵에서 다루었던 16mm 카메라를 사용하여 제작된 <오! 꿈의 나라>(광주항쟁과 반미의식)(1989)는 비제도권의 독립영화를 세상에 널리 알린‘장산곶매’의 첫 장편영화였다.
이후의 <파업전야>(노동운동, 1990), <닫힌 교문을 열고>(교육문제, 1992), 그리고‘영화제작소 청년’의 <어머니, 당신의 아들>(학생운동, 1991)등은 비제도권의 영화들이 상업영화와는 전혀 다른 형식과 내용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이밖에 노동운동의 주제를 다룬‘민족영화연구소’,‘노동자뉴스제작단’, 여성 문제를 다룬‘여성영화집단 바리터’등의 단체들은 상업영화가 담아낼 수 없었던 정치, 사회적 이슈를 소재로 많은 영화들을 제작, 배급하였다. 이처럼 80년대 한국독립영화는 1987년의 6월 민주화항쟁의 과정에 대학 동아리와 독립영화단체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그리고 사회전반의 민족민주운동의 발전에 힘입어 보다 실천적인 의지를 강조하면서 정립되었다.
미국의 60년대 중·후반의 정치, 사회적 상황과 한국의 80년대 격변의 역사는 청년들의 대항, 저항 정신을 밑거름으로 출발했다는 점, 문화 전반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독립영화야! 90년대의 독립영화
국내외 독립영화의 1년간의 성과를 한자리에 모은 1998년 인디포럼(코아 아트홀)의 슬로건은“나, 독립영화야!”이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비제도권 영화인들은 보다 광범위하게 다양한 작품들을 수용하였고 독립영화란 개념을 사용한다.
1997년“독립영화여! 독립하라”라는 다소 선언적이고 도전적인 구호로 시작된 후, 2회를 맞이한 1998 인디포럼의 작품들을 분류하면 90년대 초·중반과도 확연히 구별되는 자유로운 주제와 형식의 영화들이 포괄된다. 80년대의 사회적 변혁운동과의 연장선에서 출발한 푸른영상의 <우리는 전사가 아니다>, <어머니의 보랏빛 수건>, 여균동의 <외투>, 보임의 <낮은 목소리 1,2>, 영화제작소 청년의 <생강>, 스튜디오 21의 <레드 헌트> 등의 정치, 인권, 노동 등의 문제를 완전히 벗어난 다양한 작품들을 마주치게 된다. 충격적인 포르노와 폭력의 이미지를 강조한 김정구의 <엄마의 사랑은 끝이 없어라>와 10만 원 비디오 영화제에서 상영된 작품들은 다양성의 시대에 개성있는 표현을 강조하고 폭넓은 주제 의식을 보여준다.
90년대의 상황은 또한 상업영화와 비제도권 영화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비록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진 못하고 있지만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세 친구>, <악어>, <바리케이트>, <강원도의 힘> 등 상업영화권 아래서 시도된 독립영화작업은 코믹멜로나 액션 등 한정된 헐리우드 장르 구조와 스타 시스템 아래서 제작되는 충무로 영화의 폭을 넓히고 있다.
80년대‘민족영화’라는 개념으로 정치, 사회적 동기에서 시작된 한국독립영화는 90년대 중·후반에 접어들면서 미학의 문제와 대중공간에서의 상영, 배급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양적, 질적인 독립영화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독립영화인들에게 있어서 출구는 쉽게 찾아지지 않는 듯하다. 독립영화의 성패가 뛰어난 영화작가에 의존한 독창성 외에도 제작, 상영, 배급의 총체적인 시스템의 확립에 달려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독립영화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보다 전문적인 제작, 배급, 상영의 체계를 설계하고 새로운 영화문화를 형성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인권영화제와 퀴어영화제의 예가 증명하듯이 독립영화의 표현의 자유 문제는 여전히 독립영화인의 가장 큰 이슈이며 지원과 투자 또한 장기적이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90년대 독립영화의 가장 큰 수확인 <낮은 목소리 1,2>의 변영주 감독은 두 편의 다큐멘터리를 끝내고 영화 제작을 지속할 대안을 찾지 못하겠다는 비관적인 발언을 했다(인디포럼 '98독립영화에 관한 세미나에서). 16mm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를 최초로 개봉관에서 상영하고 자주배급이라는 명제 하에 독자적 배급망을 구축하려고 노력했던‘보임’이 부딪힌 현실은 한국 독립영화의 불투명한 상황을 반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작, 상영, 배급의 총체적인 시스템의 확립을 통한 독립영화 발전의 단초들은 곳곳에서 확인된다. 개별적인 독립영화의 제작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지속되고 있으며 단편, 애니메이션, 다큐 등의 독립영화가 예술극장과 지역 사회에서 더 많은 대중에게 소개되고 있고 새 정부의 장편, 단편에 대한 새로운 사전 제작 지원책이 마련,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독립영화인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점은 확산되고 있는 독립영화의 관객들일 것이다. 명확한 한계를 담고 있는 상업영화로부터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많은 관객들은 새로운 독립영화를 찾고 있다.
독립영화는 분명 헐리우드적인 상업영화가 지배하는 한국영화 현실에서 새로운 자극으로서의 역할을 계속 수행할 것이며, 우리의 영화문화를 풍요롭게 이끄는 핵으로서 더욱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키워드

영화,   독립,   사회,   문화,   미디어,   민족,   현실,   독립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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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4.24
  • 저작시기2005.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31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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