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찾는 우리역사 - 한영우 (요약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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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후퇴의 길을 걸었는데 북한의 경제적 고립, 특히 사회주의권의 붕괴가 경제의 위기를 더욱 가중화시켰다. 이런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실용주의적 측면을 보완하기 시작했으며 경공업분야에 집중적으로 관심을 가져 중국의 개방정책을 부분적으로 원용하기 시작했다. 또 나진선봉지구를 경제특구로 지정하면서 외국기업과의 합작과 자본도입을 적극 추진하였다.
제 5장 김영삼의 ‘문민정부’(1993.2~1998.2)
1960년 516이후 처음으로 정통성을 지닌 민간정부가 들어섰는데 5공, 6공 정부의 비리와 부정을 시정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정부 차관급 이상 공직자의 재산을 공개하도록 했는데 이는 국회의원과 4급 이상 공무원에게까지 확대되어 재산등록을 실시했다. 또한 전두환 대통령을 반란수괴 등 혐의로 구속했다. 경제 정책에도 변화가 생겼는데 1993년 시행된 ‘금융실명제’는 장기적으로 경제개혁의 기초를 놓았다는 점에서 국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우루과이 라운드협정 타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 ‘세계화’를 강조했다. 또한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해외에서 국내로 모셔와 국립묘지에 안장시켰고 옛 총독부 청사를 철거하였다. 그러나 만성적인 외환위기에 시달리던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지원을 공식 요청하면서 경제주권의 심각한 위축을 가져왔다. 이후 김영삼 대통령과 당의 인기는 급락하고 김대중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역사상 처음으로 여야간 정권교체가 일어났다. 김영삼 대통령은 반독재투쟁에는 공이 있지만, 국가 경영능력은 떨어진다는 비판도 일어났었다.
제 6장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1998.2.25~2003.2.24)
1. 1998년
김대중 당선자는 ‘국민의 정부’를 표방하고 출범했다. 특히 정부는 외환위기 극복과 구조조정을 위한 개혁에 세일즈외교를 전개했으며 민간에서도 금모으기 운동이 벌어졌다. 경제지표는 호전되어 갔지만 구조조정은 가정파탄과 노동운동을 격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교육계에도 혁명적 조치들이 발표되었으나 학생들이 교과교육을 소홀히 하는 등의 부작용도 있었다. 이런 사회의 변화에 양극화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사회불안이 가중되었다. 그러나 남북관계는 부드러운 방향으로 전개되었으며 일관되게 북한을 포용하는 ‘햇볕정책’을 밀고 나갔으며 현대 정주영 명예회장의 노력 끝에 금강산 관광이 가능하게 되었다.
2. 1999년
99년은 여야간 정쟁이 치열하고 국회가 파행적으로 운영되어 국민들에게 정치불신을 안겨준 해였다. 하지만 경제는 빠른 속도로 회복되어 외환위기를 완전히 극복했다. 국민연금제도를 시행했으며, 여러 유산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3. 2000년
2000년은 남북관계에 큰 변화가 온 역사적인 해였다. 남북정상간 회담이 성사되었으며 두 차례의 이산가족상봉이 있었다. 하지만 국내 정치와 경제는 점차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는데 16대 총선거는 정치에 대한 불신감이 높아진 분위기에서 치러졌고, 정부와 여당의 입지를 어렵게 만들었다. 국회를 장악하는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영남에서 단 1석도 당선되지 못한 것은 지역갈등이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는 대북정책을 둘러싼 견해차이도 작용했는데 퍼주기식의 햇볕정책을 시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얻은 것이 없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시기 경제상황은 상승분위기를 타며 외환보유고가 안정세를 이루었다.
4. 2001년
권력의 부정부패가 드러나면서 여당 실세와 대통령 친척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고 민주당 소장파 의원들이 당쇄신운동을 벌였다. 한편 햇볕정책으로 호전되었던 남북관계도 점차 경색되어갔는데 이는 공화당 조지부시가 43대 미국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북한에 외교적 압박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일본은 신사참배와 왜곡된 역사교과서의 수정을 거부하는 등 한국민을 자극하며, 북한에도 강경책을 쓰기 시작했다. 이런 보수기류는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게 하였고, 북한도 이에 자극되어 김정일의 서울답방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또한 2001년 한국은 3년 8개월 만에 IMF에서 빌린 돈을 모두 갚는데 성공했다.
5. 2002년
2002년은 임기 마지막해로서 16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진 동시에 월드컵이 개최된 해이기도 하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각각 경선을 통해 노무현과 이회창이 후보로 선정되었다. 이해의 대통령선거는 역사상 가장 낮은 투표율을 기록했는데, 이회창 후보가 다소 유리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노무현 후보가 약 2%의 근소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는 노사모 등 젊은 NGO들의 지지를 얻었다는 것과 노무현과 공조를 약속한 정몽준 국민통합21대표가 투표전날 갑자기 공조를 철회한대 대한 젊은 유권자들의 반발이 작용했다.
또한 국민의 관심을 끈 것은 월드컵축구경기였다. 일본과 공동으로 개최한 2002 한일 월드컵은 한국이 예상을 뒤엎고 4강에 올라 국민들을 열광케했다.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도 계속되었다. 북한의 핵문제는 남북교류사업의 가장 큰 장애물로서, 북한은 2003년 핵확산금지조약(NPT)를 탈퇴를 선언하여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는데 이 상태에서 남북이 교류하는 것을 미국이 달갑게 보지 않아 남북교류사업도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제 7장 노무현의 ‘참여정부’(2003.2.25~)
노무현정부는 ‘참여정부’를 내세워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와 차별화를 보여주려고 했다. 지역정서에 힘입어 선거에 이긴 것이 아니라 20~30대의 네티즌의 힘을 입어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은 50~60대 기성세대의 소외감과 반발이 만만치 않아 세대 간 갈등을 어떻게 푸느냐가 중요한 정치적 과제로 등장했다. 참여정부는 대외관계에도 어려움에 봉착했는데 북한의 핵문제에 대한 미국의 강경정책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 가운데 이라크 전쟁이 터졌다. 정부는 국민의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국회의 동의를 얻어 공병부대와 의료부대를 이라크로 파견했다. 또 미군 장갑차에 여중생이 치여죽는 사건이 발생해 한미주둔군지휘협정인 SOFA의 개정을 촉구하는 여론이 비등했으며 반미감정이 치솟았다. 하지만 이렇게 남북관계와 한미관계까 어려운 가운데서도 남북경제협력은 계속됐으며, 남북이산가족 금강산상봉이 처음으로 육로로 이루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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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36페이지
  • 등록일2009.06.20
  • 저작시기2009.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4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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