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서론
Ⅱ ‘나’와 ‘타자’에 관한 루리 교수의 초기 인식
1. 루리 교수의 타자화: 자기 존재의 확인
2. 식민주의적 타자화
Ⅲ 타자에 대한 인식의 변화
1. 루시의 강간 사건을 통한 루리 교수의 인식 변화
2. 베브 쇼를 통한 루리의 인식 변화
Ⅳ 추락과 회복
1. 추락의 과정
2. 조화로운 회색지대 건설
Ⅴ 결론
참고문헌
Ⅱ ‘나’와 ‘타자’에 관한 루리 교수의 초기 인식
1. 루리 교수의 타자화: 자기 존재의 확인
2. 식민주의적 타자화
Ⅲ 타자에 대한 인식의 변화
1. 루시의 강간 사건을 통한 루리 교수의 인식 변화
2. 베브 쇼를 통한 루리의 인식 변화
Ⅳ 추락과 회복
1. 추락의 과정
2. 조화로운 회색지대 건설
Ⅴ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동체의 설립을 주장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는, 역사는 결코 덮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반드시 행위에 대한 책임이 따른다는 것, 결론적으로 사람은 누구나 역사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알리려고 했다. 이러한 과정은 루리 교수가 타자화를 멈추고 역사적 책임감과 공동체 의식을 느끼기 시작하는 과정으로 표현된다.
작품의 후반부로 갈수록 루리 교수는 ‘나’를 깨뜨리고 나와 타자가 공존하는 조화로운 회색지대를 건설하게 된다. 사실 이러한 과정은 그가 루시의 강간 사건이나 베브 쇼를 통해서 갑자기 깨닫고 실행하게 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감각적 경험에서 유리된 채 순수한 관념의 영역 속에서 일상적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리얼리티의 무차별적인 살육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상상력을 순수하게 유지하느냐, 하는 게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양쪽이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Coetzee 37)
작품 초반부의 그의 수업 내용에 위와 같은 언급이 나온다. 그는 지식적으로는 조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아가 너무 강해 받아들이지 못하던 변화를 여러 사건을 통한 인식의 변화 후에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루시의 직관이 결국 맞다. 그는 이해한다. 그가 자기를 버리고 집중하면, 그는 거기에 있을 수 있다. 그는 그 남자들이 되고, 그들에게 깃들이고, 그들을 자신의 혼으로 채울 수 있다. (Coetzee 241)
마침내, 위의 인용구에서 우리는 루리 교수의 큰 깨달음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아버지가 그 장소에 있지 않았다는 루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는 분명히, 물리적으로, 그 곳에 있었고 그 사건을 보았다. 그런데도 루시는 그가 거기에 없었다고 했다. 이제야 루리 교수는 루시의 말 뜻을 이해한다. 그가 자기를 버리면, 즉 ‘나’라는 자아의식을 깨뜨리면, 그리고 그 후에 사건이나 사물 또는 사람 자체에 집중하면, 그는 그 곳에 존재하고, 진실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가 이제껏 강간 사건을,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한 루시의 대처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나’라는 척도를 가지고 그 모든 것을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그의 방식대로 일을 처리하기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그가 자아를 깨뜨리고 ‘나’와 ‘타자’의 벽을 허물고 집중했을 때, 그는 진실 그 자체를 볼 수 있게 되고, 심지어 자신이 그토록 증오했던 그 남자들, 강간범이 되어 그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나’를 깨뜨리자 ‘타자’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그들 사이의 장벽을 허물어버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루리 교수의 인식 변화는, 자신의 집이 털린 후에 그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지에 잘 드러난다. 예전의 그는 당장 경찰에 신고하고 범인을 잡아 처벌하고 배상을 받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와 ‘타자’의 구분이 허물어진 지금, 루리 교수는 이 절도 사건을 새로운 시각으로 본다. ‘나의 것’을 빼앗겼다기보다는 ‘우리’ 안에서 돌고 도는 물질의 재분배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보통 절도는 아니다. 떼로 몰려와서 그곳을 싹쓸이해 자루와 상자와 여행 가방에 물건을 가득 채워 달아난 것 같다. 전리품, 전쟁 배상, 거대한 재분배 운동의 일환. (Coetzee 267)
결국 그는 ‘나’와 ‘타자’ 간의 벽을 허물고 조화로운 회색지대를 건설하게 된다. 물론 아직도 그의 자아가 완벽히 깨졌다고 판단할 수 없고, 흑과 백이 진정으로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을 건설하려면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작품의 초반에서 단단한 바위처럼 부서질 것 같지 않던 루리 교수의 자아가 깨지고 그가 자신과 타자 사이에 놓였던 벽을 허물고 심지어 자신이 타자가 되는 경지에 이르는 변화의 과정을 거치는 것을 볼 때, 이러한 회색지대 건설이 아주 불가능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는 멜라니에 의해, 토우스 리버에서의 그 여자에 의해, 로잘린과 베브 쇼와 소라야에 의해, 그들 모두에 의해, 풍부해졌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서도, 실패에 의해서도, 풍부해졌다. 그의 가슴에 피는 한 송이 꽃처럼, 그의 가슴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넘친다. (Coetzee 289)
위의 인용구처럼, 루리 교수는 풍부해졌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나’에만 갇혀 타자와 세상의 진실을 바라보지 못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가 만났던 사람들, 좋은 기억들, 나쁜 기억들, 그 모든 것들이 그의 인식에 변화를 가져오고 그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과제는 그러한 풍부함을 바탕으로 어떻게 회색지대를 건설해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루리 교수뿐만 아니라 갈등과 고통의 시대를 거친 남아공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풀어나가야 할 숙제일 것이다.
Ⅴ 결론
루리 교수의 변화가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직도 갈등하고 있고 실제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의 초기의 태도를 볼 때, 그의 인식의 변화는 실로 놀랍고 희망적인 것이다. ‘나’만이 기준이라고 생각했던 이전과는 달리 ‘타자’를 나와 같은 존재로 인식하게 되고 ‘우리’를 인식하게 된 루리 교수를 보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오랜 역사적 갈등도, 극심한 개인주의에 갇혀버린 현대인들의 문제의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변화는 그런 것이다. 서서히, 아무도 모르게, 우리 속에 들어와 있는 것. 루리 교수가 서서히, 자신도 모르게 변화된 것처럼, 아픈 역사도 그렇게 서서히 치유되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J.M.Coetzee. 추락. 동아일보사. 2005.
황정아, 「너무 ‘적은’ 정치와 너무 ‘많은’ 윤리: J. M 쿳시의 『치욕』(Disgrace)」, 『현대영미소설』제14권 2호, 2007년.
박진아, 「쿳시의 소설에 나타난 타자의 수사학」,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박사학위논문, 2008년 2월.
이석구, 「J.M. 쿳시의 소설에 나타난 공동체의 정치학: 인종주의와 자유주의를 넘어」 , 『현대영미소설』제9권 2호, 2002.
작품의 후반부로 갈수록 루리 교수는 ‘나’를 깨뜨리고 나와 타자가 공존하는 조화로운 회색지대를 건설하게 된다. 사실 이러한 과정은 그가 루시의 강간 사건이나 베브 쇼를 통해서 갑자기 깨닫고 실행하게 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감각적 경험에서 유리된 채 순수한 관념의 영역 속에서 일상적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리얼리티의 무차별적인 살육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상상력을 순수하게 유지하느냐, 하는 게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양쪽이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Coetzee 37)
작품 초반부의 그의 수업 내용에 위와 같은 언급이 나온다. 그는 지식적으로는 조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아가 너무 강해 받아들이지 못하던 변화를 여러 사건을 통한 인식의 변화 후에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루시의 직관이 결국 맞다. 그는 이해한다. 그가 자기를 버리고 집중하면, 그는 거기에 있을 수 있다. 그는 그 남자들이 되고, 그들에게 깃들이고, 그들을 자신의 혼으로 채울 수 있다. (Coetzee 241)
마침내, 위의 인용구에서 우리는 루리 교수의 큰 깨달음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아버지가 그 장소에 있지 않았다는 루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는 분명히, 물리적으로, 그 곳에 있었고 그 사건을 보았다. 그런데도 루시는 그가 거기에 없었다고 했다. 이제야 루리 교수는 루시의 말 뜻을 이해한다. 그가 자기를 버리면, 즉 ‘나’라는 자아의식을 깨뜨리면, 그리고 그 후에 사건이나 사물 또는 사람 자체에 집중하면, 그는 그 곳에 존재하고, 진실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가 이제껏 강간 사건을,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한 루시의 대처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나’라는 척도를 가지고 그 모든 것을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그의 방식대로 일을 처리하기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그가 자아를 깨뜨리고 ‘나’와 ‘타자’의 벽을 허물고 집중했을 때, 그는 진실 그 자체를 볼 수 있게 되고, 심지어 자신이 그토록 증오했던 그 남자들, 강간범이 되어 그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나’를 깨뜨리자 ‘타자’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그들 사이의 장벽을 허물어버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루리 교수의 인식 변화는, 자신의 집이 털린 후에 그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지에 잘 드러난다. 예전의 그는 당장 경찰에 신고하고 범인을 잡아 처벌하고 배상을 받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와 ‘타자’의 구분이 허물어진 지금, 루리 교수는 이 절도 사건을 새로운 시각으로 본다. ‘나의 것’을 빼앗겼다기보다는 ‘우리’ 안에서 돌고 도는 물질의 재분배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보통 절도는 아니다. 떼로 몰려와서 그곳을 싹쓸이해 자루와 상자와 여행 가방에 물건을 가득 채워 달아난 것 같다. 전리품, 전쟁 배상, 거대한 재분배 운동의 일환. (Coetzee 267)
결국 그는 ‘나’와 ‘타자’ 간의 벽을 허물고 조화로운 회색지대를 건설하게 된다. 물론 아직도 그의 자아가 완벽히 깨졌다고 판단할 수 없고, 흑과 백이 진정으로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을 건설하려면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작품의 초반에서 단단한 바위처럼 부서질 것 같지 않던 루리 교수의 자아가 깨지고 그가 자신과 타자 사이에 놓였던 벽을 허물고 심지어 자신이 타자가 되는 경지에 이르는 변화의 과정을 거치는 것을 볼 때, 이러한 회색지대 건설이 아주 불가능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는 멜라니에 의해, 토우스 리버에서의 그 여자에 의해, 로잘린과 베브 쇼와 소라야에 의해, 그들 모두에 의해, 풍부해졌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서도, 실패에 의해서도, 풍부해졌다. 그의 가슴에 피는 한 송이 꽃처럼, 그의 가슴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넘친다. (Coetzee 289)
위의 인용구처럼, 루리 교수는 풍부해졌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나’에만 갇혀 타자와 세상의 진실을 바라보지 못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가 만났던 사람들, 좋은 기억들, 나쁜 기억들, 그 모든 것들이 그의 인식에 변화를 가져오고 그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과제는 그러한 풍부함을 바탕으로 어떻게 회색지대를 건설해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루리 교수뿐만 아니라 갈등과 고통의 시대를 거친 남아공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풀어나가야 할 숙제일 것이다.
Ⅴ 결론
루리 교수의 변화가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직도 갈등하고 있고 실제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의 초기의 태도를 볼 때, 그의 인식의 변화는 실로 놀랍고 희망적인 것이다. ‘나’만이 기준이라고 생각했던 이전과는 달리 ‘타자’를 나와 같은 존재로 인식하게 되고 ‘우리’를 인식하게 된 루리 교수를 보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오랜 역사적 갈등도, 극심한 개인주의에 갇혀버린 현대인들의 문제의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변화는 그런 것이다. 서서히, 아무도 모르게, 우리 속에 들어와 있는 것. 루리 교수가 서서히, 자신도 모르게 변화된 것처럼, 아픈 역사도 그렇게 서서히 치유되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J.M.Coetzee. 추락. 동아일보사. 2005.
황정아, 「너무 ‘적은’ 정치와 너무 ‘많은’ 윤리: J. M 쿳시의 『치욕』(Disgrace)」, 『현대영미소설』제14권 2호, 2007년.
박진아, 「쿳시의 소설에 나타난 타자의 수사학」,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박사학위논문, 2008년 2월.
이석구, 「J.M. 쿳시의 소설에 나타난 공동체의 정치학: 인종주의와 자유주의를 넘어」 , 『현대영미소설』제9권 2호, 2002.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