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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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만해 한용운, 그의 일생을 돌아보다.
2)만해 한용운의 시작(詩作)
3)만해 한용운은 우리에게..

본문내용

대한 의지만 새겨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종교나 인생에 대한 신념 등이 나타나 있는 작품도 많다. 모두 훌륭하고 마음에 와닿는 시들 이지만, 역시 우리의 마음에 아로 새겨지는 그의 작품은 그의 나라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와 닿을 때가 아닌가 싶다. 이러한 그의 작품 생활이 우리의 마음에 와닿는 까닭은 그가 실천한 삶이, 쉬운 삶이 아니요, 그가 써낸 작품이 쉬운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제라는 고통의 시간속에 진정 나라를 위한 글을 쓸수 있는 용기가 있는 까닭이요, 그것을 실천한 그의 삶이 존경스럽기 때문이다. 나라를 사랑하는 젊은이들의 진정한 스승인 만해 한용운 그의 시는 힘겨웠기에 누구보다 아름답다.
만해(卍海)는 중이냐?
중이 아니다.
만해는 시인이냐?
시인도 아니다.
만해는 한국 사람이다. 뚜렷한 배달민족이다. 독립지사다. 항일투사다.
강철 같은 의지로, 불덩이 같은 정열로, 대쪽 같은 절조로, 고고한 자세로,
서릿발 같은 기상으로 최후 일각까지 몸뚱이로 부딪쳤다.
마지막 숨 거둘 때까지 굳세게 결투했다. 조종현, 「만해 한용운」 "서시"
만해 한용운은 우리에게..
일찌기 선생을 알고 있던 사회인사들은 선생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을 남겨 놓았다. 그들이 얼마만큼 선생을 흠모하고 존경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겠다.
산강재(山康齋) 변영만(卞榮晩)은 "용운일신(龍雲一身)이 도시담야(都是膽也)"라고 평했다.
《불교유신론》의 문장을 보고,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은 평하기를 "문체로 보나 사상으로 보나 근세에 짝을 찾기 어려운 글(近世 罕見其주)"이라고 했다.
'조선 불고의 대표적 인물'에 대한 투표가 월간지 《불교》에서 실시된 적이 있었다. 피투표자는 조선인 승려에 한했으며 투표자는 아무나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선생이 422표로 으뜸이고, 차점이 18표로 방한암(方漢岩)스님이었다. 나머지는 10표て3표에 불과했다. 이를 보아도 당시 선생이 불교계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송만공 선사는 늘 "우리나라에는 사람이 귀한데 꼭 하나와 반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하나는 바로 선생을 가르키는 것이었지만 나머지 반은 누구를 가르키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위당 정인보는 "인도에는 간디가 있고, 조선에는 만해가 있다", "청년들은 만해 선생을 본받아야 한다"라고 하여 한때 유명한 얘기가 되었다.
홍벽초(洪碧初)는 "칠천 승려를 합하여도 만해 한 사람을 당하지 못한다. 만해 한 사람을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명 아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다.
일본의 거물급 낭인(浪人) 두산만(頭山滿)은 만해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 있던 성재(惺齋) 김태석(金台錫) 옹에게 "조선의 큰 위인이 갔다. 다시는 이런 인물이 없을 것이고, 지금 우리 일본에도 없다"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풍란화(風蘭花) 매운 향내 당신에야 견줄쏜가.
이 날에 님 계시면 별도 아니 빛날런가.
불토(佛土)가 이의 없으니 혼아 돌아오소서 정인보, 만해한용운의날 추모시
참고:http://www.manha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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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6.03
  • 저작시기20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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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39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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